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졸, 빙의빨로 천마지존 001화

마졸, 빙의빨로 천마지존(650)

 





마졸, 빙의빨로 천마지존

— 문지기 —

1화. 서장(序章)




“예, 예… 퇴고만 하면 됩니다. 예…….”

떡진머리의 청년은 전화를 받으며 쩔쩔맸다.

간신히 통화를 마친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퇴고는 개뿔…. 이걸 오늘 안에 끝낼 수나 있으려나…….”

새하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청년은 다시 한번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삼류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일류가 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그는 이류작가였다.

초보작가라면 자신의 부족한 필력을 경험부족이라며 위안 삼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몇몇 작품을 출간했다.

즉, 집필 경험이 적다는 핑계는 더 이상 위안거리가 아니다.

“젠장! 포기하지 말자! 그래도 먹고는 살고 있으니까!”

차라리 쫄딱 망했으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일찌감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많지 않지만 읽어주시는 독자들과 많다곤 할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원고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언젠가!’라는 생각에 버티고 버틴 것이 벌써 5,6년이 되었다.

“이번에는…….”

작가에게 마감일이라는 것만큼 큰 자극제는 없다는 듯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맞춤법이 틀리는 것도 모르고…….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가 다시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샌 보람이 있는지, 그의 얼굴은 초췌해졌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다, 다했다! 이메일… 이메일…만 보내면…….”

간신히 신작 1,2권을 첨부한 이메일을 출판사로 보낸 순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원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노트북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289호


“하~아암~! 으으윽! 잘 잤다!”

소년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폈다.

숙면한 덕분에 피로가 풀렸는지 기분마저 좋아졌다.

그때였다.

“289호! 이 새끼야! 깨어났으면 당장 복귀하지 않고, 언제까지 처 자빠져 있을 거야!”

“…….”

거친 말투의 사내는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소년은 눈만 끔뻑였다.

“289호! 부교두의 말이 말 같지 않냐!”

“…….”

소년은 여전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부교두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이를 갈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냐, 이 새끼야! 불복(不服)은 즉결처분이다!”

“왜, 왜 그러세요. 아, 아저씨!”

“아, 아저씨? 289호 네가 죽여 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는구나!”

부교두는 완전히 눈이 뒤집어져서 몽둥이를 쥐었다.

상당히 단단해 보이는 것이 소년의 머리를 내려친다면 무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부교두는 가차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장홍관천(長虹貫穿)! 뭐하는 거야!”

“여, 연 교두님!”

부교두의 몽둥이가 당장이라도 소년의 머리를 후려질 찰나에 멈췄다.

연 교두라는 사내의 외침 때문이었다.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독의각에 온 애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거,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 교두님께서…….”

부교두는 비슷한 연배의 사내를 보며 쩔쩔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부교두(副敎頭)였지만 상대는 교두(敎頭)였다.

게다가 배경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 부교두는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창귀(槍鬼)가 뭐? 창귀놈은 무섭고, 나는 개호구로 보이냐? 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연 교두가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이니, 장홍관천이란 부교두는 움찔하더니 고갤 숙였다.

그제야 연 교두로 언성은 낮췄다.

허나 차가운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알았으면 꺼져. 때가 되면 보낼 테니까.”

“예… 연 교두님.”

결국 장홍관천 부교두는 직속상관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독의각(毒醫閣)에서 쫓겨났다.

연 교두는 인상을 풀더니 소년에게 다가갔다.

“289호, 몸은 좀 어때?”

“2…289호요? 혹시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잠깐!”

소년의 대답에 연 교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소년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너 내가 누구인지 몰라? 네가 누구인지는 알고?”

“…누, 누구신데요?”

“하…! …총교두님께 보고하고 올 테니, 넌 여깄어. 알았어?”

“예? 예…….”

연 교두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소년은 모든 것이 당혹스러웠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긴…도대체 어디야? 나는 분명 내 집에서 잠이든 거 같은데? 289호는 또 뭐야? 무슨 죄수 번호도…어? 어어? 소, 손은 또 왜 이렇게 작아!”

