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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30대 여성 1위, 40대 여성 1위
게으른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고 성장해야만 우리 존재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이 사회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느끼지만 정확하게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이 책에 실린 글을 따라 읽어나가다보면, 내 안의 불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것만 같다. 끊임없이 접속되어 있고,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다니며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책은 멈추고 세상을 찬찬히 감각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행위인지 일깨워준다. 오래 머물기. 가만히 응시하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효율을 숭배하는 이 사회를 사는 당신과 나에게 이 책이 삶에 여백을 둘 용기와 결단을 선사해주기를.
이 책에 관해 이미 긴 해설을 썼지만 그래도 모자란 느낌이다. 나는 올해를 <루의 실패>가 세상에 나온 해로도 기억할 것 같다. 그만큼 걸작인 만화다. 직접 드라마 각본을 쓰다보니 강산 작가의 역량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가 캐릭터를 만드는 기술, 상호작용하게 하는 솜씨, 뻔하지 않은데 죄다 믿어지는 대사들, 갈등을 꺼내놓고는 봉합하거나 봉합하지 않는 선택, 이야기를 작가의 작은 마음 안에 가두지 않는 자유로움 같은 것을 말이다. 나는 실패에 대한 책을 기다려온 것 같다. 성공을 위한 발판 따위 될 수 없는 실패에 관한 책을. 크게 꺾인 채로 살아가본 적 있는 어느 독자가 루와 친구들에게 공명하며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슬퍼지고 좋아진다. 모두가 한 번밖에 생을 살 수 없고 그것은 작가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작가는 동시에 여러 생을 살듯이 이야기를 쓴다. 강산은 그런 작가다.
어떤 이는 단단한 나무라 쉽게 부서지지 않으나 구부릴 줄 모르고, 어떤 이는 얇은 나무라 쉬이 구부려지지만 매서운 회초리라 다른 이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 줄은 모르나 둘 다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단단하든 무르든 나무란 모름지기 모두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듯,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도 저마다의 뿌리를 가지고 뒤엉켜 있는지도 모른다.이 책의 주인공은 단단하고 올곧은 나무이다. 동료를 불편하게 만들지언정 양심을 속이지 않고 내 몸이 피곤할지언정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인공 곁의 올곧던 사람들이 부서지고, 스스로 제 몸을 깎아 얇은 회초리로 모양을 바꾸는 동안에도 주인공은 제 자리에 우뚝 서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이제 그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흔들리기 시작한 주인공의 나무는 균열이 가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그 옛이야기로 흘러간다. 뿌리 깊숙이 새겨 놓은 옛 기억들이, 여전히 주인공에게 곧게 서 있어라 이야기하고 그렇게 끝내, 세계를 지켜 내고야 만다. 그 수많은 뿌리의 이야기들이 몇 번이고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듯, 흔들리는 누군가의 세계도 지켜지길 바라게 되는 이야기다.
친척집에 있던 수동 타자기를 만지작거렸던 유년기의 로망을 못 잊어서 이십대 중반, 이미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하여 원고를 응모하던 시절에, 잠깐 전동 타자기라는 걸 구해다 써본 적 있었다. 전동 타자기는 소음을 흉내냈을 뿐 수동과는 타건감이 다르니 오래지 않아 시들해졌지만.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서 타자기 소리를 구현하는 유틸리티를 만들어 배포하곤 했다. 타자기 소리는 지금 내가 각 잡고 앉아서 글을 쓰고 있거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을 주는 효과적인 도구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고요를 깨뜨리는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가 발아하고 이어진다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전부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불안과 초조의 언어, 주저하는 듯한 백지 위의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진 이 책이 그 시절을 소환했다. 특히 이 책의 고유한 편집 방식은, 타자기를 한 번이라도 써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종이책이라는 물성이 어째서 아직까지 절멸하지 않고서 명맥을 이어가는지를 알게 해주는, 디자인과 텍스트의 멋진 조우였다.
