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검전기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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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검전기(北劍傳記)

1권-1화

 


 

 



왜 하필 검(劍)일까?

세상에 수많은 무기가 있는데 왜 나는 검을 택한 것일까?

그것은 검이 공방일체(攻防一體)의 가장 완벽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기다란 몸체에 두 개의 날.

한쪽의 날은 적을 상하게 하고, 다른 한쪽의 날은 나를 지킨다.

적을 살상함으로써 나를 지킨다.

그것이 바로 검이란 무기의 용도다.

그것이 내가 검이란 무기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1장 

무너진 하늘 아래 홀로 서다




진무원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상하게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에 어린 뿌연 습막 때문이다. 애써 참으려 해도 눈물샘이 고장 났는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무원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오늘까지만 울겠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눈물 따윈 흘리지 않을 거야.’

올해 나이 열세 살, 아직은 어린 소년의 맹세였다.

그때 누군가 커다란 손을 뻗어 진무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항상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던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진무원과 시선을 맞췄다.

“아들아, 이제부턴 너 혼자다.”

“아버지.”

“미안하구나.”

“미안한 건 아는 거야?”

진무원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진무원의 양어깨를 잡았다.

“알고 있지? 이제부턴 네가 북천문(北天門)의 문주다.”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런 진무원의 어깨를 말없이 두들겨 주었다.

손에 잡힌 아들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그의 나이 겨우 열세 살, 아직은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다.

진무원이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그의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았다.

“쳇! 다 망해가는 문파의 문주라니, 무슨 이따위 유산이 있어?”

“미안하다.”

“미안하단 말 하지 마. 아버지한텐 사과 따윈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래, 내가 누군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그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의 이름은 진관호, 북쪽의 벽(北壁)이라는 위대한 별호를 가진 남자였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벽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사내. 그에게 사과라는 단어 따윈 어울리지 않았다.

“원망은 나에게 하려무나. 일이 이 지경이 되게 했으니.”

“됐어. 잘됐지, 뭐. 더 이상 거창한 명분에 얽매일 필요 없으니. 자유롭잖아.”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진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바라봤다.

드넓은 연무장에는 수많은 이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진관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할 시간인가? 이왕이면 화려한 것이 좋겠지?”

담담한 진관호의 말에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연약한 입술이 찢겨져 나가며 선혈이 흘러내렸지만 진무원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진관호만 바라보았다.

‘아버지.’

진무원이 앞장서 밖으로 걸어나가는 진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넓으면서도 강인한 뒷모습이 보인다. 진무원은 그 모습을 각인이라도 하듯이 두 눈에 담았다.

진관호를 따라 나온 진무원의 눈에 연무장 가득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하나같이 두 눈에 정광이 가득한 모습이 그들 모두가 무공을 익힌 무인이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북천문의 무인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마치 태풍 앞의 촛불처럼 위태해 보였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관호에게 꽂혔다.

진관호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무인들이 죄라도 지은 양 분분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몇몇 이는 오히려 노골적인 적개심을 담은 눈으로 진관호를 노려보았다. 그들 중에는 진관호와 진무원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관호가 그들을 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 모인 것 같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현 강호를 이끌어가는 정상급의 무인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서른 중후반의 무인부터 일흔 후반으로 보이는 늙은 승려까지 모두 아홉 명의 무인이 군웅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군웅을 압도하는 기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직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서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도였다. 그들을 바라본 진관호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역시 이 모든 것이 운중천의 작품이었구려. 이 진 모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소.”

“진 문주.”

예순 초반으로 보이는 노문사가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단 하나, 그의 눈에서만큼은 쉴 새 없이 정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속내를 환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앞에 서는 것을 꺼렸다.

“그 유명한 귀제갈(鬼諸葛) 서문세가의 태상장로시구려.”

진관호는 한눈에 노문사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노인의 이름은 서문화. 몰락한 명문 서문세가를 부활시킨 희대의 천재였다. 학식과 통찰력이 극에 달해 천하의 모든 이치가 그 조그만 머릿속에 담겨 있다고 했다.

가주 직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태상장로가 된 후 운중천의 아홉 하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서문화가 운중천의 아홉 하늘과 함께 북천문에 나타났다.

“왜 그러셨소, 진 문주?”

“이 진 모는 우매해서 서문 장로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소.”

“정녕 자신이 한 짓을 부인할 셈이오? 밀야(密夜)를 막아야 할 진 문주께서 오히려 그들과 내통하지 않았소.”

“허허! 이 진 모, 평생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런 내가 밀야와 내통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북천문의 네 기둥이라는 북천사주가 증언을 하였소. 그런데도 발뺌을 하시려는 것이오?”

진관호의 시선이 군웅 뒤쪽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에게 향했다. 군웅에 가려 그 모습이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관호는 그들의 존재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것인가?”

북천사주(北天四柱).

북천문의 네 기둥이라 불린 자들.

