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혼돈은 더 심해진다. 예컨대 1990년대 초의 보스니아 내전이나 지난 세기말의 코소보 내전에서 어느 쪽이 선(善)이었고 어느 쪽이 악(惡)이었으며 어떤 처방이 바람직했는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서, 전통적인 좌우 개념은 효율적 준거틀이 되지 못한다.이것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잣대를 꽉 쥔채 '코드'에 달려든 고종석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안락사 등의 많은 '코드'에서 고종석은 별다른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어떤 전망은 왠지 또 다른 전망과 상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21세기의 전망이나 모색이란 것이 결국엔 '혼란, 혼돈, 겹겹이 게다가 조금씩 비껴져 겹쳐진 층위들로 귀결되고 마는가' 싶어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막연한 좌우가 아니라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사회주의니 개인주의니 집단주의니 하는 범주를 사용해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 견해를 지닐 수도 있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사회주의자에 대항해 한 목소리를 내는데,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자유주의자에 대항해서 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게다가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같은 말이 역사와 정치의 굴곡에 감염돼 얻게 된, 다양하고 때로 모순되는 의미의 겹은 이념의 정체성을 위협하면서 흔히 토론의 근본을 허물어뜨린다. (본문 167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