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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가 기록하는 항우의 최후의 장면, 그는 자신의 말 오추와 함께 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래 용이었다는 말은 주인을 잃고 강에 뛰어들었다. 이성과 합리의 눈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이야기의 세계. 이야기에는 있지 않은 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소설가 김훈이 인간이 말(馬) 등에 처음 올라탄 무렵, 시원(始原)의 시대를 향해 연필을 든다. 결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두 나라, 유목을 하는 초(草)와 농경을 하는 단(旦)의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의 풍경. 전쟁터엔 항상 말이 있고, 말은 자신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태어나고 죽어간다. "어미의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야백은 네 다리로 섰다. 네 다리가 땅을 디딜 때, 야백은 그 다리에 와 닿는 느낌으로 땅의 든든함을 알았다." 흰 점이 있어 야백(夜白)이라는 이름이 붙은 말의 이야기다.
김훈 장편소설. <칼의 노래>의 시대 임진왜란과 <남한산성>의 시대 병자호란의 참혹함을 보던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서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김훈은 말한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가차없는 문장에선 온기 대신 비릿함이 느껴진다. 그 비정함이 마주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합리 따위를 찾아다니는 생명체의 노고를 막고 선, 벽처럼 단단한 '운명'이다. 초와 단의 장수를 태우고 전장을 누비던 신월마(新月馬) 혈통의 토하(吐霞)와 비혈마(飛血馬) 혈통의 야백(夜白)이 필멸의 전쟁의 풍경에서 조우하기까지. 말은 그저 이유를 모르고 달릴 뿐이다. 문명과 야만이 할퀴고 지나간 폐허를 무연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