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하루키 소설이 우울한 까닭은 그의 무의식이 아직 장례식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문학, 나아가 세계 문학을 논할 때 비판이든 긍정이든 하루키는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문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40년 이상 그의 책을 읽어오면서, 이해하지 못한 채 어설피 읽는 시기가 있었고, 그의 태도에 반대하며 욕하던 시기도 있었고, 엇지르며 애돌아 그를 이해하는 시기도 있었다.
이 책은 하루키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를 하루키의 역사 의식에서 살핀다는 점에서 기존의 하루키 비평과 차별된다. 흔히 하루키 소설에는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자 김응교는 오히려 하루키 문학의 동력을 그의 역사 의식에서 논한다.
하루키 소설을 보면, 그가 아버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부끄러움을 낱낱이 찾아 기록하는 위험한 시도를 한다. 하루키의 무의식에는 아버지 세대인 일본의 국가 권력이 저지른 죄악이 있다. 하루키가 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권력과 폭력을 기록하는 까닭은 일상과 무의식에서 고통 받으며 잊지 않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삭제의 죄악’에 맞선 ‘기억의 복원’을 시도한 작가이다. 하루키 소설이 우울한 까닭은 그의 무의식이 아직 장례식을 치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섹스를 하고 와인을 마셔도, 세상은 아직 슬픔이 해결되지 않은 ‘상중(喪中)’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역사가 없다?
이 책은 본격적인 소설 분석에 앞서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는 하루키의 역사관 생성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중국 난징 학살 사건과 관계있는 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루키는 평생 그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로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부조리한 문제와 격투하는 서사가 배경으로 나온다.
일본 군국주의의 극우 숙주를 추적하여 폭파시키는 《양을 쫓는 모험》(1982), 고도 소비 사회의 국제 지하 섹스 산업을 드러내고 관계자들을 모두 죽이는 《댄스 댄스 댄스》(1988), 부동산 투기와 주식 조작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을 비판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1997)와 그 가해자인 옴 진리교 관계자를 인터뷰한 《약속된 장소에서》(1998), 전쟁 세대인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 ‘조니 워커’를 살해하는 《해변의 카프카》(2002), 교주가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가족을 파괴하는 신흥종교 ‘선구’를 응징하는 《1Q84》(2012), 난징 학살을 폭로한 《기사단장 죽이기》(2017) 등을 통해 하루키는 일본의 폭력과 부패를 고발한다. 이렇게 그의 소설에는 외롭게 투쟁하는 이야기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 ‘역사적 트라우마에 저항하는 단독자’라는 부제를 붙였다.
다만 소설에서는 그 고발이 지나친 성 묘사와 허허로운 판타지와 괴이쩍은 가해자의 시각에서의 폭로였기에, 그 아픔을 드러내는 진정성이나 치유를 향한 고통의 연대가 간절하거나 시큰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루키에게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에서는 피해자의 고통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인터뷰나 에세이에서는 단도직입적인 의사 표현으로 자신의 역사관을 선명히 드러내곤 한다.
2014년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는 “1945년 종전(패전)에 대해서도,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에 대해서도 일본은 아무도 진심으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으며, 《기사단장 죽이기》에선 1937년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해 일본인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을 소설에 써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10만 명이든 40만 명이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해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표현하여 일본의 극우들은 하루키 불매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불신은 하루키에게 점점 커져, ‘시스템 악’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하루키가 말하는 ‘시스템 악’이라는 표현에는 일본의 군부, 부패한 자본주의, 사이비 종교 단체의 트러스트가 들어 있다. “자기 나라에 좋은 역사만을 젊은 세대에 전하려는 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루키 소설은 쓰레기인가, 마약인가, 비타민인가, 콜라인가
신간을 발표할 때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 주목받는 하루키지만, 그의 소설에 대한 평은 실로 다양하다. 1980년대 한국인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잠깐 시원하려 마시는 콜라처럼 읽었다. 또는 마약처럼 현실 도피용으로 읽는 경우도 많았다. 그 시기 중요한 평론가 중 한 명은 ‘쓰레기’라는 말까지 했다. 하루키를 처음 접했을 당시 20대였던 저자 역시 하루키 소설을 권태롭게 읽었다.
자칫 부정적으로 치부되는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되고는 한다. 도대체 하루키 소설의 문학적인 힘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 김응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선생이 되고 난 후에야 하루키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루키 문학의 핵심이 ‘치유’에 있다는 것을 점차 이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하루키 소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87년 《노르웨이의 숲》이 세계인에게 크게 읽히면서 ‘하루키 문학’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정착됐고, 이는 하루키처럼 마라톤을 즐기고 와인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하루키스트’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김응교의 하루키 소설 비평은 자칫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하루키 현상의 노예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하며, 하루키 소설이 어떤 의미에서 ‘치유’를 보여주는지, 또 이것이 좋은 의미의 ‘힐링’을 가능하게 하는지, ‘힐링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지 그 실체를 파고든다.
