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란 책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2024년 3월 3일 00:00 토트넘 vs 팰리스. 경기 시작이 자정인지라 본경기를 볼 수 없었던 초등생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패드를 켜고 EPL 하이라이트를 보더니 환호를 질렀다. "손흥민 EPL 13호골, 공동 6위!" 아시안컵에서 복귀한 후 EPL에서 손흥민의 첫골이었다. 아들은 축구 선수 중에 손흥민을 가장 좋아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의외로 '인성'이란 대답이 나왔다. "실력도 월드클래스인데, 인성까지 좋잖아요!" 나는 손흥민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손웅정 감독이 2010년부터 작성해온 독서 노트를 바탕으로 김민정 시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묶은 책. 한국에서 나갈 때마다 책을 한 번에 이삼십 권 챙겨가고, 모자라면 인편을 통해서 받기도 했다는 손웅정 감독은 책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독서를 통해 지금 간절하게 필요한 문장을 찾고 그 통찰을 발판 삼아 지금 처한 상황을 새롭게 보려 했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 기본, 가정, 품격, 통찰, 행복 등 열 세가지 키워드를 다룬다. 좋은 책은 세 번 이상 정독하고 중요한 부분은 검정, 파랑, 빨강 볼펜으로 표시를 해가며 더 공부를 해야겠다 싶은 것들은 메모를 하며 전투적으로 책을 읽고 노트에 필사를 했다면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글씨는 쓰는 일과 같았다고 비유를 한다. 축구 인생 50년, 독서 인생 30년, 노트 인생 15년. 이 모든 시간을 가다듬어 지혜로 벼려낸, 지금은 우리가 손웅정의 인생 수업을 경청해야 할 때이다!- 편집 주간회의
"봄에는 젊은작가상, 김멜라 대상"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맞는 열다섯 번째 봄이다. 2021년부터 <나뭇잎이 마르고>, <저녁놀>, <제 꿈 꾸세요>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매 해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사랑하고 욕망하는 작가 김멜라가 <이응 이응>으로 마침내 대상을 수상했다. 연인과의 '바로 그 포옹에서 시작'(48쪽)된 이 이야기는 '성적 욕망을 해소해주는 기계'가 있는 어떤 세계에서 감각 신경세포에 주어지는 (그야말로 기계적인) 자극이 아닌, 지금은 사라진 특정한 누군가와의 포옹을 그리워하는 인물 '오미자물'에게 귀를 기울인다. 살갗이 아니라면 우리가 놓이는 자리는 어디여야 하는지 질문하는 이 이야기는 오독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전진하는데, 놀랍게도 이야기의 끝은 '저녁놀'의 빛깔처럼 따스하다. 사랑하고 욕망하는 김멜라의 인물들은 일관되게 오해를 무릅쓰고 전진해왔다는 점에서, 작가의 현재가 집약된 소설로 읽혔다.
젊은 작가들의 이야기는 미래시제에 놓여 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영 센터의 강습반에서 헤엄치는 느린 수영인 '주호'와 '희주'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와 함께 읽을 수 있을 공현진의 미래소설, 문장웹진에서 2만 회 이상 읽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화제가 되기도 한 <보편 교양> 김기태의 미래 소설, 진짜 신할머니를 차지하려는 굿 장면이 광기로 번득거리는 <혼모노> 성해나의 미래소설 등을 기대해 본다. 김지연의 <반려빚>의 '그날 밤 꿈에서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207쪽) 같은 장면을 상상하며 나도 나의 반려빚을 잘 달래고 갚으며 도래할 소설을 만나기 위해 잘 살고 싶어졌다. 세계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설 속에서 산책할 수 있다. 수상을 축하한다.- 편집 주간회의
"마음의 리듬이 시작되는 시간"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600호를 출간한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새로운 빛깔, 하늘색 프레임 안에 바닷빛이 놓였다. '시집 출간 제안을 받고 바로 눈 내리는 곳으로 떠났다'는 시인의 말 첫 줄부터 시인이 맡은 눈냄새가 밀려드는 듯하다. 여행산문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애독한 독자에겐 풍경까지 생생할 외딴 곳에 우리가 놓인다.
