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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 문장

"저는 이 ‘세계’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영화에 관해 뭔가 이야기하거나 글을 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영화에서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만 ‘세계’라고 대답해 버릴 때가 많은 듯도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 그리고자 하는 건 잔뜩 있지요. 우선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당연히 그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도쿄의 거리나 배우의 얼굴도 그리고 있지요. 90분이니 100분이니 하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는 표현도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모두를 포함해, 영화라는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이라 해보죠. 그렇게 부르는 게 아무래도 제게는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호들갑처럼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영화 카메라는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에 글을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쓰이는 기계입니다. 카메라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오려내는 겁니다. 눈 앞의 사물이 발하는 빛을 그저 물리적으로 네모나게 오려내는 겁니다. 이게 카메라의 유일한 기능이라 해도 되겠지요." (영화는 ‘세계’를 그리기 위한 기술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지음, 홍지영 옮김

남녀의 섹슈얼리티 인식의 불균형 격차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여성들은 섹슈얼리티 억압에 맞서 남성을 설득하는 데 지쳤다. 이 과정에서 “페미냐”라는 심판을 당하고 고초를 겪는 심문(審問)과 신문(訊問)에 시달린다. ‘페미’는 새로운 레드 콤플렉스가 되었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비키와 응우옛은 손을 잡고, 촉감으로 오가는 온기가 그들 주위의 추위와 박물관이 모두 가상임을 상기시키고 손을 놓고, 난간에 몸을 기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비키는 대화 내용보다는 말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던 담배 연기, 담배 연기 뒤로 맴돌던 응우옛의 얼굴, 응우옛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밤을 구성하는 그래픽들, 박물관 섬의 긴 회랑을 둘러싼 강줄기 너머 저 먼 골목에서 미끄러지고 있는 바이크 테일 램프 불빛이 물고기 같다고. -「핌」에서

핌·오렌지빛이랄지. 이상우 지음

예컨대 이런 것이다. 독서 모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서로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결론이 나지도 않는다. 길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두가 끄덕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색한 적막만 감돈다. 그래도 계속 만난다. 그곳에서 뭔가 새로운 사유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때 철학책 독서 모임은 우리가 과거 경험을 넘어서 다른 경험들과 접속하는 일종의 만남 구역이자 지적인 교차로가 된다.

철학책 독서 모임. 박동수 지음

여성의 ‘사회’ 진출이 사실상 공사 영역에 걸친 이중 노동이라는 현실 때문에 여성들은 과로와 경력 단절을 피해 비혼을 선택하고, 이는 저출산과 동물과의 반려 인생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근대인의 이상형은 전진을 멈출 수 없는 “근대화 전선”을 통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해 가는 사람이다. 그러한 개척 전선, 그러한 프론티어 덕분에 근대인은 자신에게서 떨쳐내야 하는 모든 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진보하기 위해 지향해야 하는 모든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근대인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고 있던 사람이었다. 요컨대 어둠에서 빛으로, 계몽으로 향해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 특이한 좌표계를 정의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과학’을 사용한 것은 과학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의 혼란이 근대화의 장치 전체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실과 가치를 다시 뒤섞기 시작한다면, 시간의 화살은 비행을 중단하고 주저하며 사방으로 꼬여서 마치 스파게티 한 접시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존재양식의 탐구.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황장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