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는 1942년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태어났으며, 1960년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하여 루이 알튀세르, 조르주 캉길렘, 자크 라캉을 사사했다. 1965년 알튀세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등과 함께 『『자본』을 읽자』를 공동 저술하여 약관의 나이에 국제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명성을 떨쳤다. 1981년 프랑스 공산당의 이민자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발표한 이후 20여 년 동안 소속되어 있던 공산당에서 출당(黜黨)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이주자의 인권을 위한 투쟁 및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해 왔다. 국내에 번역된 『스피노자와 정치』, 『대중들의 공포』, 『우리, 유럽의 시민들?』, 『정치체에 대한 권리』 이외에도, 월러스틴과 공저한 『인종・국민・계급』과 『평등자유 명제』, 『시민 주체』 같은 다수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현재 파리 10대학 명예 교수 및 영국 킹스턴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사상적 이력은 외관상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려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문제 설정에 기반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원칙 및 주요 개념들을 쇄신하려는 작업을 수행하던 시기(1970년대 말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알튀세르가 정신 병원에 유폐된 이후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면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 의거하여 급진 정치 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기(198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이다. 이는 발리바르 사상을 단절론의 시각에서 읽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의 사상은 주목할 만한 일관성을 보여 준다. 그는 알튀세르와 절연하지도 않았고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1980년대 이래 그의 작업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국민주의에 대한 분석은 알튀세르의 과잉 결정 개념에 입각하여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좀 더 급진화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또한 평등자유(equaliberty) 및 시민다움(civility) 개념을 기초로 한 그의 민주주의론은 변혁의 정치를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 해방과 변혁의 정치에 새로운 현실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현대 유럽 이론가들 중에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참조하는 드문 이론가이고, 인종과 민족/국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의 유일한 사상가이며, 알튀세르 사상의 현재성을 고수해 온 유일한 인물이다.
발리바르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한 좋은 통로는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와 『정치체에 대한 권리』다. 앞의 책은 번역에 다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발리바르의 시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며, 뒤의 책은 그의 민주주의론의 새로움과 현실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발리바르가 보여 주는 마르크스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제시되는 마르크스의 모습과 매우 다르지만, 오히려 다양성과 역동성을 훨씬 더 생생하게 담고 있다. 또한 그의 마르크스론은 알튀세르의 관점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좀 더 세심하게 가다듬는다. 알튀세르는 유명한 ‘인식론적 절단’ 개념을 통해 한편으로 포이어바흐의 인간주의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초기의 마르크스와, 다른 한편으로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 생산 양식, 이데올로기, 지식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 등과 같은 역사 유물론의 고유한 개념들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킨 후기 마르크스를 구별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절단(coupure) 테제를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절단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동질적이거나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단절들(ruptures)을 겪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1848년에 이루어진 여러 혁명들이 실패로 끝난 이후 마르크스는 소수자 혁명론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착수하게 된다. 또한 1871년 파리 코뮌 이후에는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되었던 공산주의론을 정정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행기로서의 사회주의로 규정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재생산과 혁명의 관계를 좀 더 다양한 역사 인과성 도식에 따라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자본과 임금 노동의 모순을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은 다른 물질적 모순들, 곧 성적 차이 및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국민주의, 정상과 비정상 같은 모순들에 대한 분석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사상은 오늘날의 세계를 관통하는 계급 투쟁을 분석하기 위해 여전히 현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입장이다.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정세 속에서, 정세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입각하여 사고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태도를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다. 1980년대 이후 유럽 정치의 핵심 쟁점은 이주자 문제였다. 이주자 문제는 한편으로 1945년 이후 유례없는 30년 동안의 호황을 누린 전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주의적?민족주의적 갈등이 결합된 문제였다. 이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Etat national-social)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광범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도입한 서유럽이나 북미의 국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복지 국가 내지 사회 국가라는 용어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정세에서 왜 복지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의 대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지 해명하려면 국민이라는 범주를 중심에 놓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지 국가나 사회 국가라는 용어들이 서유럽 특정 국가들의 성격 및 정책을 표현하려는 제한적인 용어들인 데 반해, 발리바르가 목표로 삼은 것는 19세기 이래 국민 국가의 역사 전체(여기에는 사회주의도 포함된다)이기 때문이다. 국민 사회 국가라는 개념은 경제적 모순과 인종적?민족적 모순을 함께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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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발리바르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 곧 그 해체와 재구성을 시도한 시기였다. 우선 발리바르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한계를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에서 찾는다. 곧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모순을 다른 사회적 모순들이 근거해야 하는 중심적이고 심지어 유일한 모순으로 간주했으며, 더욱이 이를 진화주의나 종말론적인 역사 철학에 따라 사고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고되거나, 아니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결정적인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맹목은 곧바로 파시즘과 나치즘의 집권이라는 대가를 낳았으며, 궁극적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진단이다.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개념과 호명 개념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는 데 핵심적인 진전을 이룩했지만, 그의 이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는 역사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위기와 전환을 겪는 과정을 충실하게 분석할 수 없었다. 