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강제로 월드클래스 001화

반강제로 월드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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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강제로 월드클래스

 

 

2035년.

세계 축구계가 슬픔에 잠겼다.

지안루이지 부폰, 파비오 칸나바로, 데니스 베르캄프,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이 다섯 명의 전설들이 연초에 연달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전드 5인방의 영혼은 여전히 실재하고 있었다.

14살짜리 동네 축구 풀백, 박태식의 안에서.

 

* * *

 

대한민국 동해안 최북단, 고성.

서쪽엔 태백산맥을, 북쪽엔 김씨 왕국을, 동쪽에는 태평양를 끼고 자리 잡은 이 천혜의 깡시골에서, 한 소년이 볼을 차고 있었다.

 

“야! 태식아! 달라붙어!”

 

그 소년의 이름은 박태식.

올해로 중학교에 입학한 태식은, 언제나처럼 방과 후 축구를 진행 중이었다.

 

“태식아아! 지훈이 형 막아야 해! 시간 좀 끌어봐!”

 

친구들이 태식을 향해 요청했다.

그러나 태식은 제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지금 태식을 향해 달려드는 윙어는, 2학년 선배들 중 볼 잘 차기로 유명한 김지훈었으니까.

 

‘젠장. 내가 지훈이 형을 어떻게 막아!’

 

안타깝게도, 태식은 축구를 잘하지 못한다.

축구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불려 나온 것도 단지 또래 중에 체격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태식에게 김지훈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도 볼썽사납게 뒹굴 수는 없지.’

 

태식은 용기를 내었다.

알까기를 방지하기 위해 몸을 살짝 틀고, 김지훈에 발에 붙어 있는 볼을 향해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지그음!’

 

기회를 보던 태식이 잽싸게 발을 뻗었다.

하지만 김지훈은 볼을 살짝 띄우는 것으로 가뿐하게 태클을 피해냈다.

 

‘어어, 이게 아닌데.’

 

태식의 얼굴이 멍하다.

그사이, 페널티박스 안까지 치달은 김지훈이 센터백 한 명을 제쳐낸 뒤 멋들어진 감아차기 슈팅으로 골 망을 흔들었다.

 

철렁!

 

출렁이는 골 망.

친구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태식에게 꽂힌다.

형들 앞이라 말은 못 하고 있지만, 아마도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고 있겠지.

태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 씹. 이래서 축구를 하기 싫다니까. 그냥 집에 가서 소설이나 마저 읽고 싶다.’

 

태식은 판타지소설광이다.

오늘 끌려 나오기 전에도 판타지소설을 읽고 있었다.

 

‘요새 스토리 보니까 금방 완결 날 것 같던데. 흐흐, 얼른 읽고 싶다.’

 

태식은 주인공과 함께할 모험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사이, 경기가 다시 재개되었다.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인지, 김지훈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태식의 근처에서 대놓고 콜을 날리기 시작했다.

볼 주면 바로 한 골 만들어보겠다는 제스처였다.

 

‘이거 완전 개무시잖아?’

 

태식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어쩌겠나.

상대는 2학년 선배다.

개겼다가는 학교 뒷산에서 집단으로 처맞는다.

 

‘양아치 새끼들…….’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김지훈이 볼을 잡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드는 김지훈.

태식은 자세를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무조건 뺐는다.’

 

태식이 다짐했다.

 

그 순간.

 

[베컴: 태식이, 안녕?]

[칸나바로: 만나서 반가워!]

[호나우두: ㅎㅇㅎㅇ]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메시지들.

태식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상상치도 못한 일에 뇌가 정지한 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야, 박태식!”

“너 거기서 뭐 해!”

 

성난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를 부름에도, 태식은 반응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메시지가 계속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칸나바로: 어이, 어이, 왜 그러고 있어?]

[호나우두: 많이 놀랐나 본데?]

[부폰: 하긴,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베르캄프: 이해한다, 태식.]

[베컴: 어? 근데 얘 지금 축구하고 있네?]

 

‘와, 씨발. 도대체 이게 뭐지?’

 

태식이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야, 박태식! 너 어디 아파?”

