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능은 특별합니다 0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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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이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먼 옛날의 기억.

몇 번인가 그런 적이 있었다.

포근한 햇살.

천천히, 그리고 자유롭게 하늘을 헤엄치는 구름 몇 조각.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풀 내음.

바람에 실려 와 귓가를 간지럽히던 풀벌레들의 노래.

마지막으로 자글자글하게 주름져 까끌까끌하면서도 부드러웠던 할아버지의 손길까지.

할아버지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쏟아지는 잠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옛이야기를 듣곤 했다.

이제는 그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

우리 일족의 시조이신 아리랑께서 요괴로부터 대륙을 구하셨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매번 똑같은 이야기가 진부하고 질릴 법도 했다만 그분의 일대기는 내게 항상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설화를 들을 때면 그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에 안은 채 꿈에 빠지곤 했다.

그래.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한 소년의.


‘부디 저의 죽음이… 당신을 너무 아프게 하지 않기를.’

‘좋아. 그럼 되찾으러 가보자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말이지.’

‘나는 그분의 검. 나를 넘기 전에는 아무도 감히 그분께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자, 오라.’

‘그거 아십니까? 형님께서 제 곁에 계시는 한, 저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이 대륙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온 세상이 당신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집결했습니다. 이제 최후의 명을 내려주시지요.’

.

.

.

나의 이야기다.


* * *


‘이… ㄴ… 소…… ㅣ….’

“에이… 씁.”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환청에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휘우우우우우우-

성난 바람이 경로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난폭하게 할퀴며 지나갔다.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인근 도시로 안내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 일족은 열넷이나 열다섯 즈음의 나이가 되면 본래 살던 곳을 떠나 광활한 대륙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매서웠던 바람은 멀찍이 떨어진 건물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살갗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살을 에는 칼바람에 동생, 마루와 친구, 테라덴이 더욱 옷을 여몄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여름에 계신 듯 그저 침음을 흘리며 흑발을 적신 식은땀을 연신 닦을 뿐이었다.


“으드드드! 아유, 할아버지! 정말 걱정도 팔자셔! 우리가 어디 가서 몹쓸 일이라도 당할까 봐 그래요? 그럴 일 없으니 이만 걱정 붙들어 매요.”


너무나도 긴장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일까, 덜덜 떨며 연신 이를 부딪치던 테라덴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음, 이 할애비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네게 괴롭힘을 당할지 그게 가장 걱정된다만….”

“에헤이! 할아버지도 거 참.”


뒷덜미를 긁적인 테라덴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말문을 닫았다.

그렇게 매서운 추위 속에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날이 어두웠기에 할아버지는 혹시 모를 경계를 쉽사리 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말에 올라탄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그제야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가까이 다가가 묵례했다.


“위대하신 대륙의 기둥을 뵙습니다.”


‘기둥’이라 불린 자는 이제 막 약관을 넘긴 듯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남성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그가 어딜 가나 모두의 이목을 끌만한 외견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맑은 가을 하늘로 염색한 듯 푸르른 머리칼과 올려 묶은 머리.

나이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새하얀 피부.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그와 어우러진 품위와 품격 때문인지 사내의 분위기는 더욱 신비롭기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존대에 사내는 서둘러 말에서 내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당치도 않습니다. 도리어 저야말로 이번 기회에 이분들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청년이 말에서 내리자 청년의 뒤에 있던 무사 역시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오래전 대륙을 구원하셨던 분의 후예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노인이니 감히 기둥께 그럴 수야 없지요.”


할아버지의 완곡한 거절에 입맛을 다신 사내는 뒤이어 할아버지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나저나 저분들이로군요. 이번 세대는.”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무려 세 분이라니.”


어째서인지 묘하게 기대감을 품은 것 같은 사내의 뒤로 딱딱한 인상의 무사가 다가가 속삭였다.


“기둥이시여. 슬 서두르셔야 합니다.”


무사의 속삭임을 들은 사내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저분들을 데리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사내는 그대로 할아버지를 지나쳐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을 잠시나마 모시게 된 렌 란이라고 합니다.”


렌 란. 그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미증유의 무언가가 우리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와! 아저씨는 머리카락이 파란색이네요? 마루는 완전 신기해요!”


새까맣고 긴 흑발을 양쪽으로 땋아 내린 마루가 란에게 인사 대신 감탄을 던졌다.

마루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똥그랗게 뜨며 란을 응시했다.

마루의 큰 눈과 꽉 쥔 주먹은 무척이나 앙증맞았다.


“존함이 마루 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자님들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란이 그다음으로 나와 테라덴을 돌아봤다.


“와, 일곱 기둥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테라덴은 이름이 뭐냐는 란의 물음에 대답은커녕 얼떨떨하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일곱 기둥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일곱 명을 뜻하는 것으로 그들과 만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데 그들 중 한 명이 직접 우리의 안내역으로 왔으니 테라덴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진정해, 테라덴.”


우선은 테라덴의 흥분을 가라앉힌 뒤, 그를 대신해 나와 그의 이름을 란에게 알렸다.


“얘는 제 친구인 테라덴이고 저는 하루라고 합니다.”

“아리랑 하루라. 좋은 이름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친 뒤, 란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여러분은 계신 이곳은 서왕국의 영토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을 서왕도로 모시겠습니다. 비록 짧은 동행이긴 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눈매로 곡선을 그린 란이 손을 내밀었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 역시 팔을 뻗어 그가 내민 손을 굳게 맞잡았다.


“자, 그럼 출발하실까요?”


란이 자신과 무사가 타고 온 말을 정중하게 가리켰다.

그의 신호에 마루와 테라덴이 차례로 무사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말 위에 올랐다.

멈칫.

말 위로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이곳의 모습을 담아두고자 시선을 돌렸다.


“왜, 뭐 두고 온 거 있어?”


갑자기 멈춰선 나를 보고 의아함을 느낀 것인지 테라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가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뒤, 그들의 뒤를 따라 말 위에 탑승했다.


푸륵, 푸르륵!

한차례 콧김을 뿜어낸 말들이 이내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서서히 발을 내디뎠다.

그간 정들었던 곳을 떠나 마침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다만, 이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