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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이호다. 손으로 환자의 상태를 척척 살피고 빠르게 살려내는 원로 의사. 소설에서 묘사되는 그는 병원의 기둥 같은 대선배였다. 겸허하면서도 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인물을 떠올렸다.
이 책의 저자는 40년간 죽음들과 마주해 온 노인 의학 전문의다. 책의 부제는 '33가지 죽음 수업'이지만, 죽음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죽음을 보아오며 몸속에 축적한 사유들을 토대로 삶과 병, 죽음, 치료행위에 대해 쓴 글의 모음에 가깝다. 죽음에 관한 통찰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좋아서 끝까지 읽었다.
이 의사는 "의료 서비스에는 옹졸한 훈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 책에는 환자에 대한 아무런 편견도 판단도 없다. 이 점에서는 건조하다. 다만 저자가 단호해지거나 통념에 날카롭게 의문을 던지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현 시스템에서 사람, 그중에서도 약자가 소외된 지점이다. 이 점에서는 따뜻하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건조하면서 따뜻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의 생각할 때 나는 두 가지 이미지를 같이 떠올린다. 칼 같은 사람과 동굴 같은 사람. 이 책의 저자는 동굴 같은 전문가다. 그 깊은 속을 한번 거쳐 나온 말들이 책에 가득 실려 있다. 곱씹어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