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기록무사 001화

미기록무사(650)

 





미기록무사

— 철암 —

1화. 반백 년 만에 제정신을 찾다.




황량한 평지. 거기에 사내가 하나 앉아 있었다.

나체에 가까운 사내는 왼손에 검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는… 어디지……?”

시작은 혈교의 준동(蠢動)이었다.

천하를 지배하려던 혈교는 강시라는 마물을 제조함으로써 약한 무력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 손길은 세외뿐만 아닌 천마신교에까지 닿았고, 그 선조들의 시신을 탈취해 강시를 만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혈교의 만행에 천하가 분노했고, 명(明)과 정파는 물론 사파와 천마신교까지 천하의 온 세력이 합세해 혈교를 없애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도달한 연합군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경지인 현경에 도달한 혈교주에게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들… 아무도 없습니까……?”

하지만 혈교주가 지닌 현경의 경지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사람들의 목숨으로 쌓은 것이었다.

그의 중심은 몸이 아니라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이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의자가 부서졌고, 마침내 연합군은 혈교주를 토벌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토벌의 결과는 참혹했다.

의자가 부수어지며 현세가 뒤틀렸다.

“주변에 풀도… 나무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잖아…….”

연합군 모두가 빨려 들어갔으며, 남은 것은 그 의자에 검을 마지막으로 박아 넣었던 백무산이란 하급 무사 하나뿐이었다.

“모두… 아무도 없나요……?”

그렇지만 그들의 기억과 내공이 이 사내에게 흘러들어왔다.

몸도 멀쩡하고 내공도 넘쳐났지만 정신 또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죠? 아니… 우리들인가……?”

자신이 살아온 이십 년 남짓한 세월에 비해 훨씬 방대한 기억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오자, 백무산의 정신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점차 희미해졌다.

“나는 왜 여기 있죠?”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백무산은 문득 자신의 검을 보았다.

아버지가 주신 검이었다.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끄으으으으…….”

수십만의 기억들이 날뛰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아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의 기억, 죽기 전의 한탄, 온갖 삶의 모습이 자신의 머리를 휘저었다.

“끄으으으… 나는… 나는…….”

금방이라도 수십만의 기억에 섞여 사라질 것 같은 백무산의 자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을 뜨자 검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힘들게 마련해주신 검이 빛나며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백무산…….”

본인의 이름이지만 기이하게 이질적인 느낌과 익숙함이 동시에 느껴지며 통증이 점점 사라졌다.

“그래. 내 이름은 백무산이야. 그게… 나야…….”

그렇게 자신은 홀로 남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들과 함께 말이다.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한다.

마음을 가졌으면 움직여야 한다.

뿌드드드득!

얼마 만에 움직이는 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직된 근육을 움직이자 고통이 몰려왔고 온몸이 삐그덕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통증이 자신이 백무산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느끼게 해줬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고향으로, 동료들과 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집으로 말이다.


*  *  *


터벅터벅.

맨발로 관도를 걷는 백무산은 이 길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수십만의 사람들 중 적어도 수만 명은 걸었던 길이었다.

하지만 백무산은 이 길은 걸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익숙하면서 어색한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드는 길을 걷던 백무산은 이 근처에 꽤 큰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그그극.

자신에게 남은 물건은 바닥을 긁고 있는 아버지가 주신 검 하나였다.

그것을 넣었던 검집마저 사라졌다.

어디에 검을 넣을 곳도, 묶을 끈도 없이 멍하니 걷다 보니 검이 바닥을 긁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광인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없었지만 백무산의 머릿속은 점차 청명해졌으며 몸은 기운이 넘쳤다.

단지 한 가지를 목적 집중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 하나가 유일한 목적이었다.


*  *  *


경공술도 쓰지 않은 채 한참을 걸어 도착한 마을은 이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니 확실하다고 장담은 못 했지만, 관문까지 생긴 것으로 보면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았다.

“몇 년이나… 지난 것이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질문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중얼거리는 말을 하며 관문으로 향하자 병사들이 창을 들이댔다.

“멈춰라!”

“알겠습니다.”

멈추라는 말을 했으니 멈추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관과 무림이 서로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한다.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이오?”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말에 백무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백무산… 섬서의… 사람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소…….”

백무산이 할 수 있는 설명은 이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병사는 수상하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몸으로 말인가?”

“무슨 몸이란 말이오?”

“자네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군.”

스스로를 돌아보란 말에 백무산은 자신을 보았다.

“아… 이건 문제가 있겠군…….”

몸이 알몸인 상태로 검을 검집에 넣지도 않은 채 돌아다니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산적들에게 약탈이라도 당했나?”

“그건 아니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니는 것이지?”