하루키는 가해자의 폭력에 참여했다가 상처받은 이를 썼다면, 한강은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씁니다. 하루키의 문학이 오에 겐자브로 소설만치 적극적이고 실천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역사적·지구적 문제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키 문학을 몰역사적이라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일본 사회가 아시아에 피해를 입힌 역사 문제와 부조리한 자본주의의 문제를 숨기는 삭제의 죄악을 행하고 있는 반면, 하루키는 많은 작품에서 일본의 역사 문제와 일그러진 자본주의 문제를 끈질기게 드러냅니다. ‘삭제의 죄악’에 맞선 ‘기억 투쟁’이라 할 만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2019년 5월 10일 발매된 월간지『분게이슌주(文藝春秋)』6월호에 게재된 에세이「고양이를 버리다-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하는 것들(猫を棄てる-父親について語るときに僕の語ること)」에서, 하루키는 아버지가 제국주의 시절 징병돼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공개한다.
이 에세이는 고양이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고 왔는데, 집에 돌아오자 고양이가 집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버리고 버리려 해도 어느새 집에 돌아온 고양이처럼, 인간이 저지른 과오는 잊으려 잊으려 해도 버릴 수 없다는 비유다. ―1949년 하루키의 탄생, 『고양이를 버리다』(2020)
1938년 군에 징집된 아버지가 목격한, 군도(軍刀)에 사람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잔인한 광경은 어린 하루키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때부터 아버지를 포함한 아버지 세대에 대한 반발이 하루키의 심리에 형성된다. 그의 소설에 왜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은지, 단단히 얽혀있던 실타래가 조금 풀렸다.
하루키가 왜 전쟁이 일어났던 장소를 찾아다니는지도 조금씩 이해되었다. 특히 왜 하루키가 ‘난징 대학살’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1949년 하루키의 탄생, 『고양이를 버리다』(2020)
하루키가 등장시킨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 다자이 오사무는 중성의 글쓰기를 했던 인물들이다. 하루키는 목표를 드러내는 낮의 글쓰기가 아니라, 미로를 헤매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글쓰기로 희망 없는 젊은이들의 무의식을 담아냈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의 리얼리즘’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 시도의 총체가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인데, 이 소설에 대해선 뒤에서 다룰 예정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와 더불어 ‘청춘 3부작’ 혹은 ‘쥐 3부작’으로 불리는 『1973년의 핀볼』(1980), 『양을 쫓는 모험』(1982)에서도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상실한 무엇을 찾아 미로 속을 헤매는 군상을 보여준다. 세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다음 작품에서 다시 등장한다. ―1979년 30세, ‘소설가 하루키’의 탄생,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이 시작되고 두 번째 문단에 “그들은 마치 말라버린 우물에 돌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를 향해서 실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우물’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하루키 소설에서 우물은 중요한 상징이다.
미리 쓰자면, 우물은 현실에 있는 우물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을 상징한다. ‘우물’은 일본어로 井戶(いど)이며 ‘이도’로 읽는다. 하루키 소설을 일본어로 읽으면 우물은 ‘이도’ 곧 ‘ido’, 즉 무의식이다. 일본인들이 우물이라는 한자 井戶를 ‘ido’를 연상하며 ‘이도’라고 읽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id)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하루키 소설에서 연못, 우물, 동굴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다양한 상징이다. 『노르웨이의 숲』과『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우물은 현실의 우물이기도 하고, 인간의 무의식을 상징하기 도 한다. ―1980년 31세, 『1973년 핀볼』
핀볼과 쌍둥이 자매는 주인공이 선택한 무의식의 상대다. 무의식 속에서는 기계 혹은 지상에 없는 쌍둥이 자매와도 대화할 수 있다. 핀볼과 쌍둥이 자매는 갈 길을 상실한, 아버지를 상실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욕망이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잃어버린 상실과 허무가 있다. 그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의 부재를 추적한다. 관계의 부재는 고독을 만들고, 고독을 인식한 현대인은 핀볼이든 쌍둥이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1980년 31세, 『1973년 핀볼』
