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대가는 놀고먹고 싶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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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인생도 그렇다.

태어나서, 배우고, 자라나고, 살아간다.

행복한 삶.

하지만 인생이 행복할수록, 이룬 것이 많을수록 두려운 것이 존재한다.

죽음.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러니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 쉽고 편한 말이다.

받아들이라니? 죽음을 그저 받아들이라니!

싫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면 다시 떠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을 모른다는 것은, 그것도 모르고 있는 자신조차 사라진다는 것은, 스스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란 말인가?

치가 떨리도록 두려웠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종교에 심취하고 기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1년 2월의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나는 눈을 감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감으면 뒤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오죽하면 끊어진 절단면에서 파생되는 고통마저 소중했을까?

나는 살고 싶었다.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날 좋아해 주던 사람들, 싫어하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기억들 등 모든 것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 어떤 지푸라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는 무심하게 흘러갔고 끝을 맞이했다.

눈이 감겼다. 두려움도 끝났다.

눈을 감은 이후의 나는 없었으니까.

아니, 없었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존재했다.

다시금 태어났다.



* * *



모두가 ‘영화’라고 생각했던 인생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드라마’였다.

한 번이 끝이 아닌, 다음 편이 존재하는 드라마 말이다.

물론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나였다.

웃긴 것은, 이제부터는 갓난아이로 시작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자라난 상태에서 특정 상황이 오면 깨어나는 식이다.

이 인생을 살아가던 내가 전생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환생해서 살아오던 내가 이번 생의 기억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음 생.

나는 아헨타르라는 대륙의 왕자였다.

독을 먹고 죽어가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나는 정적들을 죽이고 드래곤과 함께 마왕을 죽였다가 드래곤마저 죽이고 지존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죽었다.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했다.

그다음 생은 무협 세계라는 곳의 꼽추로 태어났다.

일곱 살이 되던 때, 먹을 것이 없던 부모는 날 버렸다.

다행히 전생에 배웠던 마나심법을 이용하여 겨우겨우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마을로 내려가 집으로 찾아갔지만 다시 내쫓김 당했다.

전전하던 끝에 스승을 만나서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승은 혈교라는 곳의 교주였고, 쫓기는 신세였다.

나는 스승과 함께 싸우다가 장렬하게 산화했다.

아무리 인생 2회 차인 내 오성이 뛰어나고 스승도 강했지만 다구리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죽어가며 스승은 나에게 미안하다 했지만 그가 나에게 미안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다시 태어나니까.

오히려 무공을 가르쳐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그 후에는 조선과 비슷한, 하지만 엄연히 다른 세계의 17세 소작농으로 태어났다.

자식 둘에 아내는 죽었고, 다 죽어가는 어미가 있었다.

이미 ‘현생’을 자각한 나는 이들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열심히 살았고, 어미를 보필했다.

보릿고개가 와서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4회 차 환생자답게 밭을 일구고, 훨씬 많이 수확하여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찌저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죽어갈 땐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거상이 되어 있었다.

다음 생으로 넘어간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군림하며 다음 생, 또 다음 생을 살아갔다.

그런 와중에 우연한 계기로 사역마도 얻게 되었다.

음, 사실 사역마라기엔 좀 애매했다.

천계의 천사였으니까.

그녀는 나의 환생을 듣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런 환생을 계속해 나가는지 반쯤은 알아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세요.

“사실 난 환생이 아니라 빙의를 해왔던 게 아닐까?”

환생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내가 남이 죽을 때 그 몸을 차지하는 빙의를 연속하는가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도 그녀는 고개를 저어 주었다.

-무한환생도 말이 안 되지만, 무한빙의는 더더욱 말이 안 되는 현상이에요. 만약 빙의라면 본래 몸 주인의 성격과 기질이 처음 태어났을 때의 당신과 항상 똑같은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죠. 당신이 자각 전에 살아 온 삶에 신경을 쓰는 것도, 당신이 착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자각 전의 당신 역시 당신이니까,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거겠죠.

“그렇네.”

막힌 부분이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 후로도 다음 생, 그다음 생을 살아갔다.

사역마의 도움을 받아 훨씬 편하게 살았고, 인생의 회 차가 쌓여갈 때마다 죽어야 할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삶이 더욱 즐거워졌다.