둘째, 그의 이론은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지만, 이데올로기가 다른 물질적 모순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쇄신은 발리바르가 1980년대에 시도했던 마르크스주의 탈구축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국민?계급』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맹목점으로 남아 있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국민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국민 형태(nation form) 개념을 제안한다. 국민 형태라는 개념은 프랑스, 러시아, 독일 같은 국민을 그 속에서 계급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공동체로 간주하는 가상에서 벗어나, 국민의 역사적 형성과 재생산, 전환 과정을 사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국민 형태 개념은 한편으로 ‘국적=시민권(nationality=citizenship)’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 민족체(fictive ethnicity)라는 또 다른 개념과 연결된다. ‘국적=시민권’은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국적을 가진 성원에게만 부여해 온 근대 국민 국가의 경향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표현된 보편적 민주주의 원칙을 제한해온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의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허구적 민족체는 국민 국가의 배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국민 공동체가 마치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초역사적 민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제시하는 가상을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 국가의 모순과 함께 그 변혁의 방향을 사고하기 위한 이론 틀을 마련한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는 계급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대중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탐색하는 데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는 네그리와 더불어, 하지만 또한 네그리와 매우 다른 관점에서 스피노자 다중 개념의 독창성에 주목한 최초의 연구자 중 한 사람이다. 네그리가 다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활용한다면, 발리바르에게 이 개념은 방법론적 개체론과 전체론을 넘어서는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을 사고하기 위한 원천이 되며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발리바르가 질베르 시몽동에게서 빌려 온 관개체성 개념은, 사회적 관계는 원자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지 않고 국가나 국민 같은 초개인적인 전체로 구성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개인이나 국가 같은 추상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히려 개인이나 국가는 스피노자가 ‘다중’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갈등 관계 속에서 생성, 재생산, 전환을 거듭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다중 개념은 개인성의 역사적 형상들을 생산, 재생산하는 사회적?제도적 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 놓는다. 또한 다중은 민주주의와 관련한 스피노자의 이중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가장 완전한 정체”로 규정하며, 모든 국가의 토대를 “다중의 역량”으로 제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론』 이곳저곳에서 다중으로의 복귀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위험 또는 파국적 상황으로 묘사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모순적 태도에서 민주주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다. 첫째, 스피노자에게 다중으로의 복귀는 아나키, 곧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폭력과 갈등의 폭발을 의미하며, 개인들에게는 생명과 안전의 위협을 뜻한다. 자연 상태와 유사한 이러한 아나키 상태에서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가 민주주의 및 정치적 관계 일반을 본질적으로 취약한 것, 또는 선험적인 토대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다중을 통제나 억제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든 국가의 토대로 제시한다. 이는 스피노자에게 정치란 초월적(가령 신)이거나 자연적인 토대(가령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에 기초를 둘 수 없으며 오직 인간들, 대중들의 집합적인 실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뜻한다. 곧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오직 제도들 및 집합적 실천의 결과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발리바르는 민주주의는 법적인 관점에서 규정된(곧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별되는) 하나의 정치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갈등적인 과정이라는 것, 따라서 민주주의는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민들의 봉기적 운동인 민주주의의 민주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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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는 50여 년에 걸친 사상의 여정 내내 마르크스(주의)의 저작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비판을 수행해 왔다. 또한 마르크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모색할 때에도 그는 계급 투쟁의 실재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잘 보여 주는 그의 핵심 저작이 『대중들의 공포』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문제 설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의 세 개념 ? 해방, 변혁, 시민다움」은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정치 철학의 개념적 모체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첫 번째 정치의 개념인 해방(emancipation)은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를 갖지 않으며, 피억압자 자신의 해방의 역량을 유일한 기초로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1789년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본다. 반면 두 번째 개념인 변혁(transformation)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정치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푸코의 사상을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모델로 제시한다. 세 번째 정치는 시민다움의 정치로, 이는 정체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세 번째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는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전제할 뿐, 지배 구조의 강화로 인해 그러한 주체의 가능성이 잠식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 주체가 객체적 폭력이나 주체적 폭력으로 인해 잠식되는 상황을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이라 부른다. 시민다움의 정치는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퇴치하거나 감축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정치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을 분석하면서 정치의 세 개념을 가다듬고 확장하는 저작이다. 해방의 정치의 경우, 발리바르는 국민 국가 시민성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貫)국민적(transnational) 시민성의 구체적 가능성을 유럽 시민성에서 찾고 있다. 또한 변혁의 정치와 관련하여 민주주의의 비민주적인 조건을 이루는 국경 및 배제의 구조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제시하며, 아울러 세계화를 통해 확산되는 극단적 폭력에 맞선 시민다움의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세계화 및 유럽 공동체 구성이라는 구체적 정세에 대한 분석 속에서 국민 형태, 시민성, 국경, 주권, 공동체, 폭력 등과 같은 정치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쇄신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의 2010년 저작 『폭력과 시민다움 ? 웰렉 도서관 기념 강좌 및 다른 논문들』의 부분 번역본인 『폭력과 시민다움』은 그의 폭력론을 집약하는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 속에서 폭력(Gewalt) 개념의 전개 과정을 검토하면서, 극단적 폭력의 양상들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문제들을 조회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려는 발리바르 작업 방식의 특징은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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