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영주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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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 Prologue



하늘에 해가 지고 있었다.

짙은 노을이 광야를 붉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지가 불타는 이유는 비단 석양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 사방에 가득한 시체, 시체들.

한바탕 큰 전투가 휩쓸고 지나갔는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한 시체가 지평선까지 닿을 정도였다.

목이 날아간 시체, 다리가 동강이 난 시체, 얼굴 가죽이 벗겨지다만 시체, 말에 깔려 죽은 시체, 화살에 깔려죽은 시체 등등.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죽어있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와는 다르게 모두가 공평했다.

공평하게, 전부 다 시체였다.

썩어가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삶과 죽음이 무감각해지는 시체더미들 속에서, 까마귀들이 푸르륵 날아올랐다. 갑작스런 무언가에 놀란 듯, 홰를 치거나 겅중거리고 뛰며 뒤로 물러났다.

원래는 까마귀가 모여 있던 자리에, 들썩임이 일어났다.

겹겹이 쌓인 시체로 만들어진 작은 둔덕 밑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거운 사슬 갑옷 아래 깔려 움찔거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이 시체더미를 헤집고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 , 어깨.

이윽고는 시체더미가 와르르, 무너지며 뭔가가 불쑥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었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생김새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얼핏 보기엔 굳어버린 핏덩이로 만들어진 괴물과도 같았다.

그게 눈을 뜨자 검붉은 형체에 두 눈의 흰자위만 새하얀 것이, 지옥에서 막 건져온 것처럼 섬뜩해 보였다.

……우으으.”

두 눈을 번쩍 뜬 괴물……아니, 인간 남자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곧 시체들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무릎을 땅에 딛고 머리를 쳐들었다.

부릅뜬 눈에 황혼이 가득했다.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서 인간 남자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서녘이 어두워질 때쯤에야, 샛별을 보고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럴 때마다 속눈썹에 엉겨 붙은 피가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

오래지 않아 돌멩이 같던 검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안광을 번뜩이며 그는 이제야 제정신이 든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하는 소리를 흘리더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손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었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다름 아닌, 발밑에 가득한 시체로 가 닿았다.

그 시체에선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새끼손톱만큼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여멀건 벌레가 썩어가는 살을 뚫고 올라와 밥알처럼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강렬한 시취가 코끝을 찌르기 시작했다.

……!”

남자는 황급히 코를 싸쥐었다.

그리고 구역질을 하며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크악!”

곧 토사물이 그 입에서 왈칵 쏟아져 나왔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국물과 건더기가 썩다 만 살 속으로 줄줄 흘러들어갔다.

그 속에서 구더기가 헤엄을 쳤다.

뜻밖의 양식에 기쁜 듯이 꿈틀대었다.

으아아아아악!”

역겨운 광경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물렁한 시체 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느라 반사적으로 바닥을 디딘 손아귀에 흙 대신 물컹한 살이 붙잡혔다.

부패중인 살덩어리는 뜨뜻미지근했다.

손가락이 그 속으로 푹, 파고들며 구더기가 생살 위로 기어올랐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남자는 진저리를 치며 손을 빼내어 앞섶에다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아예 시체 속에서 헤엄치듯 발버둥을 쳤다. 뭍에 올라온 고기처럼 퍼덕거리다 한참만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섰다. 그러고 나서도 전신에 미친 강렬한 역겨움을 떨쳐내기 위해 한참동안 발작을 했다.

으아아악! 으아! 으아아아아! 으아아!”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지랄발광을 했다.

으아아아아아! 크으으으……!”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 쳐봐도, 주변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처참한 비명소리만이 허공으로 끝없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쏴아아아-…….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가라앉을 무렵에야 남자는 제풀에 지친 듯 난동을 그쳤다. 그리고 얼빠진 표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직시했다. 온 사방이 썩어가는 시체로 가득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내가 지금……꿈을 꾸는 건가?’

남자는 손끝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곧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아니면……미치기라도 했나?’

마치 중풍 걸린 사람처럼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남자는 괴상한 소리로 신음했다.

흐으으……흐으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광경을 보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이건 다 환영이야.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고. 난 지금 내 방에 누워 있는 거야. 아마도 잠을 자고 있겠지. 지나치게 현실적인 악몽을 꾸느라고 제정신이 아닌 거야.’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며 남자는 주먹으로 허벅지를 퍽퍽 때렸다.

