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화
선계(仙界), 백옥루(白玉樓).
흐드러지게 핀 왕벚나무의 꽃잎이 쉴 새 없이 흩날리는 거대한 집채 사이로 한 흑발, 흑안 그리고 더 검게 물들어 있는 도포를 걸친 사내가 비장하게 서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한서준.
이름보다 천마(天魔)라는 별호로 알려진 존재.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겠네.”
한서준은 한시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내고 싶은지 곧장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가 뻗은 팔을 일(一)자로 휘두르자 공간이 시꺼멓게 갈라지더니 눈앞의 백옥루(白玉樓)의 문이 갈라졌다.
백옥루의 내부에는 과연 수많은 선인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한서준의 앞길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 한서준과 싸워 온 만큼 그의 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싸울 필요도, 아니 가치도 없는 나약한 이들의 모습에 한서준의 입가에 피식- 비웃음이 피어났다.
“비켜.”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선인(仙人)들이 뒷걸음질 치며 길이 열렸다.
터벅- 터벅-
훤히 열린 길을 걸어가던 한서준이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고는, 황좌(皇座)에 앉은 옥황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니 진짜 반갑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감정이었다.
정말로 반가움 그 자체였다.
천 년 전 처음 선계에서 등선하여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던 존재인 만큼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서준을 마주한 옥황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정말 고작 천 년 만에 내 앞에 설 줄이야…….]
무서울 정도의 재능이었다.
필멸자(必滅者)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지만 영생을 누려 온 선계의 존재들에게는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근데 눈앞의 천마, 한서준은 고작 그 천 년밖에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선계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았다.
“내가 한다면 하는 남자거든.”
한서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진하게 피어날수록 옥황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고작 한순간의 방심이 이런 사달을 낼 줄이야.’
천마, 한서준.
개개인 혹은 문파의 신념, 협의를 이루며 대립하고 투쟁을 벌이던 정, 사, 마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두 자신의 발아래 둔 최초의 천마.
중원(中原)에서 활동할 때부터 역대급의 활약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선계에서도 이따금씩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필멸자에 불과한 존재였던 만큼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것이 옥황 최대의 오판이었다.
‘설마 수련을 멈추지 않고, 등선까지 해낼 줄이야.’
그것도 고작 1년.
대부분 평생 도달하지 못하거나, 아무리 빨라도 수십 년에서 늦으면 수백 년까지 수련을 쌓고서야 도달할 수 있다는 경지인 신화경에 고작 1년 만에 도달해 내며 선계에까지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후 한서준의 행보는 더욱더 파격적이었다.
‘갓 등선을 한 존재가 홀로 선계의 선인들을 꺾어 냈지.’
절대적인 마(魔)라고 불리는 천마의 등선.
선계의 선인들이 그를 용납할 리 없었다.
천마신교라는 마, 천마라는 마선(魔仙)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이제 갓 등선에 성공한 천마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을 선계에서 수련을 해 온 선인들의 싸움.
과거의 옥황도 당연히 한서준이 무참히 패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한서준의 행보는 평범한 선인들을 꺾어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선계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팔선들까지 모두 꺾어 내었다.
그것도 고작 천 년 만에 말이다.
물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된 팔선들과의 결전에서 한서준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한서준은 살아남았고, 팔선들을 모두 그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놈이 두각을 드러냈을 때부터 곧장 처리했어야 했다.’
안일했던 스스로의 판단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지난날을 떠올리며 후회하느니 지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궁리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나 옥황이 있는 한 이 세상이 마(魔)의 지배 아래 들어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레와 같은 옥황의 목소리에 한서준의 고개가 갸우뚱- 젖혀졌다.
“무슨 개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라. 내가 네놈, 천마신교의 교리를 모를 것 같으냐?]
옥황이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한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 교리 내가 폐한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이런 재미없는 세상 누구의 지배하에 들어가든지 나는 관심 없어.”
애초에 한서준은 천마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 투쟁(鬪爭)을 이어 가다 보니 천마라는 자리에 앉게 되었을 뿐이었다.
한서준의 목소리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옥황의 미간에 천(川) 자가 자리 잡아 갔다.
[그럼 네놈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냐?]
“나야말로 묻고 싶다. 대체 왜 계속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데?”
[네놈이 선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날 먼저 죽이려 했잖아!”
옥황의 물음표가 피어나려던 찰나, 한서준의 간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냥 난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인 건데,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건데!!”
[무어라?!]
홀로 선계를 무너뜨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황당무계한 대답.
그러나 한서준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 행복…… 우리 집, 가족들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지구라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이냐?]
“처음부터 내가 바랐던 것은 그것뿐이었어.”
목소리나 표정에 거짓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한서준은 천마(天魔).
그것도 역대 천마 중에서 가장 악랄하면서도 잔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그를 신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중원의 사람들을 그렇게나 많이 죽인 거냐?]
“내가 죽이려고 죽였어? 봤으면 알잖아. 주변에서 나를 계속 죽여 버린다고 공격해 오잖아, 안 죽이면 내가 죽게 생겼는데 너 같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고.”
한서준이라는 역대 고금제일이라는 천마의 등장이었던 만큼 주변의 정파의 일원들이 한서준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십대고수라고 불리는 인물 중 두 명, 무림연맹의 맹주 유중록과 남궁세가의 남궁척이 한서준을 죽이기 위해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천마, 한서준의 힘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두 명의 십대고수를 아주 손쉽게 처치해 내었다.
