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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의 시는 불온한 검은 피였고, 나쁜 소년이 선 자리에 남은 무엇이었다. 시인이 된 후 30년이 지났다. 한 권의 시집만 남기고 오래 자취를 감췄던 전설 속의 시인의 시간도 한참, 이제 이 자리에서 시인 허연이 자신의 노래의 현재를 바라본다. 박형준과 나눈 대화가 담긴 발문에서 그는 이번 시집을 이렇게 말한다. '이번 시집은 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세상에 그냥 있었던 거구나 하는 인정......' 어떤 시절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허연의 다섯 번째 시집이 말한다.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트램펄린>) 라고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세상이 나를 떨어트리는 이유가 내가 미워서가 아닌 '그냥'이라는 사실을 안다. 트렘펄린이 나를 미워할 만큼도 내게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허연의 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폐수에 빠진 새를 건져낸 날' 받은 부고를 기억하고, (<경원선 부고>) '강물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한다는 것 / 한 번도 서럽지 않다는 것'(<강물에만 눈물이 난다>)을 직시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는 거지 장대비를 피하던 낡은 집들을 항구에 피신했던 목선들을......" (<기적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을 잊고, 그러면서도 머문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 바로 그곳을 흐르는 이 노래.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라고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노래처럼, 우리의 현재, 이 모든 지리멸렬함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과거형의 문장으로 묘사되는, 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