어디쯤 오고 있나요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가능성> 부분
'더 사랑해야 할 몇몇 얼굴들을 생각하다가' (<기차표>) / '결국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혼자 서 있었다' (<줄>)고 나는 적는다. '오래 액자가 걸린 자리에 사각의 자국이 남겨져 있'(<상실의 배>)다면 나는 바라볼 뿐이다. 이 자국이 놓인 자리에 시 말고 더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사랑과 나의 거리가 멀고, 우리가 멀기에 비로소 발생하는 리듬이 있다. 그러니 해설에 더한 이광호의 문장처럼 적을 밖에. '그리고 이병률이다. 말이 더뎌지는 순간이야말로 그 마음의 리듬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라고.(171쪽)- 편집 주간회의
"시인으로 20년, 박연준 신작 시집"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시인하다>
시인으로 20년을 보낸 박연준이 5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산문 <듣는 사람>(2024), <고용한 포옹>(2023)과 소설 <여름과 루비>(2022)등을 발표하며 시의 안팎을 오가는 사이 스무 살에서 마흔 살로 시간이 갔다. 많은 죽음이 지나가니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던 마음은 이제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유별난 슬픔이 잔잔해진 곳에서 화자는 이제 작은 것들을 본다. '이제부터//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유월 정원>)는 다짐으로 살아남은 자의 책무인 것처럼 작은 것들과 눈을 맞춘다. 절절 끓는 이에겐 부드러워질 시간이 기필코 올 것임을, 이미 액체로 녹은 이에겐 더 작아지고 더 순해져 기화할 시간이 반드시 올 것임을 예감하는 말과 함께 시의 리듬으로 말소리가 나직나직 작아진다.
끓여서, 잊는 거죠
질긴 시간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감각이 액체로 녹을 때까지
<나는 당신의 기일(忌日)을 공들여 잊는다>- 편집 주간회의
"김창완과 함께한 23년의 아침들"
2024년 3월 17일을 마지막으로 23년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은 SBS 파워 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주옥같은 오프닝 멘트를 모아 놓은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가 출간되었다. 매일 아침 9시, 다정하고도 조금은 무심한 톤으로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김창완 '아저씨' 덕분에 많은 이들이 고단한 세상 살이를 위로받고 또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이 얻곤 했다.
그와 애청자들이 함께 그려왔던 이야기는 아쉽게도 막을 내렸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창작자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아직도 힘든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준 따스하고도 담백한 말들은 이제는 책 속 문장이 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가장 김창완다운, 아날로그 감성의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그의 선물이다.- 편집 주간회의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의 사회파 미스터리"
지방 소멸, 고령화, 인구감소…남의 일 같지 않은 우리 사회의 암담한 현실이지만, 일단은 소설의 이야기다. 네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합병해 인구 6만을 유지하고 있는 난하카마시에는 모든 주민이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요양센터로 떠난 후 아무도 살지 않게 된 마을 ‘미노이시’가 있다. 새롭게 취임한 시장은 타지역에서 이사 오는 주민을 지원하자는 취지의 ‘I턴 프로젝트’를 시작, 업무를 전담할 ‘소생과’를 신설하며 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행보를 이어간다. 공무원 만간지는 소생과로의 전보를 일종의 좌천이라고 여기면서도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을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과연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일본 미스터리의 거장 요네자와 호노부가 드물게 선보이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 소도시를 부흥시키려는 공무원과 희망을 안고 이주해 온 주민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작가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재치 있는 필치로 담아냈다. 책은 어찌 보면 소소하고 또 우연의 일치에 불과해 보이는 일군의 사건들이 이어지는 단편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종장에 이르러 그 모든 우연처럼 보였던 것이 우연이 아니고, 호의로 보인 것이 호의가 아님을 깨달은 순간, 우리는 놀랍고도 씁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를 미스터리의 형식으로 담아낸 작가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작가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가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그야말로 나의, 우리의 ‘비극’이다.- 편집 주간회의
"정호승에서 최지인으로 창비시선 500"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이대흠 <목련> 40쪽
목련 피는 계절, 이대흠의 시의 마지막 행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를 제목이 인용한 창비시선 500번 기념 시선이 출간되었다. 401번으로 1948년생 시인 김용택의 <울고 들어온 너에게>(2016)가, 499번으로 2000년생 시인 한재범의 <웃긴 게 뭔지 아세요>(2024)가 출간된 것처럼 창비 시선의 400번 시대는 한국시의 현재와 미래가 어우러지는 시기였음을 엮은이 안희연, 황인찬은 주목한다. 401번에서 499번까지 이름을 올린 시인들의 시 중 한 편씩만 골라 현재적으로 어우러지는 시 90편을 물 흐르듯 엮었다.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박형준 <달 나라의 돌> 72쪽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안희연 <슈톨렌> 74쪽