중원을 뒤집을 정도로 중대한 일인 만큼 자연스레 사방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고, 천마를 두려워하는 문파들끼리 뭉쳐 연합을 창설하며 천마신교를 멸문시키기 위해 진격을 해 왔다.
한서준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정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을 죽인 것뿐이었다.
[선계에서 난동을 피운 것은?]
“그냥 집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등선을 했는데 너희들이 다짜고짜 마선(魔仙)이니 뭐니 하면서 먼저 공격해 왔잖아.”
기억을 더듬어 보자 한서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한서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먼저 공격을 하며 적의를 표출한 것은 선계의 신선들이었다.
[하아…….]
터무니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옥황이 두통이 밀려오는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듭 말했지만 현실적, 미래지향적인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네놈이 있었다는 지구라는 곳이…… 이곳이 맞느냐?]
옥황이 손에 쥔 붓으로 원을 그리자 그 안에 흐릿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고향 별, 지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구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푸른 바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뿌연 먼지들을 확인한 한서준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을 표했다.
“혹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는 거야?”
[뭐 다소 무리를 해야 하긴 하지만… 이 몸이 한 100년쯤 정양한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한서준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르는가 싶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부정을 표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무리 간절히 바라 왔다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을 믿으려 하다니…….”
옥황은 자그마치 천 년을 싸워 온 선인들의 수장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신용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말도 안 되는 것에 속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논 옥황에 대한 감정들이 뒤섞이며 가슴속에서 짙은 분노가 피어났다.
“치사하게 남의 오랜 염원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려 해?”
노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고 있는 한서준의 흑발이 하얗게 물들어 갔고,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한서준의 살기 서린 의지들이 백옥루의 내부를 잠식해 갔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인들은 자연스레 무기를 치켜들며 한서준을 겨냥했다.
백옥루 내부가 언제 싸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찰나였다.
그 순간, 화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옥황이 손을 치켜들며 말을 내뱉었다.
[백옥경(白玉京)을 걸고 말하지. 앞으로도 너와 나누는 언행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것이라는 걸 말이야.]
백옥경은 선계의 중심이자 뿌리를 품고 있는 근원이었다.
제아무리 옥황이라 할지라도 혼자도 아니고, 선계 전체의 근원을 걸고 약속을 한 상황에서 거짓을 내뱉을 수는 없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옥황은 목숨을 벗어나 본인이 그토록 아끼고 가꿔 온 모든 것을 걸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맙소사, 정말 고작 그런 방법으로 지구로 돌아가는 게…….”
말을 끝내지 못하는 한서준의 눈빛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런 게 진짜로 가능하다고? 그럼 여태껏 내가 한 개고생은 뭔데?’
한서준의 눈빛을 읽은 옥황상제가 다소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말하지 않았나, 가능하다고 말이야. 사정을 몰라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은 안타깝게 됐다만…….]
그건 옥황상제의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자면 별것도 아닌 일로 괜한 피를 본 셈이니 말이다.
“돌려보내 줘! 정말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난날의 원한은 없던 걸로 해 줄게.”
옥황도 마음 같아서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며 눈앞의 괴물과의 끔찍한 인연을 얼른 끊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백옥경을 걸고 맹세한 이상 한서준을 상대로 거짓말 혹은 사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부턴 옥황과 선계의 자존심 문제였다.
[말을 끝까지 들어라, 지금 네놈이 원하는 것은 그냥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냐?]
옥황의 물음에 한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중원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선계에서만 자그마치 천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왔다.
지금 시간대의 지구로 돌아가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행복했던 삶, 가족들이 존재치 않아.’
한서준이 옥황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건 불가능한 거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만, 단순히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닌 시간까지 역행해야 하는 만큼 예기치 못한 리스크가 있을 수도 있다.]
“돌아가다가 죽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놈이 가지고 있는 격(格)이 있는 만큼 그 정도의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관없어.”
한서준은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을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갈래.”
[네가 직접 선택한 것이니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도 집,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원망은커녕, 거짓말 좀 보태자면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확고한 한서준의 목소리에 옥황이 고개를 주억이더니 붓을 쥔 손을 움직였다.
기이한 문자들이 허공을 수놓았고, 이윽고 하나의 진(陳)이 한서준의 발아래에 그려졌다.
우우웅-!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펼쳐진 진에서 살의나 살기 같은 공격성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만큼 그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옥황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양의 기가 진의 내부로 흘러들어 갔다.
붓으로 그려진 기이한 문자들과 옥황의 기운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쩌억-!
이윽고, 공간의 균열이 일어나며 푸른 별, 지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돌아가거라!]
괴팍한 옥황의 외침과 함께 기묘한 감각이 한서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라!]
옥황의 외침에 한서준은 치켜든 중지 그리고 환한 웃음으로 화답을 해 주었다.
“걱정 마, 이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눌 거니까.”
쉬익-!
강력한 흡입력이 몸을 끌어당겼다.
한서준은 그 흡입력에 몸을 온전히 맡기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절대적인 권력과 힘, 마르지 않는 재화와 같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포기하면서까지 지구로 돌아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잃고 나서야 알 수 있듯이 한서준은 갑작스레 중원에 떨어진 뒤로부터 가족의 소중함을 깨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 서연이. 다들 무사하겠지?’
무엇을 하든 항상 내 편에 서서 응원을 해 주던 부모님과 여동생 한서연은 한서준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
지은이 : 소해현
제작일 : 2021.05.10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김레아
표지 : 김경환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 본 작품은 (주)고렘팩토리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며 무단전재 또는 무단복제 할 경우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ISBN : 979-11-7051-63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