이윽고는 온 몸을 마구잡이로 후려치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깨어나! 일어나라고! 이건 다 꿈이야! 빌어먹을 꿈! 그러니까……깨어나! 깨어나! 제발, 제발!”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학대해 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쪽에서 몰려오는 어스름만이 더욱 짙어져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의미 없는 소리를 내지르던 남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콱 싸쥐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기억의 회복은 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어제는 뭘 했는지, 오늘은 뭘 해야 하는지, 그런 당연한 것들을 떠올리는 게 지독히도 어려웠다.

그는 애써 지난 일을 되살리느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 어제는……학교에……, 아니 방학이라서 피씨방에…….”

그의 이름은 문제후.

원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기나긴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하러 단골 피씨방에 몰려갔다.

하려던 게임은 이스타니아.

고전게임 형식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누구나 플레이하기 쉬운데다가, 화려한 그래픽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MMRPG였다.

먼저 시작한 친구들이 있어서, 제후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캐릭터를 설정했다.

예전부터 생산계를 좋아해서 검투사나 권법가를 무시하고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어차피 친구들이 캐릭터를 키워주기로 한 덕분에 자신까지 전사 타입을 고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캐릭터를 다 만들고 나서, 친구들과 게임을 몇 시간인가 하며 놀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틀림없이 파란불인 걸 확인하고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뭔가가 돌진해왔다.

버스였다.

브레이크라도 고장 났는지,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빠앙!

굉음에 가까운 경적소리가 울렸으나 피할 수가 없었다.

버스가 달려오는 걸 뻔히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두 다리가 꼼짝없이 못박혀버렸다.

그런 뒤, 기억이 끊겼다.

설마, 설마……, 난 죽은 건가? 죽어서 지옥에라도 온 건가?’

머리를 붙잡은 채 제후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죽었다기에는 손 안에 잡히는 머리카락,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며 쿵쿵거리는 심장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미 사라져버린 육체라고 생각키는 어려웠다.

덕분에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광경이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잔혹했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막연한 공포가 밀려들 뿐이었다.

그때였다.

아우우우우우------------

늑대 울음과 비슷한 소리가 들려, 제후는 흠칫 놀랐다.

어느새 석양도 사라지고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공기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은 죽음의 바다.

시체만이 끝도 없이 널려 있을 뿐이지 않은가?

제후는 겁에 질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러자 어둠 저편에 뭔가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한 쌍의 노란 불덩이.

안광이다.

짐승의 안광.

다큐멘터리에나 봤던 그런 안광이 여기저기서 번쩍이고 있었다.

그 수가 차츰 늘어나는 것 같아, 제후는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뒤쪽에도 이미 놈들의 패거리가 자리해 있었다.

포위당했다.’

시체를 뜯어먹는데 질린 것일까.

신선한 고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제후는 자신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망칠 수 없도록, 몰이를 당하고 있다.

점점 포위망이 좁혀져 오는 게 느껴졌다.

놈들이 가까워지며, 막 떠오른 달빛에 그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크르르르르…….”

제후의 허리께쯤 되는 크기에, 늑대처럼 생긴 짐승이었다. 하지만 전신의 얼룩무늬 때문에 일견 하이에나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간에 생긴 걸 봐도 그렇고, 무리지어 사냥을 하는 걸 봐도 그렇고, 개과의 짐승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 어떡하지.’

제후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짐승들을 보고 주저했다.

도망을 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싸워야 하나?

제길!’

말이 싸우는 거지, 무슨 수로 한두 마리도 아닌 떼거지랑 싸운단 말인가? 솔직히 한 마리를 상대하기에도 힘들어 보였다. 이렇다 할 무기도 없는데다가 살아있는 생물을 죽여본 적도 없는 탓이다.

제후가 망설이는 새, 짐승 한 마리가 크와아아앙 입을 벌리며 덤벼왔다.

그 광경을 보고 제후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공격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짐승의 입이 세 갈래로 쩍 벌어졌던 것이다.

연금술사 영주

 

지은이 : 천희명

제작일 : 2016.02.26

발행인 : ()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혜원

표지 : 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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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7210-25-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