“그것이… 임무를 끝내고 보니 이렇게 돼 있었소…….”

“도대체 무슨 임무를 했기에 나체(裸體)로 다니는 것인가?”

“혈교와의… 싸움을 끝내… 아니, 끝났나…? 어찌 됐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됐소.”

백무산의 말에 무사가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물었다.

“혈교의 난(亂)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인가?”

혈교의 난(亂). 당시는 혈교대전 혹은 혈교전쟁 이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혈교의 난(亂)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혈교의 난(亂)… 그것이 맞을 것이오.”

백무산의 대답에 경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광인이 틀림없군…….”

갑작스럽게 자신은 미친 사람 취급하자 백무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미 오십 년도 더 전에 끝난 일을 지금 마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어찌 정상적인 사람이겠느냐!”

미친 사람 보듯 말하는 무사의 말에 백무산이 눈을 크게 떴다.

“오… 오십 년도 더 지났단 말이오?”

“그래! 이미 반백 년 지난 일을 말하는 네놈이 정상일 리는 없을 터. 어서 썩 돌아가라!”

창을 들이밀며 말하자 백무산은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잠깐. 그리고 그 검, 너 같은 광인이 들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다!”

확실히 광인이 검을 들고 돌아다니면 위험한 것이 맞다.

그렇기에 무림인들도 자신의 병기는 평소 안전하게 보관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검을 빼앗으려 하는 경비병에게 백무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저었다.

금나수의 묘리를 역으로 이행해 손을 빼자 다른 경비병이 창을 들이댔다.

“사람을 해할 목적인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가 주신 물건이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담긴 물건이라는 말에 경비병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보관해 두었다가 후일 정신이 돌아오면 돌려주겠다.”

나름 설득하는 모습에 백무산은 검을 주며 말했다.

“아… 알겠소… 꼭 보관해주십시오…….”

그렇게 나체(裸體)의 백무산은 집을 돌아가기도 전에 도시의 입구에서 검을 압수당하고 쫓겨나버렸다.

바스락…….

바스락…….

풀을 밟으며 지나가던 백무산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이리도 지났단 말인가?”

오십 년. 일반 사람들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는 말에 백무산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청명했던 정신이 흐려지는 듯했고, 자신의 몸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쿠쿠쿠궁.

단전에서 나와 온몸을 돌아다니는 혼란스러운 기운은 응축된 거대한 내공이었다.

백무산은 혈교의 난(亂) 때 이류 무사에 불과했던 자신이 이 정도의 내공을 가지게 된 것이 기이했다.

이윽고 머릿속에 이런 내공을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에는 혈교주의 것 또한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잡아먹고 내공을 흡수하려 했군…….”

그 의자는 그 계획의 핵심이었다.

그것을 백무산이 부수었으나 핵에 검을 박아 고정된 백무산은 살아남았고, 그 밖의 다른 자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에 고민하는 것보다는 일단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른 것들이 아무리 중요해도 일단 우선 옷부터 입어야겠군…….”

옷을 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산속에서 옷을 구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아니, 방법은 많지 않았다.

“토끼라도 잡아서 가죽으로 가려야 하나…….”

이류에 불과했던 자신이 옷을 구하려면 토끼나 사슴같이 작은 동물을 잡은 후 그 가죽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했으니 실행해야 했다. 백무산은 산 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몸에 내공이 있으나 쓰는 법을 몰랐고, 그저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내공을 가지고 산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그러다 곰을 만났다.

작은 사냥감을 찾다 발견한 곰은 오랫동안 굶주렸는지 백무산을 보자 그르릉 소리를 내며 침을 흘렸다.

그르르르르…….

먹잇감을 발견한 눈이란 것을 안 백무산은 곰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곰… 곰이 이런 도시 옆 산에 있어?”

고작 이류 무인이었던 시절, 그에게 곰은 사냥감이 아니라 도망쳐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곰은 다른 곰보다 족히 두 배는 커 보였다.

일단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백무산이 나뭇가지를 주워 다른 곳에 던졌다.

“흐아압!”

툭.

그르르르르.

하지만 곰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눈앞의 먹잇감인 백무산에게 집중할 뿐이었다.

“이걸… 어쩌지…….”

검도 없는 맨몸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백무산은 움츠러들었고, 곰도 그것을 느낀 듯 빠르게 백무산을 덮쳐왔다.

쿠아아아앙!

거대한 곰이 백무산을 향해 앞발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끄으으으아아아아!”

머릿속을 헤집는 엄청난 통증과 함께 머릿속에 궤적이 보였다.

그리고 백무산의 몸이지만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여졌다.

머리에 떠오르자 몸이 따라왔고, 이내 곰의 앞발을 피해 곰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퍼억!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