소년 289호는 당황했다.

서른이 지난 지가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런 자신의 손이 흡사 어린아이의 손처럼 너무 작았다.

“…그런데 아까 창귀, 장홍관천이라고 했지? 왜 이렇게 그 말이 귀에 익지?”

소년 289호는 골똘히 고민했다. 그러다 곧 눈이 커졌다.

창귀, 장홍관천이라는 단어가 왜 귀에 익은지를 깨달았다.

“자, 잠깐! 잠마원 창술교두랑 부교두의 별호잖아!”

잠마원(潛魔院).

일명 마교라고 불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의 후진양성소다.

마졸의 자식이든 교주의 혈육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잠마원에 입학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교칙은 개정되어, 이젠 가문당 1명 이상은 입학해야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잠마원의 문을 두들겼다.

잠마원의 상위 졸업자에게는 원하는 무력대에 들어갈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마원에 입학한다고 모두가 졸업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2할만 졸업하고, 나머지는 최하위 계급인 마졸이 된다.

마졸(魔卒)은 마교의 최하급 무사였지만, 실상은 그보다 못한 잡부에 불과했다.

잠마원을 졸업한 2할만이 마인의 자격을 갖게 된다.

허나 마인(魔人)은 진정한 마교의 전사로 인정받았을 뿐 실질적으로는 말석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년 적지 않은 훈련생이 죽어 나가는 무서운 곳이 이곳 잠마원이다.

소년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인공의 부하가 될 캐릭터일 텐데…….”

소년은 이름도 없는 잠마원 289호.

하지만 그는 삼류 아니, 이류작가 문선생이었다.

창귀, 장홍관천은 모두 그의 신작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였다.

그것도 나름 주인공의 심복으로 말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설마 꿈이겠지, 내가 쓴 소설에 내가 들어갔을 리가…….”

짝!

문선생은 자신의 뺨을 소리나게 때렸다.

꿈속이라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아…프잖아! 젠장! 내가 미, 미친 건가?”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문선생이자 잠마원 289호가 혼란스러워할 때, 독의각를 떠난 연 교두는 총교두와 독대하고 있었다.


“망증(忘症)? 그게 뭔가?”

잠마원의 이인자이자 실질적으로 훈련을 총괄하는 총교두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말 그대로 기억을 잃는 병입니다.”

“그런 병도 있는가?”

“치매도 있지 않습니까. 다만 망증은 치매와 달리 외부로부터 큰 충격을 입은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는 병입니다.”

“끄으응…! 이놈들은 대체 애들을 얼마나 쥐잡듯이 잡는 거야!”

연 교두의 말에 총교두는 짜증이 났다.

훈련 낙오자 한둘 죽는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훈련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담당 교두의 책임이며, 그들을 총괄하는 자신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총교두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망증이 치료될 때까지는 따로 관리하심이 어떻습니까?”

“언제까지 말인가? 그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네.”

덮는 것이 상책이었다. 총교두는 순간적으로 살인멸구를 생각했다.

허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또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대로 장홍관천에 맡기면 분명 문제가 터질 겁니다. 차라리…….”

“차라리 뭔가?”

“…취랑(醉狼)에게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놈도 부교두이긴 아니, 부교두 노릇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지금도 술만 처먹고 있는데?”

총교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연 교두는 물러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그렇기에 취랑을 추천한 겁니다. 어차피 289호는 졸업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망증이나 치료한 후 내보내면 됩니다.”

“으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꿍꿍이라니요?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의심 어린 총교두의 눈초리에 연 교두는 손사래를 쳤다.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총교두는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따지지도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음… 알겠네. 그렇게 하게. 괜히 문제가 일어나면 자네 책임이네.”

“물론입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연 교두는 돌아갔다.

홀로 남은 총교두는 홀로 나직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독마(毒魔) 어르신의 막내 제자라는 놈이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 기거온 것부터가 의심스러우니…….”


*  *  *


“하…상황을 정리해보자. 나는 잠마원 289호이며, 외부출신이고… 8살…….”

