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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내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 '그녀'가 있다. 40년 전, 1977년 여자대학 신입생 기숙사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현재 그럭저럭 신작을 꾸준히 발표할 수 있는 소설가가 되었다. 말을 더듬는다는 약점을 늘 의식하느라 '소심함과 자기합리화의 조합인 어정쩡한 온건함'을 지녔던 나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을, 자기중심주의를, 우월감과 피해의식을 편하다고 생각하며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해왔다. 그녀는 우리의 기숙사 시절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이름의 소설로 발표한 적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내면서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녀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나' 김유경. 그녀라는 필터를 거친 스무 살 '김유경'이 낯설다. 소설에 묘사된 그녀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너무도 다르다.
소설가 은희경이 묘사하는 여자대학 기숙사. 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가 말하듯 당대의 문화에 대한 세밀한 묘사, 날렵하고 적절한 문장, 여성의 경험적 진실에 충실하고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시선, 무엇을 기대하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정숙 노력 순결'이 교훈이던 지방 여고를 벗어나 처음 접한 서울, 낯섦과 다름이 파열음을 만들어내는 공간을 채우는 여성들의 개성을 은희경다운 날카로움으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미팅을 주선하며 '남자의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성인의 양심과 진실함에 더 가치를 두는 현명' 하며 '남자들이란 타고나기를 여자의 외모를 따지도록 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움'을 지닌 여성을 당당하게 찾는 모순을, '학도호국단 구령을 붙이기 위해 높은 사다리를 기어올라 가는 악몽을 자주 꾸는' 시대가 만들어내던 공기를, 2017년을 사는 김유경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같은, <새의 선물>을 사랑하는 독자가 기다렸을 섬세한 문장을 통해 소설은 감지했으나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던, 어떤 시간들에 대해 정직하게 회상한다. "은희경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한국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나와 닮은 목소리를 드디어 만나 그이의 차분하지만 낯설고 독보적인 말에 과녁처럼 관통당하는 일이다."라는 소설가 정세랑의 추천사처럼, 은희경을 사랑하는 독자에겐 모두 그들 자신만의 은희경이 있다. 오랫동안 좋아한 소설가가 발표한, 여전히 동시대의 욕망과 정확히 같은 속도로 호흡하는 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일이다. 우리의 현재, 은희경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