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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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장(一章) 법륜(法輪)
“장요, 상세는?”
“문제없소.”
“하하, 아직도 말이 짧군 그래.”
사내의 말에 얼굴을 구기는 노인이다.
장요. 달리 검마(劍魔)라 불리는 그의 이름을 어느 누가 그리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을까.
허나 장요의 눈앞에 선 남자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그저 크지도 않은 자존심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충분히 승복한 남자.
검마 장요에게 이름 대신 주군(主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내다.
천주신마(天主神魔) 유정인.
유정인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세가 좋지 않았다. 문제없다는 장요의 말을 믿기에는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절요(節妖)와 구절(九節)의 얼굴도 여러 번의 격전으로 생긴 내상을 꾹 참고 있는지 창백했다.
“그나마 천독(千毒)의 상태가 제일 낫군.”
유정인은 아직은 어린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돌아봤다.
해천. 남해(南海)의 구룡암(九龍庵)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시작된 깃털처럼 가벼운 인연이다. 그 작은 인연의 뿌리가 여기까지 그를 인도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스러질 목숨들이 아니다. 자신을 따르던 팔요마(八妖魔) 중 절반이 유명을 달리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까.
유정인은 잠시 눈을 감고 상념에 빠졌다. 품 안에 안은 핏덩이.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수십의 목숨이 재가 되었다.
“해천. 자네와는 여기서 갈라지도록 하지.”
유정인은 단호했다. 너무 어리다. 검마와 절요, 구절은 이미 지천명을 넘어선 나이다. 게다가 검마 장요는 고희를 바라보는 노장이다. 잔인하지만 이미 살만큼 살았다.
해천은 이제 약관을 막 넘어선 나이. 이대로 죽기에는 그 생때같은 목숨이 안쓰럽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천주신마는 천독요 해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대로 떠나게.
천주신마의 눈빛이 해천을 다그쳤다.
네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천주신마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남는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얼마나 추악한 끝을 맞이하게 될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다름 아닌 정도무림맹회(正道武林盟會)이기에.
구파일방(舊派一幇)과 중원팔대세가(中原八大勢家)를 위시한 군소 방파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숨통을 조여 오고 있기에.
그렇기에 살리고자 한다.
천독을 다루기에 천독요라 불리고,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마인이지만 천주신마와 나머지 팔요마가 보기엔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싫습니다. 주군께 구명 받은 목숨, 이대로 주군을 위해 산화(散華)된다면 그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신마께서 괜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닐세.”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절요라고 불린 자가 입을 열었다.
절요마수(節妖魔手) 진양은 유정인과 해천을 돌아보았다. 말을 하면서도 억지로 내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입가에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본디 내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극한의 정적임 속에서 행해야 하는 것. 몸에 무리가 갈 줄 알면서도 진양은 입을 열었다. 그 또한 해천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품속에서 주군의 아이가 무사히 도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소주(少主).”
“아!”
해천은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구절편마(九節鞭魔) 사진도의 말에 탄성을 터뜨렸다. 과묵하기 그지없는 사진도가 이런 말을 한다면 십중십(十中十) 확신이 선 경우다.
그렇다. 자신에게는 적들로부터 도주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깨닫자마자 머리가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해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떠날 준비를 했다.
“갑니다. 주시지요.”
유정인은 품속에 안은 아이를 해천에게 건넸다.
자신의 아들. 마인인 자신과는 다르게 평범한 유가의 가문에서 자란 부인에게 얻은 유일한 핏줄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魔人)이라지만, 마인도 사람이다. 제 손 안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법이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음인가.
그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피가 흐르고 나서야 깨달은 생(生)의 도리였다. 유정인은 품 안에 안은 아이를 한 번 바라보고 품에서 한 권의 서책을 해천에게 넘겼다.
“부탁하마.”
“이것은……?”
“적영마공(赤影魔功)이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 아이만큼은 마인으로 살길 원하지 않지만, 그래도 넘겨줘야 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어.”
“알겠… 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해천.