판타지에서 중요한 존재는 귀 모델 같은 ‘모험의 안내자’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판타지는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이 쓴 아동 소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하루키가 경영한 재즈카페 ‘피터 캣’의 커피 받침대에도 이 판타지에 나오는 체셔고양이 그림을 넣었다고 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땅속 나라도 앨리스의 나라를 보고 구상했다고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주인공의 죽은 여동생 고미치는 앨리스의 열광적인 마니아였던 것으로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주인공을 모험으로 안내하는 토끼가 나온다. 이 토끼는 ‘귀 모델 여자’같은 판타지의 안내자라고 할 수 있겠다. ―1982년 33세, 『양을 쫓는 모험』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라고 부탁하는 쥐는 하루키 자신일 가능성이 크다. 하루키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부탁하는 당부라고 할까. 하루키 자신 외에는 이 글을 쓸 사람이 없다는 고백으로 보인다. “언젠가 훗날에 설명할 때가 올 거야.”란 바로 40여 년이 지나 하루키가 아버지 콤플렉스를 말한 때가 아닐까. 하루키는 2020년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이유, 난징에서 중국인을 죽인 일본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원죄를 설명한다. ―1982년 33세, 『양을 쫓는 모험』
일본 사회를 일억총단결(一億總團結) 사회라고 한다. 집단심리가 강하여 천황의 뜻이라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던 역사가 있다. 너무도 착한 동네 아저씨가 총을 들고 나가, “반자이(バンザイ, 만세)!”를 외치며 헛된 죽음으로 향했다. 양처럼 순한 동네 아저씨에게 폭력의 숙주가 들어가면,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고 칼로 사람을 베고, 강간하고 끔찍한 악을 저질렀다. 하루키는 거기까지 쓰지는 않는다. 다만 양의 가죽을 쓴 악이 퍼지는 과정만을 추적한다. ―1982년 33세, 『양을 쫓는 모험』
양을 죽이기 위해 쥐는 죽음을 선택한다. 쥐의 죽음은 개인을 배제한 거대 담론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일까. 일본이 저지른 비극의 역사와 개인의 삶이 전혀 관계없다고 외면할 수 없는 관계를 드러낸 설정으로 보인다.
‘나’의 관점으로 보면 『양을 쫓는 모험』은 과거를 쫓는 체험을 통해 그 시기로부터 마비된 자신의 감각, 주체성을 일깨우는 사건이다. 양을 죽여, 일본을 근본부터 지배하고 있는 권력 시스템의 운명을 정지시키고 싶은 무의식이 하루키의 작가 의식이다.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나’는 『양을 쫓는 모험』을 통해 과거에 다가간다. 겉으로 읽으면 이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판타지다. 반대로 속으로 읽으면, 이 소설은 일종의 역사 판타지다. 일본이 저지른 비극을 일으킨 악성(惡性)을 쫓아 추적하는 심리 스릴러다. 이 소설은 일종의 반(反)파시즘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1982년 33세, 『양을 쫓는 모험』
하루키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양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번져가는 폭력적 우익 사상을 경고한다. 양으로 상징되는 악이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옮아가며 확산해가는 구조를 보여준다. 결국 하루키는 쥐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대장정을 통해, 과거로부터 자신을 억눌러 왔던 ‘관념’을 죽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을 표명한다.
안타깝게도 그 강력한 담론, 즉 양을 상상 속에서는 폭파시켜 죽이지만, 현실에서 ‘시스템 악’을 없앨 수 없는 ‘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마지막 문단은 많이 슬프다. ―1982년 33세, 『양을 쫓는 모험』
2016년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시상식장에서, 밥 딜런과 젊은 시절부터 함께 노래해온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외톨이 인간의 삶, 그 의미를 최대로 고양시킨다. 이 노래의 첫 구절은 하루키 문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어디에 있었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익숙한 질문이 아닌가. 이 질문은 2년 후 1987년에 출판되는 장편 소설『노르웨이의 숲』에 다시 나온다. 이 소설에서 미도리는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온갖 절망을 겪고 도쿄로 돌아온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미도리는 질문한다.
“너, 지금 어디야?”
이 질문은 인간이 모든 순간에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성경에서 이 질문은 절대자가 인간에게 물은 최초의 질문이기도 하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9절)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고 인간이 숨자, 절대자가 인간에게 물은 최초의 질문이다. 인간은 늘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물어야 한다. ―1985년 36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현실 세계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내’가 소멸할지라도, ‘나’는 어딘가의 인식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그곳 ‘세계의 끝’은 불사의 세계이기에 영원히 존재한다.