언제나 새로웠다.

모든 인생들이 나만을 위한 코스 요리 같았다.

한 접시 한 접시가 맛있고 의미가 있는 요리!

하지만 그 코스가 무한히 반복된다면 어떨까?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어야만 한다면 어떠할까?

전혀 접해 보지 못한 산해진미마저 냄새만으로 물리는 날이 와 버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코스 요리가 나오고, 그것이 영원히 나올 예정이라면 어떠할까?

-죽지 못해 살아간다!

수많은 삶 끝에, 난 그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한 번의 삶에 그 이치를 깨닫는 사람도 있는데, 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삶을 살고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 후, 난 그저 살았다.

적당한 힘으로 적당하게 모든 것을 대하며 적당하게 살아갔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시간은 부질없이 흘러가 다음 몸에 안착했다.

이번엔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이번엔 또 뭘 해 볼지 따위의 기대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차피 똑같겠지.

하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그곳엔 억겁의 세월 동안 무한 환생을 반복하던 나를 동요시킬 정도의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뚝. 뚝뚝.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주변에 만연한 동굴의 어딘가.

십 수 구의 시체 속에서 똑같이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내가 중얼거렸다.

“……아야.”

아야는 아프면 하는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배가 뚫린 사람이 담담하게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하나 적어도 사내에게 이 상황은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었다.

“어지간히도 많이 겪어봤어야 말이지.”

무료한 그의 시선이 본인의 배를 본다.

지저분하게도 뚫려 있다.

피니 내장이니 하는 것들이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기까지 했다.

단면이 깨끗하지 않았다.

그것은 칼이나 창 같은 깔끔한 무기에 베이거나 찔린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람에 의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대형 짐승의 소행일까?

알 수 없지만,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꽤 귀찮아질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냥 제칠까.”

제친다는 것은, 이대로 하지 않고 일을 미룬다는 것을 뜻한다.

가만히 있으면 피 흘리다 죽는다.

그러면 또 새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비슷한 상황에서 깨어나겠지.

그의 환생 트리거는 ‘목숨의 위기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더 나은 상황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절벽에서 떨어져 모든 뼈가 부러지거나 식물인간으로 반송장처럼 깨어나는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이 그렇게 나쁜 시작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살아 봐야겠네.”

고민을 끝마친 그는 마법진을 그렸다.

곧 그의 피가 보랏빛을 뿜어낸다.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던 물방울 역시 허공에서 멈춘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그 허공이 찢어짐과 동시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의 여자였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거기서 보이는 골반. 그것을 가질 자격이 충분함을 가르쳐주는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그 위에 돋아난 한 쌍의 뿔은 그 모든 것들을 공포로 뒤바꿔 버린다.

마계의 고위급 악마. 릴리쓰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는 사내에게 불만 어린 시선을 보낸다.

마치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후 침묵으로 일관하는 듯한 태도다.

졸지에 ‘모르는 번호’가 된 사내는 싱긋 웃으며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사역마의 이름을 불렀다.

“크로니아.”

그 말에 릴리쓰. 아니, 크로니아는 김빠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의 꼬리 역시 축 늘어졌다.

그녀의 진명을 아는 것은 모든 다중 우주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하긴. 이렇게 날 함부로 불러낼 수 있는 것도 당신밖에 없죠. 이번엔 꽤 잘생겨서 몰라봤지 뭐예요?]

그 말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거, 잘 생겼어?”

[내 눈에는? 좀 잘생긴 정도?]

마계에서도 알아주는 릴리쓰가 잘생겼다 말할 정도라니.

“하아…….”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하나만으로 주변이 눌러앉는 것 같았다.

크로니아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잘생기면 좋은 거 아니에요?]

“날 알면서 하는 말이야? 잘생기면 골치 아파. 눈에 너무 띈다고. 역시 제쳐야 하나…….”

이번 생을 살겠다는 마음의 불씨가 거친 풍파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렸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자신이 속한 종 중에서 가장 빼어나길 원할 테지만 그녀의 주인만큼은 달랐다.

아니, 다르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감정이 마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인이 가면 갈수록 나태해 지는 것이 그녀는 싫지 않았다.