인용한 박형준-안희연처럼 안미옥-박연준, 장석남-박라연, 고영민-황인찬 등으로 시가 맞닿아 배치되어 있는데, 접한 시와 시 사이에서 훈기가 일면서 시를 읽는 새로운 리듬이 만들어지는 점이 읽는 내내 신기했다.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읽는 현재적인 시의 풍경. 창비시선의 시 중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읽는 시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응답한 77인의 시인의 답을 더해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도 함께 출간되었다.- 편집 주간회의
"생애주기 호르몬 사용설명서"
세상의 부조리가 유독 하나하나 크게 보이고 사람들의 무례함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때, 까딱하면 이제 나 곧 소리를 지를 수도 있겠다 싶을 때, '설마'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번뜩 스쳐 지나간다. 슬며시 달력을 꺼내 본다. 어김없다. 정확히 생리 일주일 전이다. 좌절스럽다. 호르몬에 또 당했다. 몸의 작용에 그리 둔하지 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호르몬의 위력을 통감할 것이다. 매달 당해도 거의 매번 방어에 실패한다. 호르몬, 그게 대체 뭐길래 내 감정을 이리 무지막지하게 조종하나. 그래도 PMS 증후군에 관한 한 호르몬의 작용은 날짜 계산으로나마 알 수 있기라도 하지, 그 외에 내 몸과 마음에 어떤 호르몬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막연히 상상해보면 두렵기까지 하다. 내 의지라는 것은 사실 호르몬의 의지인걸까? 호르몬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 걸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들에 답한다. 세계적 내분비 전문의인 저자가 인간의 생애 주기에 따라 어떤 호르몬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들려준다. 산모의 만성 스트레스, 그러니까 코르티솔의 과도한 분비는 아이가 태어나고 난 이후 신체와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생후 첫 1~3년, 아기의 뇌에선 호르몬 폭풍이 일어나는데 이 시기가 앞으로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과체중과 호르몬 사이엔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고, 피임약은 기억력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노인의 식욕 감퇴 역시 호르몬과 연결되어 있다. '내 몸이 왜 이럴까', '인간은 왜 이럴까'와 같은 질문들에 호르몬이 줄 수 있는 답변이 많다니 놀랍다. 호르몬에 관한 체계적인 교양서로서 이 책은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눈을 뜨게 한다. 몸과 건강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빠져들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 주간회의
"매일의 삶을 사랑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매일 아침 알람으로 눈을 뜨고 회사로 출근했다 집으로 돌아온다. 주말이 되면 살짝 들뜨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급격히 사그라든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일주일을 준비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분기가 가고, 그렇게 한 해가 흐른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워진다.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의 저자 김신지가 바로 이 같은 질문에 이 책을 통해 답을 준다. 24절기가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라고. 저자는 24절기에 따라 1년을 살아본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청명 즈음에는 꽃비를 맞으며 산책하고, 하지에는 제철 감자로 요리를 해보고, 입동에는 그간 뜸했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며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해 본다.
이 계절에 맞는 꼭지를 읽어도 좋고, 곧 다가올 그리운 계절을 그리며 그에 맞는 글을 읽어도 좋은 책이다. 곧 다가올 소만 즈음에는 (2024년엔 5월 20일.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로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 나만의 여름 맞이, 매실을 사다 깨끗한 유리병에 설탕과 함께 차곡차곡 담아야겠다. 그리고 잠시 오늘도 수고한 나를 토닥여 줘야겠다.- 편집 주간회의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신작소설"
<망원동 브라더스>,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신작 소설. 2003년 대전시 구도심에 자리한 '돈키호테 비디오'의 '라만차 클럽'에서 중학생이던 아이들은 돈키호테 아저씨와 한 철을 보냈다. IMF가 쓰나미처럼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부모의 조기퇴직과 떠밀리듯 개업한 요식업 업장과 필연적인 폐업이 남았고 방치된 아이들에겐 '돈아저씨'와 떡볶이를 먹으며 <고양이를 부탁해> 비디오를 보고 <어린 왕자> 소설을 읽는 시간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돈키호테 아저씨의 산초 역할을 하던 '진솔'은 15년이 지나 다시 대전으로 와서 그때 그 아저씨를 기억해낸다. 외주 프로덕션 6년차 피디로 일하다 조직에 자기 아이템을 도둑맞고 끝내 잘리게 된 솔은 유튜브 컨텐츠로 다시 일어서려 한다. 돈키호테 비디오 자리에 가게만 남기고 사라진 '돈아저씨'의 행방을 찾는 유튜브 컨텐츠가 그의 기획이다.