어느 여름,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던 필립은 난데없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해 여름 필립 로커웨이에게 일어난 소설 같은 일은 다름 아닌 그의 잔잔했던 마음속에서 파도처럼 일어난 ‘소설 쓰고 싶음’이라는 욕망이다. 욕망일까? 꿈이라고 불러야 할까? 혹은 충동? 객기? 소설을 쓰기 위해 필립은 일단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걸작 소설 <666, 페스트리카>를 구하기 위해 브루클린의 서점을 돌아다닌다. 그해 여름 필립 로커웨이에게 일어난 소설 같은 일은 또 있는데,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을 품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 것이다. 브루클린에 독립서점이 있었다니? 내 주위에 문학잡지를 만들고 독서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내 이웃의 집에, <666, 페스트리카>가 있었다니! 소설은 이렇듯 지루하고 우울한 일상을 은밀하고 감미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소설을 무척이나, 하루종일 원하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마법이다. 소설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어쩐지) 담담하고 느긋하게 적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소설은 올해 나의 든든함이었다. 이런 생활 좋지, 필립 화이팅이야. 레스토랑 그만둬도 돼. 소설 읽는 일 좋잖아. 그렇게 말해보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금융자본주의에 잠식되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이상 남아 있는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우리가 믿어온 종래의 가치와 의제들이 빛을 잃고 무력해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신자유주의와 금융화의 두 축을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 길을 제안하는 책이다.그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국가와 개인을 비롯한 모두가 빚쟁이로 살아가는 오늘날은 노동자로서의 의식 못지않게 빚쟁이로서의 정체성 또한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활용하며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뜬구름 잡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불분명함과 모호함까지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일이 어쩐지 불안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에게도 이 책이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전형적인 고통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워킹 홀리데이로 간 런던에서 갖가지 갑질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글쓴이는 반기를 들었다가 회사에서 쫓겨나고 만다. 남은 돈은 300만원인데, 당장 내야 할 방값만 150만원. 가만히 누워 숨을 쉬다가 문득 깨닫는다. 숨만 쉬는데도 돈이 나가는구나. 숨이 돈이구나. 그러자 분노가 치밀었다. 인간은 생명이지 돈이 아니니까.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돈을 벌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모험담이다.우연히 서점의 매대에서 이 책을 펼친 뒤로 지난 1년 동안 몇 번이나 읽었다. 감히 따라 할 수도 없을 만큼 급진적인 삶의 방식, 그러니까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말 그대로 ‘0원의 삶’을 보여준다. ‘나의 작은 혁명 이야기’가 부제다. 나는 이제 정치 지도자나 정치체제를 바꾸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는 혁명이라면 솔깃하다. 정치적이고 미래적이고 영적인 책이다.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나는 이 두 줄의 책 소개에 이끌려 <맡겨진 소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이 소설을 잘 표현하는 문장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맡겨진 소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받는 이야기다. 작가는 그런 사랑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아이의 메마른 마음이 어떻게 사랑을 받아들이는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사랑받은 아이가 어떻게 회복하고 성장해가는지를, 자신에게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사랑을 돌려주는지를 보여준다.어른이 된 많은 이들의 내면에는 이 ‘맡겨진 소녀’가 있다. 어른들에게 아무렇게나 대우받고 상처받은, 하지만 이미 어른으로 자라버린 아이들에게 이 책은 말을 건넨다. 어린 시절, 그토록 작고 힘이 없었던 네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건 너의 탓이 아니라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선택받은 자들과 제거당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며 모든 인류 역사의 장에 발자국을 남긴 유대인의 삶을, 소설가인 저자가 예리하고 아름다운 르포로 써낸 책이다. 여태껏 읽은 젊은 작가의 산문 중 이렇게 나를 매료시킨 책은 없는 것 같다. 매편이 아름다우며 매편이 비극적이고 모든 장면에 눈물 겨운 위트가 담겨 있다.