한때 진관호의 친구였고, 북천문의 방패이자 창으로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이들. 그들마저 진관호와 북천문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북천문도 중 상당수가 그들을 따라 배신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구나.’

문득 그의 시선이 옆쪽에 조용히 서 있는 진무원에게 향했다.

그의 아들은 누구보다 침착하고 의젓했다. 하지만 진관호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무원의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겨우 열세 살이다. 갑자기 닥쳐온 커다란 불행을 인내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진관호가 진무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비의 온기에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아들의 새까만 눈동자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그런 아들을 뒤로하고 진관호가 서문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서문화를 비롯한 운중천의 아홉 하늘이 움찔했다.

“어차피 당신들이 짜놓은 판,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빠져나갈 곳은 존재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곳은 북천문,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에 모인 무인 중 삼분의 이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반항하겠다는 것이오, 진 문주?”

처음으로 서문화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다지만 이곳은 북천문의 근거지였다. 더군다나 일백 년 동안이나 밀야의 준동을 막아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에 그 어떤 죽음의 함정과 기관진식이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모인 군웅 중 삼분지 이 이상은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진관호라는 남자.

북쪽의 벽이라 불리는 불세출의 무인이 죽을 각오로 달려든다면 그 피해가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북천사주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북천문의 정예 중 상당수는 진관호를 따르고 있었다. 진관호가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모두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 것이다.

그렇기에 서문화와 운중천의 아홉 하늘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더했다. 하지만 정작 진관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북천문을 해산하겠소.”

“정말이오?”

“이제 와서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소.”

의뭉스럽게 바라보는 서문화를 향해 진관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서문화를 비롯한 아홉 하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잠시 묻어두기로 한 수치심이 다시금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진관호는 쉽지 않은 존재였다. 비록 순간이긴 하지만 아홉 하늘 모두 진관호에게 위압감을 느꼈다.

‘북벽,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자로다.’

‘이자가 있는 한 중원을 우리 뜻대로 경영할 수 없을 터. 반드시 없애야 한다.’

아홉 하늘이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런 아홉 하늘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관호가 뒤돌아서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오늘부로 북천문을 해산한다! 전 문도는 이제 북천문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가거라! 이것이 나 진관호가 북천문주로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문주님!”

“크흑!”

진관호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강호의 무인들과 대치하고 있던 북천문 무인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그들의 얼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진관호가 다시 서문화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되었소?”

“…….”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는 모양이군.”

진관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결국 저들이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리라.

우웅!

진관호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주위의 대기가 요동치면서 날카로운 바람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 모습에 서문화를 비롯한 아홉 하늘 역시 내력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합공을 할 요량이다.

운공이 최고점에 달한 그 순간, 진관호가 갑자기 내력을 역류시켰다. 그러자 퍽 하는 소성과 함께 진관호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아버지!”

진무원이 외침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진관호에게 달려갔다. 진무원의 품에 안긴 진관호의 칠공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으음!”

그 모습에 중인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어찌 된 것인지 그들 모두 알 수 있었다. 무리한 내공의 역류로 인해 진관호 내부의 심맥이 모조리 터져 버린 것이다. 모든 심맥이 터진 이상 대라신선이 와도 그를 살릴 수 없었다.

진관호가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서문화 등을 바라보았다.

“이…… 제 되었소?”

그의 처참한 모습에 서문화를 비롯한 군웅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던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진관호의 극단적인 선택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고, 날카롭게 벼려진 군웅들의 기세가 꺾였다. 그 모습에 서문화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진관호를 안고 있는 진무원을 향했다.

‘내친김에 삭초제근(削草制根)을 확실히 해야 했는데.’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그것도 힘들게 되었다. 이 이상 밀어붙이다가는 오히려 군웅들의 반감만 사게 되리라.

“모두 물러간다!”

서문화의 외침에 진무원의 품에 안겨 있던 진관호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심맥이 갈가리 찢기고 터진 그의 얼굴에는 이미 생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고강한 내공 때문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지만 이젠 그마저 한계에 달한 것이다.

“미안하다, 아들.”

“아버지.”

“너는 부디 자유롭게 살아가거라.”

진관호는 웃는 모습 그대로 숨을 거뒀다.

진무원은 그런 아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스스로 심맥을 터뜨려 자결했음에도 아비의 얼굴은 살아 있는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진무원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비의 눈을 감겨주었다.

진무원은 싸늘히 식어가는 진관호의 시신을 품에 안고 뒤돌아섰다. 이제부턴 혼자였다. 무너진 하늘 아래 혼자 서야 했다.

군웅들이 길게 드리워진 진무원의 검은 그림자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비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울리지 않는 진무원의 모습은 그들에게 기이한 전율을 안겨주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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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검전기 (北劍傳記) 1권


지은이 ∥우각

펴낸곳 ∥(주) 데일리 북스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방배중앙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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