돈키호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라만차와 톨레도, 에스파냐 전역을 달렸다. 시대의 돈키호테 장영수 아저씨를 찾는 솔의 컨텐츠도 대전으로, 서울로, 통영으로 장면을 바꾸며 학생운동, 학원가, 비디오 대여점, 출판사, 영화사에서 펼쳐진 아저씨의 모험을 수집한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필요 없는 강의를 파는 일, 저명한 교수의 이름으로 대리 번역물을 출판하는 일과 타협하지 않아 아저씨는 가는 곳마다 불화했다. 상인들에게 두들겨맞는 돈키호테의 모험을 볼 때처럼, 돈아저씨의 실패는 우습고 애처로워서 끝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저씨를 찾는 여정에 동행한 그 라만차 클럽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솔'에게 변액보험, 경제적 자유, 파이프 라인, 마세라티 같은 단어를 말한다. 그때의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어지는 소설. 그 끝에 우리의 '돈 아저씨'가 서있을 것만 같다.- 편집 주간회의
"1978-2024 이어질 시의 모험"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출발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시적 여정이 2024년 600호에 도달했다. 테두리를 색으로 감싼 길쭉한 사각 프레임, 2024년에 시를 읽는 독자의 눈으로 봐도 어색함이 없는 故오규원 시인의 디자인을 근간으로 계속될 시의 모험을 기대하며 시인선 600번 기념 시선을 맞는다. 표지 뒷면에 놓이는 '시의 말'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날개 환상통>, 김혜순, 527번 (39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의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김혜순, 567번 (83면)
<날개 환상통>으로 ‘2023년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을 수상하기도 한 김혜순은 이런 시의 말을 남겼다. 501번 이원(2017년)부터 599번 이장욱(2024년)까지 시의 말이 놓인 자리와 함께 미래의 시를 향해 푸른 항해를 시작한다.- 편집 주간회의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
검사인 히로키에게는 등교를 거부하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 인간에게는 당연히 걸어야 할 평범한 길이 있다고, 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의외로 많고 그 사람들과 범죄와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진다고 믿는 그는 아들이 그 길을 벗어나게 될까 초조하다. 침구 전문점 직원으로 일하는 나쓰키는 인생을 통째로 규정하는 비밀을 안고 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타인이나 사회와의 연결을 최대한 지양하는 삶을 살지만,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롭다. 대학생 야에코는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학교 축제 준비위원으로서 ‘다이버시티 페스티벌’을 기획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과 연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는 남자를 만난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드러나는 순간, 소설은 독자를 강렬하게 흔들어놓는다.