그와 처음 시작했던 당시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다른 것처럼, 그 역시 억겁의 세월 속에서 본질적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와 남자의 대표적인 유대였으니까.

자신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축 늘어져 있는 인간이라니?

그녀는 싱긋 웃으며 양 팔을 활짝 펼쳤다.

평소의 주인이라면 제쳐 버릴 이 삶을 크로니아는 살게 하고 싶어졌다.

[나까지 불러 놓고 웬만하면 죽지 마요. 또 불려 나오기 귀찮다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말이지…….”

[어쨌든 빨리 정해요. 지금 당신, 3분 후면 죽어요?]

“쩝.”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오랜만에 잘생기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요. 나도 이번 생만큼은 눈 호강 좀 하면서 살자고요.]

싱긋 웃은 그녀는 아공간을 열었다.

온갖 아이템들이 그곳에 널려 있었다.

저 안에는 산을 잘라 버리는 검도, 호수 정도는 하루만에 기화시켜 버릴 수 있는 지팡이도, 한 순간에 대륙 반대편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반지까지 다양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들 중 지금의 사내를 살릴 수단은 없다.

또한 지금의 그는 방금 보인 그 어떤 물건들도 고를 수 없었다.

인과율이라는 불편한 녀석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사내가 살아생전 만들거나 얻었던 것들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끔 막아버리는 것이다.

자잘한 아티팩트는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마저 크로니아라는 여과기를 통하지 않으면 마음껏 빼낼 수도 없다.

“몇 잔 정도 나와?”

[잠시 기다려 봐요.]

몇 잔이라는 말에, 크로니아는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일명 커피 드립 시뮬레이션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가 얻은 모든 아이템들을 잘 간 원두에 비유하고, 크로니아라는 거름종이가 그것을 모두 받친다.

거기에 세월이라는 물을 붓는다.

환생을 자각하기 전의 사내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물이, 치열하게 살아 왔던 만큼의 온도로 부어지는 것이다.

그곳에선 ‘커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액체가 몇 잔 정도나 나올까?

셈을 거듭하던 그녀의 눈이 떠졌다.

[세 잔 나오네요.]

세 잔이란, 자잘한 아티팩트 3개 정도를 끌어 쓸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보통 한 잔. 많아 봤자 두 잔 나오는 것치고 3잔 나왔으면 정말 많이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이번 생의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나 본데?”

[그러니까 그 생 열심히 이어가 보자고요. 그래서 뭘 드리면 되옵나이까?]

사내는 꺼져가는 자신의 상태를 가늠하고는 말했다.

“데몬 트롤의 목걸이. 여의주 조각 팔찌.”

[팔찌는 한 쌍이라 두 잔 분인 거 아시죠?]

“에이이, 그걸 모르고 달라고 했을까?”

[줘도 스스로 찰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요. 이 정도 무례는 용서할 거죠?]

크로니아가 그에게 다가와 양손에 팔찌를 채우고,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걸어 준다.

목걸이를 걸며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사내의 눈, 코, 입을 잠깐 짓누르고 지나갔다.

“살기도 전에 숨 막혀 죽을 뻔했잖아?”

그리 말한 것치곤 사내의 안색이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다.

데몬 트롤의 목걸이가 가진 힘이 전신에 퍼지며 죽을 상처가 실시간으로 아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름 던 것을 확인한 크로니아가 고운 아미를 찡그린다.

[이번 생은 꽤나 매력적으로 생겨서 사심 좀 섞어 봤어요.]

다른 남자와는 달리 이 남자는 그녀의 행동에 심기가 불편하다.

“거참. 어지간히도 이 얼굴이 잘생겼나 보네.”

[그냥 내 눈에만 잘생긴 거라니까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면 좋지 않아요?]

배시시 웃은 그녀가 행운을 빈다는 듯 남자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춘다.

[혹시 알아요? 이번엔 내가 당신을 유혹할 마음이 생길지.]

“마치 그럴 마음만 생기면 날 유혹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사자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아직 당사자에게 전력을 다한 적이 없다니까요?]

억겁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휘된 적 없는 전력 따위 무섭지 않은 환생자였다.

“그런 말 하기에는 지금도 전력은 아닌 것 같아. 안 본 사이에 살이 좀 붙은 것 같거든.”

