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43년 배우 문정복의 소개로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되었다. '청춘극장'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한 후, 극단 아랑과 극예술협의회 등에서 연기력을 쌓았다.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마음의 고향', '밤의 태양'에 출연하며 영화계의 신예로 떠올랐다다. 피난지에서의 연극 '야화'와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계기로 신상옥 감독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영화에 미친 야생마" 신상옥 감독의 동지로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았으며 5,60년대 대표적인 은막의 화려한 스타로 부상하게 되었다.
'꿈', '지옥화', '동심초', '로맨스 빠빠', '이 생명 다하도록', '백사 부인',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열녀문', '로맨스 그레이',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 '다정불심', '이조 여인 잔혹사' 등이 대표작이며 그 외에 100여 편의 작품을 신상옥 삼독과 함께 했다. 다른 감독의 작품 '맹진사댁 경사', '가거라 슬픔이여', '다정도 병이런가', '자유결혼', '촌색시', '돈', '저 눈밭에 사슴이' 등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제1회 국산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상록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아세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는 우리나라 세 번째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 '총각선생' 등 세 작품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했던 '민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한 북한에서도 영화 '약속'을 연출했다. 1967년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며 후진 양성에도 열정을 쏟는다. 1978년 학교 문제로 홍콩을 방문하던 중 납치되어 9년간이나 북한에 억류된다. 납북된 지 5년 만에 신상옥 감독과 재회해 북한에서 영화를 찍었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로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한 후 10년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2001년 국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하여 그해 헤밍웨이 원작의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제작 및 출연했으며, 2002년 뮤지컬 '크레이지 포 유'를 기획 제작했다. 2006년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