 

누군가 태식에게 다가와 물었다.

태식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인 백원우였다.

주저앉아 있던 태식은 백원우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 갑자기 어지러워서.”

“그러냐……. 뭐, 빈혈 이런 거 아니지?”

“응, 아니야. 괜찮아.”

 

태식은 말을 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제스처였다.

 

“혹시라도 진짜 아프면 말해. 내가 형들한테 잘 말해볼게.”

 

백원우는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집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자.’

 

태식은 엉덩이에 묻은 고무 알갱이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 떠오르고 있다.

 

[베컴: 태식이, 정신 차렸구나?]

[칸나바로: 그나저나 부럽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호나우두: 원래 훌륭한 축구선수는 동네 운동장에서 나오는 법이지.]

[부폰: 동감이야.]

 

“…….”

 

태식은 애써 메시지들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투명하긴 해도 눈에 워낙 선명하게 들어오다 보니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자, 시작한다!”

 

그때, 2학년 선배의 신호를 시작으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현재 스코어는 2 대 0.

사실상 태식의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태식은 남은 시간 동안 적어도 1인분의 몫은 하자고 다짐했다.

 

“자, 지훈아! 받아!”

 

뻐엉!

 

그때, 1학년에게서 볼을 탈취한 2학년 미드필더가 김지훈을 향해 로빙 패스를 건넸다.

 

[칸나바로: 야! 볼 저 녀석 앞쪽에 떨어질 거야! 달려들어서 짤라내!]

 

정말 밑도 끝도 없는 훈수였다.

하지만, 태식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칸나바로라는 사람의 조언이 왠지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옥!

 

‘뭐야? 진짜 바운드됐잖아?’

 

칸나바로의 말대로, 2학년 미드필더가 건넨 패스가 앞 공간에 떨어져 바운드되었다.

그 공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태식이 이 볼을 처리해 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걷어내자!’

 

태식이 디딤 발을 디디며 걷어낼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냥 내가 몰고 가도 되겠는데?’

 

무작정 걷어내는 것보단, 몰고 갔다가 팀원한테 패스를 하는 게 훨씬 좋은 선택 아닐까?

태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트래핑을 시도했다.

 

투웅!

 

볼이 저 앞으로 튕겨져 나간다.

실로 끔찍한 수준의 트래핑이었다.

하지만 태식은 개의치 않았다.

이 동네 축구판에서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넓었으니까.

 

타다다닥!

 

태식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볼을 낚아챘다.

그리고 공간을 향해 무작정 치고 나갔다.

 

“어, 어! 막아!”

“달라붙어!”

 

난데없는 풀백의 오버래핑에 2학년들이 당황했다.

자신의 플레이에 허둥지둥거리는 꼴에, 태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칸나바로: 오~ 허접이라 그냥 걷어내라 한 건데. 잘했다, 태식.]

[베컴: 괜히 우리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었어.]

 

메신저들도 칭찬을 보냈다.

태식은 순간,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축구가 이런 맛으로 하는 거였나?’

 

작은 성공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2학년 중앙미드필더 한 명이 앞을 가로막자, 차올랐던 자신감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이제 어떻게 하지?’

 

공황장애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경험도 실력도 없으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훈수가 들어왔다.

 

[호나우두: 태식아, 쟤 다리 사이 비었다. 그냥 차 넣으면 뚫릴 듯.]

 

‘다리 사이로? 그건 고수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나한텐 그런 실력이 없는데…….’

 

태식은 영 자신이 없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호나우두의 말을 따라 마크맨의 다리 사이로 볼을 툭 밀어 넣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혀 기대치도 않은 플레이에 2학년 미드필더가 무너져 내렸다.

 

‘와, 뭐지!’

 

태식이 신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꼬리가 미친 듯 씰룩거린다.

 

‘미쳤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하니까 다 되잖아!’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2학년 선배가 무너지고 앞에 드넓은 공간이 열렸다.

이때 느낀 희열은, 태식에겐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 맛에 축구하는 거였구나!’

 

판타지소설을 보는 것만큼이나 재밌었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하지!’