크로니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항상 똑같거든요!?]

“귀신을 속여.”

[아니라니까욧!?]

“맞다니까.”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내가 바닥에 마법진을 비벼 껐다.

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들어왔던 균열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동굴 주변을 맴돈다.

[왠지 이번 환생은 느낌이 좋아요. 부디 오래오래 이곳에 있어 보자고요!]

그 말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조만간 이야기해 보자고. 너의 느낌대로 이번 생이 좋은 생일지는 말이야.”

그렇게 말한 사내가 한껏 기지개를 켰다.

이번 생을 살아보기로 한 이상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모면하는 건 간단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자신을 이렇게 만든 흉수를 굳이 피하려는 건 아니지만, 굳이 찾아내서 죽이는 것도 번거롭다.

하지만 그런 그를 붙드는 감정이 존재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마모되지 않는, 그의 근본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바로 측은지심.

“살…… 살려…… 주세요. 누군가…… 제발……!”

쌓인 시체는 열 구 정도.

모두 죽은 줄 알았지만, 여자 하나가 살아 있었다.

살아서 누구에게 구하는지도 모를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뒤엔 괴물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끼에에엑!

2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키. 툭 튀어나온 아랫니. 전체적으로 못생기고 기분 나쁜 이목구비.

그리고 녀석의 머리 위에 자막처럼 쓰여 있는 글씨는……?

“돌연변이…… 고블린?”

생전(?) 처음 만난 괴물의 머리 위에 글씨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라니?

마치 수많은 환생 중 단 한 번도 즐겨보지 못했던, 하지만 그는 분명히 즐겨본 적이 있었던 ‘게임’이라는 개념의 것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것에 놀라기도 잠시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진다.

“문자가…… 낯이 익다?”

물론 많은 환생 속을 표류하며 똑같은 세계에 중첩해서 태어나는 것은 희박하게나마 겪어봤던 일이다.

그러니 그를 당황시킨 건 다른 이유였다.

“한글은 당연하지만 한국에만 있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다 죽어가던 여자의 언어가 한국어임도 방금 깨달았다.

그의 혼잣말이야 당연히 한국어이고, 크로니아 역시 한국어를 구사하는 만큼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여기, 한국이야?”

끝이 없는 그의 환생 라이프가 시작된 스타트 지점.

그곳으로 사내는 돌아온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국에 저런 괴물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크어어어!

돌연변이 고블린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사내가 아닌 죽어가는 여자의 등이다.

고민은 녀석을 죽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가 찬 두 개의 팔찌가 황금으로 빛났다.

거기서 나온 힘이 진기를 대신하여 그의 기경팔맥을 돌아, 그가 평생을 다섯 번 심취하고서야 겨우 끝을 볼 수 있었던 공부를 끌어올려 주먹에 살포시 얹었다.

혈폭괴신공 3식 - 혈생력잠폭.

꽈앙!

거칠게 달려들던 돌연변이 고블린의 몸이 달려들었던 것보다 빠르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돌연변이 고블린의 목 위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가 내지른 단 한 번의 공격이 돌연변이 고블린의 머리를 으깨 버린 것이다.

물론 덕분에 이 몸이라면 반파 되었을 반동이 몸을 덮쳤다.

하지만 데몬 트롤의 목걸이를 찬 이상 이 정도의 반동은 조금 숨을 고르면 참을 만한 정도다.

그리고 곧.


-업적, ‘한 방에 돌연변이 고블린을 죽인 자’를 획득합니다!

-근력 2, 체력 2가 오릅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꽉 차오릅니다!

-스킬, 혈생력잠폭(S)를 얻습니다!

-스킬, 혈생력잠폭(S)은 이 세계의 스킬이 아닙니다.

-오류 발견, 초심자 유하인의 정보를 수정합니다.

-특성, 무한 환생자(측정 불가).

-대상의 최초 이름이 무엇입니까?


게임 속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정시혁.”

무한 환생자 정시혁.

그가 억겁의 세월을 뚫고 지구에 다시 돌아왔다.

환생의 대가는 놀고먹고 싶다


지은이 : 은남

제작일 : 2021.06.23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심지은

표지 : 시월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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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59-72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