어느새 품안에 적영마공의 서책을 갈무리하고 두 팔에 안은 아이를 결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리를 떠난다.
해천이 떠나가자 네 사람은 입고 있던 피풍의를 찢어 보자기로 만들었다. 교란책이다. 맹회가 얼마나 속아줄지 의문이다. 여우같은 모사들이 많아 들키기에 시간문제라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검마. 절요. 구절.”
신마를 바라보는 세 사람.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이다. 이제 시작이다. 해천이 소주를 안고 이 지독한 그물을 벗어날 수 있도록 몸을 불태워야 한다.
* * *
“쫓아라!”
얼마나 뛰었는가. 몸속에 도도하게 흐르며 피를 갈구하던적영마공(赤影魔功)의 진기가 고갈됐는지 제대로 도인이 되지 않았다.
유정인을 천주신마라는 희대의 마인으로 만들어준 마공이 기근에 말라 버린 나무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도주한 지 이틀. 수백 장 밖을 감지해 내던 기감(氣疳)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럴 시간에.’
이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 한다. 유정인은 구덩이를 파고 누운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도주만 하고 있으면 모두 잡힌다.
해천이 목표가 되지 않게 시선을 끌어야 한다. 아마 다른 삼요마도 같은 생각일 터.
유정인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진기의 흐름을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정도맹(正道盟)!”
유정인의 고함이 산속을 흔들었다. 이제 곧 반응이 오리라. 눈을 감고 조금이라도 진기를 회복하기 위해 힘쓴다.
사락사락.
“천주신마!”
도복을 입은 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소매에 새겨진 흑백의 태극(太極) 문양이 고고하다.
남존무당(南尊巫堂).
도의 성지라는 무당파의 진인(眞人). 이미 몇 번이나 부딪혀 보지 않았는가.
희대의 마공이라는 적영마공도 도사의 도력(道力)에는 미치지 못하는지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쉽지 않겠군. 그렇지 않소, 검선(劍仙)?”
“신마여, 그대의 악행은 온 세상천지가 다 아는 바.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 마땅하다. 허나 그 무위는 마공으로도 올라서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으니 명예를 아는 무인(武人)이라면 자결하게.”
“도사가 자결이라니. 세상이 말세인가 보오. 이 신마는 포기하지 않으리다. 오시오, 무당의 검선이여!”
경천동지. 신마의 적영수가 검선의 송문고검(宋文古劍)에 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일었다.
검선의 검이 태극을 그릴 때마다 유정인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일수일퇴.
천주신마라는 위명도 희대의 마공인 적영마공도 덧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인이 아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수하를 둔 주군으로서 물러설 수 없다.
용맹정진이다.
신마의 손에 핏빛 강기가 어린다.
적영마수(赤影魔手).
불길한 느낌의 강기가 검선의 검을 때렸다.
온몸으로 달려든 일격이다. 마공의 끝이 검선과의 양패구상(兩敗俱傷)이라면 족하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 아니던가.
천주신마의 적영마수에 검선의 검(劍)이 부러질 듯 휘었다.
극의에 이른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무당이 자랑하는 태극의 검예(劍藝)가 신마의 마수를 막아냈다. 신마는 신형을 물리지 않고 일 보 전진했다.
“끝까지!”
검선의 노성이 터지고 검 끝이 빨라졌다.
태극을 그리는 검극.
무당의 전승자만이 익힐 수 있다는 태극혜검이다. 저건 막을 수 없다.
결국 신마는 아끼고 아끼던 진원진기마저 끌어냈다.
생명의 근간이 되는 기운.
후천지기라 불리며 오랜 시간 쌓아갈 수 있는 내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그 기운.
진원진기를 끌어냈다는 것은 곧 마지막을 의미한다.
“태극혜검이라니. 내 마지막에 호사를 누리는군! 지옥에서 봅시다.”
적영천라(赤影天羅).
하늘을 뒤덮는다는 초식의 이름만큼이나 흉험한 기운이 천주신마의 몸에서 일어났다.
