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6』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단테가 묘사했던 저주받은 자들의 위치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 속으로 점차 쇄도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비록 그 계시란 것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 지옥은 언제나 죽 이곳에 있어 왔다는 뿌리 깊은 신념에 불과하다고 해도. - 쥘리앵 프린츠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
1953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난 로베르토 볼라뇨는 멕시코로 이주하여 청소년기를 보냈다. 1968년 10월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 이후 도시를 뒤흔든 학생 소요와 경찰의 무력 진압 현장을 목격한 볼라뇨는 그해 시를 쓰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배운' 책과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후 '밑바닥사실주의'로 번역되는 아방가르드 문학 운동을 주창한다. 친구인 시인 마리오 산티아고와 함께 결성한 '인프라레알리스모infrarrealismo'는 멕시코 시단의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가난과 위험, 거리의 삶과 일상의 언어에 눈을 돌리자고 주장하는 반항적 문학 운동이었다.
문학 기자와 교사로 일하면서도 시를 읽고 쓰는 데 집중했던 볼라뇨는 1976년 유럽으로 이주,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방랑하다 스페인의 도시 블라네스에 정착한다. 접시닦이, 바텐더, 외판원, 캠핑장 야간 경비원, 청소부, 부두 노동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시를 쓰던 그는 결혼과 아들의 탄생 이후 문학상 상금으로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 문학상에 시와 소설을 출품하기 시작한다.
치명적인 간 질환을 진단받은 1992년, 39세의 볼라뇨는 시집 『미지의 대학의 조각들』의 수상을 시작으로 40세부터 거의 매년 장편소설, 소설집, 시집 등을 출간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장편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1999년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으나 이와 같은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2003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매달린 『2666』은 그의 사후에 발표되어 스페인과 칠레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영어로 번역되어 대부분의 영어권 유력지에서 그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영미권과 유럽의 평론가와 매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찬사를 이끌어냈고, 특히 작가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였음에도 볼라뇨는 언제나 '얻어터지고 성난, 낭만적인 악동'이었으며, 독재 정권에 부역하는 문학의 우상들과 맞서 싸운 싸움꾼, 읽고 쓰기에 미쳐 있던 작가이자 독자였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탄생 70주년, 타계 20주기를 맞아 우리는 그를 다시 기억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한동안 품절되었던 『2666』의 새로운 판본을 북펀드로 선보이고, 아홉 명의 작가에게 '볼라뇨와 나'라는 주제로 2666자의 원고를 요청했다. 볼라뇨 세계로의 진입은 삶을 문학에 담고 문학을 삶에 담는 경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공유할 새로운 독자를 기다리면서.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주최로 진행되는 '2023 소리 채집'이 오는 9월 22일(금)부터 9월 26일(화)까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일대, 학전블루소극장 예술가의 집, 대학로예술극장, 올림픽공원 등에서 펼쳐진다. 9월 22일 기획스테이지에서는 '볼라뇨 20주기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볼라뇨와 나' 원고를 보내온 작가들이 모여 '내가 읽은 볼라뇨, 내가 만난 볼라뇨'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