밝고 공부 잘하던 둘째딸이 어느 날 말없이 손목을 보여주었다. 아이의 하얀 손목에는 가로로 그은 상처가 수없이 나 있었다. 그 순간, 엄마의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만에 이 책이 나왔다. 나는 이 책을 발견하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가족 중에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이 없는 집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도 정신적으로 힘겨운 순간을 수없이 겪는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서 회복하지만 또 누군가는 힘든 상황에 의해, 혹은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작가의 마음이 너무 공감되고, 정신질환에 무지했던 내가 부끄러워서다. 한창 커야 할 나이에 병으로 쓰러져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의지박약, 게으름이라는 말로 아이들을 더 힘들게 하고 사지로 몰아세웠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한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의지로 일어나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나?’ 그런데 우리는 그런 무지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왔다. 이제라도 이 책이 힘겨운 정신질환과 싸우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우리 사회의 편협한 인식을 바꿔주어 고마울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사실 우리는 곰인데, 산에서 내려와서 사람인 척 살려다 보니 이렇게 어려운 게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 역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곰들의 왕이 ‘살길’이라고 알려줬던 것처럼, 모든 걸 버리고 돌아갔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진짜 곰들은 어리석지 않기에, 그 습격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고, 그렇게 옛날 옛적의 유명한 사건으로 남은 이야기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 남은 우리가 여기에 있네요. 한때는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마리의 곰이었을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도 별로 부인한 적 없지만, 정세랑은 처음부터 장르소설 작가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한국적이면서도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한 세계를 찾는 작업은 조금 까다롭다. 조선이 워낙 빽빽한 기록으로 채워진 나라이기에,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한 공간을 찾으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탓이다. 작가는 통일신라를 택한 다음, 역사학도의 자세로 남아 있는 기록을 탐색하고 그 나머지는 환상이 아닌 추리로 채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와 상상, 근대적 합리와 고대의 생생한 인간사가 기분 좋은 조화를 이룬다. 시리즈 소설의 진가는 진입 장벽을 한 번만 넘으면 작가가 만든 세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데에 있으므로, 이 소설이 시리즈물이라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수많은 명탐정과 달리,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설자은이요!”를 외칠 수 없는 섬세한 정체성의 틈바구니에서 탐정과 함께 통일신라 금성의 공기를 가만히 호흡하는 것. 그것이 이 책에 담긴 독특한 공기의 묘미다.
언젠가 읽게 되기를 기다려 온 학술서는 이런 종류의 것이다. 첫째, 학술서답게 황당한 이야기 말고 타당성을 따질 수 있는 주장을 담을 것. 둘째, 기존 논의를 요령 있게 종합할 것. 셋째, 새로운 주장을 할 것. 넷째, 방법론적으로 세련될 것. 다섯째, 난삽한 비문을 남발하지 말고 가독성 있는 문장을 구사할 것. 여섯째, 역사성과 당대성을 함께 갖출 것. 일곱째, 비전공자가 읽어도 재미있을 것. 여덟째, 다음 책이 기대될 것. 아홉째, 이상의 요건을 갖추되 한국에 대한 책일 것. 열째, 한국에 대한 책이지만, 한국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할 것. 한 권의 학술서가 이 열 가지 요건을 다 갖추기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와 같은 요건을 거의 갖춘 것으로 느껴지는 책을 한 권 읽는 데 성공했다.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이정의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가 그것이다.
홍은전의 글을 읽을 때면, 굳건하다고 믿었던 논리 체계가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동물>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체계는 편견이라는 벽돌과 고정관념이라는 이음쇠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너진 벽돌 저편에는 이편에서는 결코 알지 못했던(않으려고 했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세계를 촘촘하고 친절하게 기록한 저자 덕분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인다. 탈시설, 동물권, 장애인 운동 등 그간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벽을 쳐두었던 일들이 눈물로, 아우성으로,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대체로 무관심했거나 관성에 기대어 옳고 그름을 따졌던 많은 일들이, 실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절절히 깨닫는다. 싸움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책을 덮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눈을 갖게 된 것 같다. 홍은전은 말한다. “다른 근육과 감각을 쓰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는 동물이다. 그처럼 나도 좋은 동물이 되고 싶다.