 

태식이 속도를 줄였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다다르니 압박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칸나바로: 얌마, 뭘 망설여! 공간 겁나 많구만!]

[베컴: 그래. 멍 때릴 시간에 빨리 좀 치고 나가라.]

[호나우두: 쯧쯧…….]

 

메시지를 보내는 자들의 눈에는 그게 아닌 듯했지만, 축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태식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어…….’

 

사고가 정지하고, 잊었던 긴장감이 스물스물 기어 나온다.

이를 보다 못했는지, 여태 점잖게 있던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베르캄프: 어쩔 수 없지. 그냥 때려라, 태식.]

 

그냥 때려라.

이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 순간, 태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일단 때리자!’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허무하게 뺏기는 것보단 슈팅 한 방 때리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나.

태식은 그리 생각하며 과감하게 슈팅을 때렸다.

딱히 노리는 코스도, 의도한 궤적도 없는 ‘묻지마 슈팅’의 결정판이었지만, 이는 결코 평범한 슈팅이 아니었다.

 

뻐어엉!

 

볼이 임팩트 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굉음하며.

 

철렁!

 

그 이후의 결과까지.

모두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베르캄프: 오오…….]

[칸나바로: 이 새끼 이거…….]

[베컴: 역시 물건이었구만.]

 

이를 지켜보던 자들까지 놀라 버릴 정도로 말이다.

 

* * *

 

벼락같은 슈팅이 골 망을 뒤흔든 순간.

중학교 운동장이 발칵 뒤집혔다.

 

“우오아아아아! 박태시이익!”

 

1학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태식을 향해 달려들었고, 2학년들 역시 ‘와, 저런 능력이 있었어?’, ‘풀백이라 볼 못 차는 줄 알았는데 개쩔잖아?’, ‘저런 슈팅은 고등학교 형들도 못 때리던데…….’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 하하!”

 

순식간에 주인공으로 거듭난 태식.

그는 이 모든 것이 얼떨떨할 뿐이었다.

때리라고 해서 때려낸 볼이 이렇게 득점으로 연결될 줄이야.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번 득점으로 인해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야, 이진혁! 태식이랑 자리 바꿔!”

 

1학년 에이스인 백원우는 윙포워드로 뛰던 친구에게 즉시 태식과 자리를 바꿀 것을 명령했고,

태식에게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2학년 에이스, 김지훈도 태식에게 다가와 멋진 슈팅이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온도차.

태식은 또다시 작은 희열을 느꼈다.

 

“어이, 박태식.”

“네, 지훈이 형.”

“볼 좀 차네? 조만간 3학년 형들하고 볼 한번 차는데 그때 원우랑 같이 나와라.”

“네…….”

 

물론, 그 결과가 마냥 태식이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젠장. 3학년 형들이랑 축구라니. 3학년 형들은 좀 무서운데…….’

 

무섭기로 소문난 3학년 형들과 몸을 부딪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왔다.

하지만 형들의 명령은 지엄한 것.

태식은 이내 체념했다.

이런 광경이, 그의 안에 자리 잡은 이들에겐 우습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칸나바로: ㅋㅋㅋㅋㅋ 겁나 웃기네.]

[베르캄프: 왜, 우리도 어렸을 땐 저랬지 않았나?]

[베컴: 선배들 축구화 닦기는 했어도, 학교 형들한테 저러지는 않았지?]

[부폰: 꼴값들 떠는 거지, 뭐. :)]

[호나우두: 왜? 난 귀여운데.]

 

비웃음이 느껴지는 메시지들.

태식도 이런 광경이 웃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애초에 문화가 이런 걸 어쩌겠나.

모나지 않게 안에 섞여 들어가야지.

 

“후우!”

 

자리로 돌아간 태식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 미처 못 했던 질문을 했다.

 

“근데 대체 누구세요?”

 

대체 정체가 뭐냐는 물음.

그 물음에, 베컴이 답했다.

 

[베컴: 우리? 너한테 축구 알려줄 사람.]

반강제로 월드클래스

반강제로 월드클래스

 

 

지은이 : 벙찐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0-05-01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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