이러한 설정은 니체의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 Wiederkehren)’또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를 생각하게 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 후기 사상의 핵심이다. ―1985년 36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미도리는 낙타처럼 굴종하지 않고, 사자처럼 불평하며 으르렁대지 않는다. 미도리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혼자서도 즐겁게 논다.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나오코는 트라우마에 무릎을 꿇은 낙타의 유형일 수 있다. 6시면 정확히 일어나 10년 동안이나 매일 아침 체조를 하는 규칙적인 ‘돌격대’도 낙타형 인간이 아닐까. 타의에 의해 길들여진 대로 살아가는 ‘돌격대’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곤 한다. 반면 미도리야말로 위버멘쉬(Ü·bermensch)에 가깝다. 가출을 두 번이나 했던 미도리는 어떤 강요나 속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1987년 38세, 『노르웨이의 숲』
하루키는 달리기를 할 때 어떠한 생각도, 어떠한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 상태로 달린다고 한다. 의미가 없는 ‘공백’이 그에게는 쉼의 공간이며, 다음 활동을 위한 창조의 공간이다.
셋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루키 문학의 미학이기도 하다. 그는 의미에 의존하지 않으려 애쓰는 작가다. 하루키는 어떤 의미로 독자를 계몽하려는 작가가 아니다. 문학 작품에는 어떤 의미, 곧 민족정신이나 항일 정신이나 반독재라든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한국적 윤리주의 문학관과는 차이가 있다. 하루키의 최대 키워드인 ‘상실(喪失)’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의미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작가가 의미를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자가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기를 바라는 방식이다. 아니, 자기 소설을 읽고‘ 의미’가 아니라 ‘재미’로 즐겨도 좋다고 생각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De Kafka à Kafka)』(1981)에서 카프카 문학은 낮의 문학이 아니라 저녁의 문학, 애매모호한 중성(中性)의 문학이라고 평가했다. 밝은 대낮도 아니고, 어두운 밤도 아닌, 무엇인가 정확하지 않은 황혼 같은 분위기는 하루키 문학에도 통한다. 카프카나 하루키 작품은 겉으로 읽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듯 보인다. 두 작가의 작품을 한 번 더 읽고 더 생각하면,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1988년 39세, 『댄스 댄스 댄스』
평화로운 시기에 행복하게 태어난 ‘단카이 세대’의 젊은이들은 전쟁의 아픔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부흥하는 일본을 향한 노력과 그 틈새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 혹은 번영하는 도시에서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었다.
1951년생 주인공 ‘나’는 단카이 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났다. 단카이, ‘덩어리’라는 말처럼, 이들은 서로 똘똘 뭉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단카이 세대는 1990년대에 4, 50대로 향하면서 관리직의 중추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후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을 유지하며, 단카이 세대를 안전하게 구축했다. 게다가 이들은 전공투 시절을 경험했는데도, 자기 세대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 부패를 눈감아주는 현상까지 있었다. 번영하는 일본 사회에서 부패를 눈감아주는 역할은 단카이 세대가 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단카이 세대가 은퇴해야 일본이 살아난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한국에서 386세대가 나이든 586세대를 비판하는 것과 비슷하다.
1951년생인 ‘나’는 또한 1950년부터 1964년 사이에 태어난 ‘시라케(しらけ) 세대’의 특성도 갖고 있다. 시라케 세대는 ‘(흥미나 관심이) 사라지다’, ‘퇴색하다’라는 의미의 ‘시라케루(しらける)’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 세대는 전쟁의 패배나 시대의 번영에도 관심이 없고, 민족이니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사라진(しらける) 세대다. 단카이 세대와 버블 세대의 중간에 있는 이 세대를 포스트 단카이 세대로 부르기도 한다.
주인공 ‘나’는 단카이 세대와 시라케 세대의 특징 모두를 보여준다. ―1992년 43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이 소설에서도 하루키는 전후 일본의 모순을 조망한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던 일본의 자본가들은 이제는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속여 돈의 제국을 만들었다.
하루키의 ‘번영하는 일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일본의 극우 파시즘의 숙주를 추적하고, 그것이 어떻게 언론과 정치와 자본과 연계해 있는지 드러낸다. 1988년 『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나’의 친구인 영화배우 고탄다를 통해 일본 고도 소비 사회의 ‘국제 지하 고급 섹스 산업’을 드러내고, 소설 속에서 관계자들을 모두 사망시킨다. 1992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낸 뒤, 1997년 하루키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를 출판한다.
1949년에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카이 세대와 시라케 세대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가 쓴 『양을 쫓는 모험』은 단독자 의식이 없는 단카이 세대에 대한 경고이고, 절망하는 군상들이 나오는 『노르웨이의 숲』은 방황하는 시라케 세대에게 주는 위로일 것이다. ―1992년 43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 19,800원 펀딩
-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 도서 1부
- 후원자 명단 엽서 삽지
- 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