우리(여자-짐승-아시아인)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정확하게 가로지르는 말들, 문학이 타자를 대하는 진심을 열렬하게 경험케 하는 말들, 경험과 선험을 이어붙이며 증거들을 채집하는 말들, 고통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한 몸일 수 있는지를 설득하는 말들. 정치성의 연료가 상상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들, 의심할 것과 믿어야 할 것을 선연하게 드러내보이는 말들.이 책을 처음 펼쳐 읽었던, 어느 정오의 내 방이 오래 기억이 난다. 귀퉁이를 접다가, 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다가, 일기를 쓰게 되었고, 일기를 쓰다 말고 시를 쓰게 되었다. 독서경험이 내가 할 일에 대해 고무되는 경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는 요즘, 그 날의 경험이 가까스로 나를 잘 살려는 쪽으로 데려가주었다.이후, 몇 번이고 다시 꺼내어 읽었다. 또 귀퉁이를 접고 또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어느 날은 책의 여백에 덧대고 싶은 나의 문장들을 적어두기도 했다. 시인에게 말을 걸고, 시인에게 대답하고, 시인에게 질문하고, 시인에게 다가가는 동안, 나는 이 책이 한 권 더, 또 한 권 더 탄생되면 좋으련만 싶었다.
고명재의 첫 산문집을 넘기면 겨울 하늘에서 쌀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흩어진 쌀알을 다시 주워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깊고 맑은 시인의 겨울이 궁금했다. 비구니와 손을 잡고 세상을 배워나간 그의 언어를 보면서 나는 몇 장을 넘기지 못한 채 숨죽인 채 있었다. 멸치의 빛깔 속에서 덜 가난한 기분을 느끼는 소년이 있고, 할머니의 백발 속에서 사랑을 헤아리는 시인이 있고, 죽은 개들과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의 슬픔을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무채색으로 덧칠하는, 그 시절의 그 소년의 눈빛을 보고 싶다. 내게는 여전히 겨울은 폭설을 삼킨 눈보라의 밤이 가득한데, 이 시인의 내리는 눈 속은 따스하고, 매우 선명하며,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리는 것이다. 무채색의 햇빛을 가득 꽃처럼 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깍지를 끼기도 하고, 배추를 절이기도 하는, 검버섯을 꽃이라고 보는, 사랑이 가득한 이 시인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국을 떠먹는 엄마를 보고, 슬픔이 아니라 사랑과 시가 문을 열고 나오는, 잊혀진 장면들이 일제히 환해지는. 나는 이 시인의 겨울 속에서 오래도록 눈을 맞고 서 있고 싶다. 눈송이 한 움큼씩, 눈이 시리도록.
최의택은 장애와 차별과 고립의 경험을 인간의 경험으로 차분하고 의연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이 책은 ‘착한 장애인’의 ‘눈물겨운 장애 극복 수기’가 아니다. 작가가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어 교육받기를 포기하고 활동보조 지원이 없기 때문에 집 밖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장애가 가족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며 일상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지원체제가 부재하는 사회의 책임이다. 작가는 SF어워드 대상을 수상하고도 자기 한 명 때문에 시상식 무대에 경사로를 놓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이런 장면들에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배제하는지, 배제와 고립과 차별을 해결하는 물리적 심리적 부담조차 장애당사자에게 부담시키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외면하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차분한 어조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란 무엇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삶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정세랑 작가가 확장해왔던 세계관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이다.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라니, 이전까지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장르임에도 정세랑 작가는 특유의 유려한 필치로 독자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유쾌하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게 만든다. 좋은 소설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알지 못하는 세계를 기꺼이 체험하게 하고 그 속에서 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좋은 소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수작이다.