2021년 출간 이후 일본을 뒤흔든 문제의 베스트셀러. ‘다양성’이라는 말에도 쉽게 포함되지 못하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죽이고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잡을 다른 손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책은 정욕(正欲),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지, ‘바르다’는 것, ‘어엿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공격적으로 묻는다. 그리고 바르지 않다고,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 욕망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고 나서도 쉽게 입을 때기 어렵게 만드는, 그럼에도 마음속 한구석에 균열을 일으켜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념을 주체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작. 카프카가 말했던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편집 주간회의
"그림책 작가 이수지의 생각들"
<파도야 놀자> <여름이 온다> 등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림책 작가 이수지의 에세이가 출간됐다. 도서 표지를 장식한 색색의 컬러는 <이 작은 책을 펼쳐 봐>의 책 속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사 없이 그림만으로 섬세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해온 이수지의 세계에, 이렇다 할 그림 없이 이야기만 가득한 책이 등장했는데 어쩐지 그 서사에서도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로서, 엄마로서, 예술가로서, 그리고 최고 권위의 상(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수상자로서의 이수지를 면밀히 기록하고 있다. 때론 일기 같기도, 때론 작업 일지 같기도 한 솔직한 글들 사이에서 이수지 작가가 추구해온 예술의 세계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수지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그림책 혹은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편집 주간회의
"금서 가이드북"
카프카는 책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지만 책이라는 도끼의 특징은 내면만 깨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어붙은 내면이 깨부수어진 사람은 반드시 바깥세상의 어느 지점도 깨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떤 책들은 금서가 된다. 세상이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있길 바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빨간 선 너머의 영역은 언제나 매혹적이고, 금서가 존재하는 한 금서의 독자 또한 존재한다. 문화부 기자인 저자는 이 붉은 책들의 탐험가로서,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금서 30편을 꼭 붙잡아 이 책에 묶어 두었다.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 팡팡의 <우한일기>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 등 금서로 지정되었거나 현재도 금서인 책들의 내용을 설명하며 책은 이들이 왜 금서가 되었는지, 금서의 지정으로 인해 저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함께 들려준다. 책 속의 내용도, 책을 둘러싼 현실의 상황도 주로 무겁고 안전하지 않은 이야기다. 책이 가진 불온한 힘은 때로 그것을 쓴 작가마저 파괴해버린다. 그러나 저자의 말마따나 "안전하지 못한 책이 안전한 사회를 만든다." 책이 담은 진실이 역사 속에서 유효하다면 그 책은 어떻게든 독자를 찾고 살아남아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어떻게든"의 한 방식일 것이다.- 편집 주간회의
"<구의 증명> 최진영 세계의 입구"
2010년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최진영이 2013년 발표한 장편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짧게 독자를 만난 후 절판되었다. <구의 증명>(2015)이 20여만 부가 판매되며 조용한 베스트셀러가 된 2020년대에 최진영의 세계에 새로이 입장한 독자들은 중고책으로라도 서너 배의 값을 치르고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만나기 위해 서성였다. 바로 그 소설이 11년 만에 초고 파일명이었던 <원도>라는 제목으로 독자의 곁에 돌아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원도'라는 인물이 있다. 횡령과 사기, 탈세와 살인혐의를 달고 여관을 전전한다. 가족도 그를 여러 번 버렸고 세상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골목길에 쓰레기처럼 놓인 처지로, 검붉은 피를 토하며 원도는 자신을 이곳으로 몰고 온 수많은 우연과 선택을 곱씹으며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되묻는다. '그 구멍으로 온 생이 콸콸 쏟아져 사라질 것'(30쪽)을 알면서도 기어이 삶의 이유를 되묻는 남자. 죽어 마땅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그의 악덕이 이어질수록 징글징글할 정도로 삶의 의지가 콸콸 쏟아진다.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음악 같은 문장은 그의 세계를 애호하는 독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하다. 자격 없는 삶도 마땅히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소설, 가차없이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서 희미하게 빛이 내려앉는 듯한 소설이다.- 편집 주간회의
"유튜버 밍찌의 기발한 맞춤법 공식"
명색이 한국어가 제1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구사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겠지만 사용자끼리의 규칙인 맞춤법은 너무 어렵다. ('너무'는 부정적인 뜻을 나타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부사였는데 최근 그 쓰임이 확장됨에 따라 긍정적인 표현에도 쓸 수 있게 되었다.) SNS 상에 맞춤법이 틀린 채로 글을 올리면 영원히 '박제'되어 고통받을 수도 있다. 인터넷상에 글을 쓸 때는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면 된다지만 실제로 글을 써야 하는 시험에서 맞춤법이 틀린다면?
전 대치동 국어 강사인 유튜버 밍찌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틀리는 맞춤법 100개를 정리하여 소개한 이 책은 그의 전 직업정신이 십분 발휘되어 기발한 방식으로 맞춤법을 쉽게 알려준다. 가령, 공중파 방송 및 신문에서도 심심치 않게 틀리는 '피다'와 '피우다'를 살펴보자. 목적어가 있는 것들은 '피우다'가 올바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담배는 피는 게 아니라 '피우다' 란 말이다. 바람은 '후후' 불고 '우우' 피우고. 헷갈린다면? 밍찌의 공식처럼 '우우'로 외우면 되겠다.
맞춤법?그게먼데?안지키면외않되? 밍찌 작가는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한 단계 레벨 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맞춤법 지키기"라고.- 편집 주간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