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장 뜨거운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유고 연방이 해체된 이후 류블랴나는 현재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철학자로 분류된다. 10대 시절 영화광이었고 영어로 쓰인 탐정 소설을 탐독했다. 단편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일찍 포기하고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17세에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류블랴나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구조주의를 다룬 방대한 분량의 석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다. 그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일부를 슬로베니아어로 처음 번역하기도 했다. 대학 교수로서의 자격은 갖췄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할지 모른다는 당국의 의심 때문에 강의 자리를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 가서야 류블랴나 대학 사회 연구소의 연구원이 된다. 지젝 스스로는 그동안 강의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어서 오히려 연구와 저술에만 몰입할 수 있었기에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1981년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사이에 지젝은 동료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여(처음 두 사람이 학회를 결성하고는 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을 맡았다) 슬로베니아에 라캉주의 연구와 분석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에 라캉의 사위이자 프랑스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좌장인 자크 알랭 밀레의 초청을 받아 파리 8대학에 유학하게 되며 1985년 헤겔 철학을 라캉 정신분석학을 통해 읽어 낸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는다(국내에는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하지만 지도 교수였던 밀레와의 불화로 파리 체류를 청산하고 다시 슬로베니아로 돌아와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이어서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의 첫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슬로베니아는 집단 지도 체제로, 네 명을 뽑는 이 대선에서 지젝은 5위에 그치는 바람에 낙선한다). 1989년 영어로 펴낸 첫 저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통해 서구 지식 사회에 이름을 알린 지젝은 이후 수십 권의 단독 저서와 공저를 연이어 펴내며 탈냉전 이후 현재까지 가장 주목할 만한 좌파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3년 가을 첫 방한 이후 여러 차례 방한하여 국내 강연을 가진 바 있으며 2013년에는 경희대학교의 ‘에미넌트 스칼러(Eminent Scholar)’로 초빙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지젝의 사유에는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 대해서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가해진다. 하지만 라캉을 따라서 ‘메타언어’는 없다고 주장하며 고상한 담론과 범속한 담론의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지젝은 그러한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의 농담들만 따로 편집되어 『지젝의 농담』이라는 단행본이 나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헤겔 독법에 유보할 지점이 많다는 헤겔 전문가들의 지적에 대해서도, 헤겔의 대한 새로운 독해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응수한다(아마도 지젝의 철학적 인정 욕망은 ‘우리 시대의 헤겔’로 평가되는 것이리라). 철학사란 오해의 역사, 심지어 비역질의 역사라고까지 보는 것이 지젝의 철학사 이해인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오해인가 아닌가를 넘어선다고 해야 할까. 지젝의 헤겔 독해는 그의 ‘매그넘 오퍼스(최고 걸작)’라고 할 『레스 댄 낫싱(Less than Nothing)』에 집약되어 있다. 번역본은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라는 두 권의 책으로 분권되어 나왔다. 철학자로서의 기여가 아니더라도 지젝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지난 20여 년간 현 세계의 다양한 정치 경제적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내놓고 있다. 게다가 철학사에서 유례가 드문 대중성까지 확보하여 ‘MTV 철학자’나 ‘문화 이론의 엘비스’라는 별칭까지 얻은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인기와 무관하게 지젝은 대단히 진지한 철학적 문제의식과 정치적 과제를 제안하고 있는 철학자다. 개괄적인 지젝 입문서인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쓴 토니 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의 사상은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갈무리된다. 첫째, 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둘째, 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셋째,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넷째,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섯째, 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가운데 ‘주체’라는 주제를 예로 들자면,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과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주체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공백을 가리킨다. 