불길함의 극치.
초식의 묘리를 살리기 힘들 만큼의 상태로 끌어올린 진원진기. 신마의 몸에서 뻗어나간 강기의 파도가 검선의 검극을 덮쳐갔다.
그물망처럼 검선의 몸을 덮어가는 강기의 파도에 검선의 눈이 흔들린다.
무당 최고의 검공이라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을 믿어야 할 순간이다. 검극으로 그려내는 태극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생겨났다.
강기의 기운이 서린 태극의 문양이 적영의 파도를 막아서며 그물막에 구멍을 뚫어놓는다.
‘우 상방 두 개, 좌 하방 한 개. 못 막는다.’
태극혜검으로도 미처 막지 못한 방향을 몸으로 막자 강기의 파편이 검선의 귀와 어깨를 할퀴고 왼쪽 종아리 살이 터져 나갔다.
십수 년 만에 느껴보는 고통에 정신이 아찔했으나 앞으로 전진한다.
도사(道士)이기 이전에 그 역시 검사(劍士).
검선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가른다.
촤아아악-
막대한 경력이 천주신마의 몸을 향해 쏟아져 들었다. 태극의 검공이 천주신마의 적영마공을 뚫고 몸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복부와 가슴에서 쏟아져 내리는 피. 끝내 무릎을 꿇고 만다.
천주신마! 그 이름이, 그 위명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쿨럭!”
“역시 쉽지 않다. 그대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되었겠지. 대승(大僧) 무허가 쉽지 않은 무인이라고 하더니.”
“과연 땡중의 백보신권은 대단하더이다. 당신의 태극만큼이나 완성된 무공이었지. 적영마공으로 보호하던 내 어깨를 부수고 지나가더군.”
“신마여.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는가?”
“크그큭큭. 검선이여.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이만 죽이시오.”
“걱정을 하는군. 나를 넘어서 어디를 그리 바라보는가. 도주한 요마들을 걱정하는가? 그렇다면 안타깝게 되었군. 자네와 팔요마를 잡기 위해 곤륜(崑崙)을 제외한 구파의 팔존(八尊)이 나섰다. 그대들에게 희망은 없어. 또 산을 내려가면 승냥이 같은 팔대세가가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자네가 계획한 것이 무엇이 되었든 다 부질없을 걸세.”
“허망하구나.”
검선은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생명의 불이 눈에 띄고 꺼져가는 천주신마다. 이대로 두어도 숨을 거두리라.
악인의 경우 목을 베어 맹회의 정문에 효시하는 것이 관례이나, 검선은 천주신마를 그대로 두고 떠났다.
마인일지언정 대인의 풍모를 갖춘 자다. 수하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무인이다. 그런 그에게 효시는 치욕이리라. 적어도 검선 스스로 신마의 목을 베지는 않으리라.
“호정아… 부디 살아라…….”
희대의 마인이라는 천주신마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해천은 지난 이틀간 품에 안은 유호정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뛰어왔다.
주군인 신마와 검마, 절요, 구절이 길을 막았을 터인데, 그 길에 구명이 뚫린 것인지. 구파의 무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품속에 지닌 독들을 뿌려가며 도주했지만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이제 해천에게는 독도,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품 안의 소주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되든 안 되든 해본다. 결심과 함께 해천은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틈에서 일어났다.
“그만.”
작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다.
이에 해천은 반사적으로 품안의 소주를 꽉 끌어안고는 손을 뻗어냈다.
날이 시퍼런 비수 한 자루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일접비(一蝶匕). 독만 잘 다룬다고 해서 팔요마에 들 순 없다. 아니,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면 남해에서 신마를 따라갈 수조차 없었으리라.
어중이떠중이라면 이 일수에 나가떨어지리라. 허나 운이 다했음인가. 승복을 입은 남자는 기력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절정 무인이 날린 비수를 맨손으로 잡아냈다.
“무의미한 짓은 그만하라.”
“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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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품사 新무협 판타지 소설
지은이 : 천품사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17-10-24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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