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세계’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영화에 관해 뭔가 이야기하거나 글을 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영화에서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만 ‘세계’라고 대답해 버릴 때가 많은 듯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 그리고자 하는 건 잔뜩 있지요. 우선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당연히 그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도쿄의 거리나 배우의 얼굴도 그리고 있지요. 90분이니 100분이니 하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는 표현도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모두를 포함해, 영화라는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이라 해보죠. 그렇게 부르는 게 아무래도 제게는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호들갑처럼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영화 카메라는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에 글을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쓰이는 기계입니다. 카메라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오려내는 겁니다. 눈 앞의 사물이 발하는 빛을 그저 물리적으로 네모나게 오려내는 겁니다. 이게 카메라의 유일한 기능이라 해도 되겠지요." (영화는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지음, 홍지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