이 공백은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주체의 호명은 개인을 사회의 상징적 질서에 편입시키는 과정이기에 주체화에 상응한다(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 간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 주체 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물론 그의 주체 철학은 포스트모던의 탈주체 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지젝 읽기의 첫 단계에서 참고할 수 있는 책은 지젝의 인터뷰와 강연들이다. 그의 본격적인 저작을 읽어 나가기 전에 대략적인 개요와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잖은 책이 나와 있는데, 인디고연구소에서 펴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좋은 출발점이다. 인터뷰 내용을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지젝의 저작을 바로 읽어 나가도 큰 장애가 없을 것이다. 다큐 영화 「지젝!」(2005)의 감독이기도 한 아스트라 테일러가 엮은 인터뷰집 『불온한 산책자』에도 ‘생태’를 주제로 한 지젝의 인터뷰가 실려 있고, 제이슨 바커가 엮은 『맑스 재장전』에도 코뮤니즘(공산주의)을 주제로 한 지젝의 인터뷰가 포함돼 있다.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좌파 철학자로서 알랭 바디우와 나눈 대담을 같이 수록한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는 지젝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바디우 입문서도 겸한다. 제목 그대로 ‘현재의 철학’ 입문서로도 읽을 수 있다. 인터뷰들을 통해서 지젝의 사고와 어법에 조금 친숙해졌다면 그의 강연들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 지젝의 방한 강연문을 엮은 『임박한 파국』과 경희대학교 특강을 옮긴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좋은 자료다. 『임박한 파국』과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책으로 『멈춰라, 생각하라』도 지젝 읽기의 첫 단계로 읽어 봄 직하다. 이 책까지 손에 든다면 걸음은 이미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 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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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의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골라야겠다. 헤겔과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한 얼마간의 사전 이해를 필요로 하지만, 독서 과정에서 그러한 사전 이해가 상당 부분 교정되기도 할 것이다. 이론적·철학적 저작의 독서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 역시 명석한 분별력과 함께 인내력도 필요로 한다. 길게는 한두 달 동안 독파해 나갈 수 있는 독서력을 갖추게 된다면 ‘지젝의 모든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는 자신감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 『레스 댄 낫싱』을 펴내기 이전에 지젝 스스로가 꼽은 주저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이었다. 『레스 댄 낫싱』까지 포함시키면 철학자 지젝과의 대결은 이 다섯 권과의 대결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그 첫 관문이다. 묵직한 철학서를 제쳐 놓더라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지젝은 많다. 개념을 통한 자기 시대의 이해가 다름 아닌 철학이라고 하면, 탈냉전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우리 시대의 좌표계를 읽어 주는 분석가이자 감식자로서 지젝의 역할은 온전히 철학자의 그것이기도 하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부터,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로 이어지는 책들이 동시대 현실에 대한 진단과 분석, 그리고 철학적 해명을 담고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와 『멈춰라, 생각하라』도 그에 이어지는 책이면서 덧붙여질 수 있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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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읽기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레스 댄 낫싱』, 즉 『헤겔 레스트랑』과 『라캉 카페』를 비켜 갈 수 없다. 현재로선 지젝 읽기의 ‘막장’이다. 이 두꺼운 대표작을 읽는 건 아무래도 반년 혹은 1년간의 열의와 인내가 필요할 듯싶다. 저명한 사망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태도를 1단계 부정과 고립, 2단계 분노, 3단계 타협, 4단계 우울, 5단계 순응으로 나눴는데, 이런 반응은 지젝의 이 대작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부정. “무슨 얼어 죽을 지젝? 안 그래도 읽을 건 많아. 아니, 인생을 독서로 낭비한다는 게 될 말이야?” 이어서 분노. “무슨 책이 1,750쪽이나 되냐고. 내가 어지간하면 그래도 읽어 주려고 했어. 아니, 이게 무슨 대하 철학이야 뭐야!” 그다음은 타협. “그래, 주변에서 하도 지젝지젝거리니, 내가 읽어는 준다. 대신 서문만 읽는다. 그 정도면 대충 파악은 되는 거 아냐? 사실 이런 책 완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런 다음 우울. “흠, 이게 생각보다는 재미있는데……. 내가 철학책을 다 읽을 수 있다니. 벼락이라도 맞은 건가?” 마침내는 체념과 수용. “하긴 뭐, 휴가라고 여행 갈 팔자도 아니었어. 올여름엔 지젝을 읽는 게 운명인가 보다.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게 원래 내 스타일이야.” 여기가 지젝 읽기의 ‘막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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