간신히 진정된 문선생은 289호라는 소년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문선생은 자신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289호는 소년의 번호이자 그의 이름이었다.

잠마원에 입소하게 되면 과거 이름을 잠시 잊는 것이 규칙이었다.

잠마원 내에서는 동등한 조건으로 훈련을 받으라는 의미였으나 이젠 형식적인 규칙이었다.

문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 이름이 없었다.

마교혈통이 아니라 외성에서 공급한 고아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8살이라는 나이 역시 추정일 뿐 실제로 8살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중국어를 배운 적도 없는데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야.”

빙의한 이 육신 덕분인지 중국어를 배운 적도 없음에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언어조차 못했다면 병신 취급당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째 여기서도 고아냐. 하… 내 주제에 가족은 무슨…….”

그는 현실에서도 고아였다.

289호처럼 아예 가족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철이 들기 전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부모님의 생명보험금 덕분에 작가로서 원교료가 많지 않음에도 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 잠마원을 졸업 아니, 이수해야 내 이름을 알 수 있을 텐데…….”

잠마원을 이수해서 마졸 계급을 받게 되면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신과 같은 고아의 경우는 부교두들이 대충 이름을 지어준다.

자신들이 부르기 편하게 말이다.

“기왕이면 이광이나 장진, 왕인이라면 좋겠지만… 하…아무래도 내 구상에도 없던 엑스트라 마졸이겠지.”

가장 흔한 성이 이(李), 장(張), 왕(王)씨였다.

그러다 보니 고아출신들에게 가장 많이 붙이는 성씨이기도 했다.

이광, 장진, 왕인은 외부출신임에도 나름 비중이 생기는 캐릭터다.

자신이 그 셋 중 하나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흔하고 흔한 그리고 존재감 없이 사라진 마졸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젠장, 내가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믿기지 않지만 비루하게 사라지는 것은 더 싫다!”

그는 딱히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고아이니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 친구는 헤어진 지가 오래다.

친구들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이곳이 무림, 그것도 천마신교라는 것에 마음이 살짝 설랬다.

무협작가들은 대게 다들 무협 덕후들이다.

무림을 꿈꾸는 이들이고, 문선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문제라면 소설처럼 대단한 가문의 인물로 환생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엑스트라급 마졸로 빙의했다는 점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래 까짓것 천마지존(天魔至尊)이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아보자!”

정말 자신의 소설로 온 것이 맞다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 이곳에서 살 거라면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다.

마졸로 고생고생하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비루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누가 그런 삶을 살고 싶겠는가.

꼭 천마지존이 아니라고 거물이 되어서 이번 생은 정말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가문도, 이끌어줄 스승도.

“재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재능이 있다면 최소한 마졸에선 벗어날 수 있다.

마졸만 벗어나도 잡부 취급은 받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재능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훈련 중에 기절할 정도라면 재능도… 하…….”

현실을 직시할수록 그의 입에서는 짙은 한숨만 나왔다.

배경, 스승 그리고 재능마저 없다는 것은 그냥 뼈 빠지게 고생만 하다가 비참하게 사라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니, 최소한 지금보다 상황이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기연…을 훔쳐야 해.”

문선생은 이 소설의 연결편을 쓰기 위해서 여러 떡밥을 던져 놨다.

그중에는 주인공이 가질 기연도 있었고, 주조연급 캐릭터가 차지할 기연도 있었다.

그 외에 잠들어 있는 기연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소설은 바로 문선생의 머리에서 나온 설정과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기연이 없다는 건데…….”

기연은 의외로 많았다.

넓고 넓은 중원천하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마신교다.

알려지지 않은 기인은 물론 스스로 자취를 감춘 기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남긴 유물이나 영산인 십만대산 어딘가 자라나고 있는 영초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다 기연이었다.

문제는 당장 십만대산은커녕 천마신교 내외성에 출입하지조차 못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5년은 잠마원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연은 없어도 기회는 있지. 그거라도 챙겨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