정보가 많아지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큰 경종을 울려준 책이다. 저자는 우리 뇌에 정보가 많이 들어가면 집중력은 사라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면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인간 두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운전하면서 핸드폰을 보는 것은 우리 뇌가 운전과 핸드폰을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뇌의 집중력에는 손상이 간다고 책은 경고한다. 지난 5년간 성인의 집중력장애 질병이 5배 늘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몰입해서 하라고 조언한다. 그 밖에도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은 만큼 돈을 버는 IT기업들의 산업구조도 고발한다. 스마트폰 스크린에 있는 '무한 스크롤 다운' 기능이 우리의 눈을 스마트폰에서 떼지 못하게 하는 기술임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요즘 샤워할 때 라디오를 끄고, 운전할 때 음악도 안 듣고 운전에만 몰입하려고 한다.
누군가의 삶을 이토록 자세히 읽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그가 단지 나와 동년배라는 이유로, 나와 같은 세상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안이 되었던 적이 있던가. 하물며 그 고민이 머물지 않고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어떻게든 방향을 찾으려 하다는 것에 이렇게 힘이 되었던 적이 있던가. 나는 내 인생을 ‘끝내준다’고 말했던 적이 있던가? 아무래도, 없던 것 같다. 올해 여름, 나는 이슬아 작가의 인생의 찰나를 훔쳐 읽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끝내주는 인생을 곱씹고 있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우리 근대 예술인들은 몇이나 될까. 일반 대중의 교양 수준은 여전히 학교에서 배운 이중섭이나 김환기, 이상이나 박태원 정도의 이름을 되뇌는 형편에 머물러 있다. 김인혜는 오랫동안 그들이 남긴 방대한 양의 작품과 자료를 추적해 거기 묻어 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열정,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예술 감상법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제안해왔다. 특히 이 책에서 그는 근대 문학인과 미술인들의 예술적 열정과 시대에 대한 고뇌, 그리고 따뜻한 우정을 기록했다. 그들의 매력적인 삶을 그려냄으로써 작품 또한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 근대문화사의 소중한 증언록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 요괴 만화의 거장이자, 가장 끔찍했던 태평양전쟁 최전선에서 살아남은 병사였다. 이 책은 시게루 자신의 삶을 어린 날부터 따라가며, 자원이 없는 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집단 광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위안부 목격담도 등장하며, 자국민을 이만큼 잔혹하게 수탈한 나라가 식민지에는 어떠했을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일본과의 역사문제가 첨예한 지금, 눈여겨볼 만한 걸작.
지나는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불 밝힌 필성슈퍼. 그리고 그 안과 밖을 '작은 빛을 따라서' 한 발짝씩 걸어나가는 인물들의 발걸음에 그 누구라도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 발걸음으로부터 그 누구라도 응원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톱니바퀴 돌 듯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느리게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느리게 사는 삶은 어떤 삶인가? 피에르 쌍소는 위스키나 소주를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는 게 아니라 포도주잔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들어 전등불에 비추며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마시는 삶이 그런 삶이란다. 도시에도 때론 마음껏 머물 수 있고 근심에 싸여 혼란스러워도 활기차게 걸을 수 있는 공간, 즉 ‘용도가 결정되지 않은 공간’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우리 모두 조금씩 게으르게 살면 보다 많은 사람이 일할 기회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느림은 성격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다.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권태나 무기력한 나태가 아니라 행복감에 젖어 한껏 하품할 수 있는 느림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권태로운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쌍소의 답은 “모데라토 칸타빌레, 절제를 넘어서 느리고 우아하게!”
당신은 탄소발자국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탄소발자국 즉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이용하기, 쓰레기 분리 배출하기, 일정 시간 동안 소등하기 등을 실천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디지털 탄소발자국이라는 말은 어떤가. 이메일을 보낼 때, SNS에서 ‘좋아요’를 누를 때, 사랑스러운 푸바오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할 때, 무해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행위가 실은 지구를 파괴하는 데 일조했다면 디지털은 흔히 탈물질성이라 여겨져, 물질로 인해 발생하는 오염이나 훼손으로부터 결백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의 하부 구조를 샅샅이 파헤쳐, 디지털은 ‘다른 식으로 물질화’된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위에는 거대 인프라가 따라붙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전력은 석탄에서 나오는 식이다. 데이터를 감당하기 위한 데이터 센터의 운용 또한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센터의 건설 그 자체로 자연을 파괴한다. 이 책은 이러한 디지털의 막대한 생태 영향력을 올바로 인지하게 하고,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이 데이터를 윤리적으로 소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607쪽 분량에 ‘수와 인류의 3000년 과학철학사’라는 부제가 달린 책을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마주했다. 나는 수학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가정(동일성), 그리고 백 프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확실성)이 작동한 탓이다. 이처럼 개인부터 사회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고 습관과 선택의 기원을, 즉 지식의 기초를 저자들은 존재와 생성의 우선권을 둘러싼 인류 지성사 거인들의 오랜 싸움을 통해 논증한다. 후반부에 릴케,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 동일성 공리를 논파하는 부분은 절창이다. ‘수’에서 비롯된 문화와 언어에 내재된 상식이나 규칙의 한계를 어떻게 흔들고 넘어설 수 있는지 문학의 언어로 입증한다. 마지막 장이 ‘윤리적 결론’이다. 오늘날 인간 및 비인간 세계의 많은 영역을 위협하는 수의 제국주의, 끝없는 말과 야망으로부터 어떻게 나와 세상을 수호할까. 인간성 회복과 삶의 유용성 전략을 위한 투혼이 깃든 큰 책이다.
나는 책이 질문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질문을 품고 몇 달, 몇 년, 길게는 일생에 걸쳐 천착한 끝에 한 생각에 도달한다. 그걸 적은 것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운 교수에겐 일찍이 '창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수년 전 ‘에디톨로지’라는 책으로 ‘창조는 편집’이라는 답을 내놓은 그는 이번엔 ‘우리는 언제부터 창조적이었는가?’를 묻는다.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30년간 일한 내게 그의 질문은 뜨거운 관심일 수 밖에 없었으므로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빨려 들어갈 듯 읽었다.어떤 일을 하든 창의성을 요구하는 시대다. 창의성은 어디서 오는가? 어떻게 해야 창의적이 되는가? 그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때 창조가 일어나는지에 관해 방대한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더러 바우하우스에 대한 책으로 알지만 그 이상이다. 인류는 어떻게 창조의 꽃을 피웠는지를 망라한 20세기 문화사라 해도 될 만 하다. 단연 ‘올해의 책’이라 생각한다.
지난 수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의 시대는 방송인 김숙의 ‘가모장 선언’으로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가족 부양의 의무와 일상적 의사 결정의 권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가족 내 구성원의 역학에 구조적 기욺을 만들어냈기에 그의 새로운 대안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이제 세대를 넘어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대등함을 모색하는 새로운 선언이 이 책을 통해 제시됩니다. 천륜에 따른 내리사랑의 보답으로 효도를 의무처럼 행하는 기존의 관계성을 다시 정의하고 평등함을 기초로 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가족 내 구성원 사이의 격의 없음이 그 평등함의 튼튼한 기초가 됨을 보여줍니다. 각자의 자유 의지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저마다 자신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서로가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을 보여준 소설 속 관계는 하루하루가 힘든 우리네 삶에 한줄기 따뜻한 위안을 전해줍니다.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 내 한 몸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이 시대 핵개인이 되어갈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다. 많은 이가 정보의 공유가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정보야말로 민주주의가 직면한 최악의 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정보화 시대에서 우리를 착취하는 것은 억압적인 규율권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 자신이다. 정보의 공유는 개인정보만 투명하게 만들고, 정보공유 알고리즘은 시커먼 블랙박스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정보만 추구한다. 유권자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각각 자신에게 흥미로운 뉴스만 전달받는데, 그 뉴스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때로 개소리에 가까운 정보도 많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공론장은 파편화되어 사람들을 극도로 분열시킨다. 결국 그들은 유권자가 아니라 투표가축으로 전락해 간다. 민주주의는 지루한 협상과 기나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느린 호흡의 제도다. 하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에서 1분도 기다리기 힘들다. 정보의 전파 방식과 소비 패턴은 민주적인 과정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되짚어 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