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찍고 레벨업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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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



“그러니까…… 듣고 있니?”

“어? 응. 듣고 있어.”

“내가 무슨 말 했는지 말해 봐.”

새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꾹 다문 두툼한 입술에서는 고집이 느껴진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흘러내렸고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검었다.

길거리에서 본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필시 돌아볼 미녀였다.

그녀가 눈썹과 눈썹 사이를 좁히며 나를 노려봤다.

“이런 거 하면 안 된다고.”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탁자 위의 노트북 화면을 힐끗 살펴봤다.

어젯밤 방송한 내 게임 플레이 영상이다.

가상 속 나의 분신이, 화려한 움직임으로 적을 학살 중이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녀가 눈썹을 구부렸다.

“네가 보여주는 컨트롤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반대로 잘 모르는 나도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지.”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것뿐.

“너도 알다시피 이제 실력만으로 먹고 사는 건 힘들어.”

“확실히…… 그렇지?”

“그래. 예를 들어 화려한 퍼포먼스라거나, 재미있는 입담 같은 웃긴 거. 그런 게 요즘 인기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건 스트리머가 아니라, 게이머지.”

“끄응. 내가 그런 체질은 아닌데…….”

“그거야 그렇지.”

팩트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인상도, 인성도 차갑구나. 조금 울 뻔했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 아니. 편집자였다.

김미라.

벌써 몇 년을 함께해 온 편집자이자 방송 파트너이며, 동시에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소꿉친구다.

어린 시절 나는 그녀와 유치원과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하지만 중학생 때 그녀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자연스레 관계도 멀어졌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됐지만.

“후우…….”

나는 미라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트리머.’

이제는 본명만큼이나 익숙해진 또 다른 이름.

그리고 한물간 스트리머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게임하는 게 좋았다.

그 탓에 학창 시절에는 정말 이렇다 할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 청춘도 게임으로 불태웠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시절 혼자였지만 정말 즐겁게 보냈으니까.

아, 그래도 인생까지 불태우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분별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굶어 죽진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친구가 없으니 놀러 가자면서 훼방을 놓을 사람도 없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럭저럭 멀쩡한 회사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회생활이 맞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바로 인터넷 개인 방송의 유행이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말대로 세상은 누구나 인터넷 동영상으로 유명해질 수 있게 됐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인터넷 방송은 아이튜브나 트위스치 등의 방송 중계 플랫폼의 시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열기는 식지 않고, 인터넷 방송이 하나의 콘텐츠이자 사업으로 발전하여 방송국과 견줄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유행 속에서, 우연찮게도 나의 동영상이 발견됐다.


-와, 뭐야?


나는 인터넷 방송이 유행하기 전부터 플레이 분석 겸 취미로 녹화한 방송을 업로드 했다.

조회 수도 저조했었다. 1이나 2. 많아 봤자 3이었다.

어차피 취미여서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업로드한 동영상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되면서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방금 뭐 한 거임?

-저걸 저렇게 하네 ㄷㄷ


댓글이 달리고, 조회 수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갔다.

이를 본 다른 사람에 의해 각종 커뮤니티에도 퍼졌다.


-혹시 게임 플레이 생방송으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처음에는 그저 계기였다.

한 시청자가 생방송을 보고 싶다 해서 실황으로 플레이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아니, 생각 이상이었다.

내 게임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모양이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묵묵히 플레이하던 게임 방송.

지금 보면 재미도 없던 방송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플레이하던 게임이 인기 신작 게임인 게 한몫 더했다.

내 방송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금전적 후원— 도네이션과 함께.

“일, 십, 백…… 헉, 이게 얼마야!”

2주일.

겨우 2주일에 불과했다.

나는 내 월급에 이르는 금액을 순식간에 벌어들였다.

그리고 그게 3주일, 4주일 계속되자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회사를 그만두고 스트리머로 전향하기로.

당시에는 충동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의 고민한 끝에 내놓은 결과였다.

하나. 좋아하는 게임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

둘. 시청자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

셋. 무엇보다 재미있는 입담 없이도 방송이 가능했다.

이 중 특히 첫 번째가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던 나에겐 꿈만 같은 직업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게임 전문 스트리머로 전향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없는 생각이었지…….’

내 인생은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누구나 한 번쯤 할 생각. 나는 아마 그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 방송을 너무나도 우습게보고 있었다.

“오, 저 사람들 아이튜버인가봐.”

“아이튜버가 아니라 스트리머 아닌가? 아니, 둘 다 같나?”

주변의 카페 손님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숙덕거렸다.

나 역시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이튜버. 세계 최대 비디오 플랫폼 아이튜브(ITube)의 업로더이자 인터넷 방송인.

큰 차이는 없다.

아이튜버든 스트리머든 대부분, 아니 사실상 전부 두 플랫폼을 병행하고 있으니까.

“야. 요즘 아이튜버가 그렇게 돈 잘 번다며?”

“엄청 잘 번다던데? 부럽다, 부러워. 그냥 동영상만 촬영해서 올리는 건데 돈을 그렇게 잘 번다니.”

“나도 회사 때려 치고 아이튜버나 할까? 장비도 그렇게까지 안 비싸다고 하던데…….”

“오, 마치 헬스장 3개월 회원권 결제하고 3일 나가는 사람 같은 말을 하는구나.”

“어허! 난 일주일 나갔어!”

“와…… 정말 대단해. 너 같은 기부 천사 덕에 사업자들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엇, 미안. 말을 잘못했어. 정정할게. 기부천사가 아니라 호구였지.”

인기는 잠깐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업계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문제는 위의 세 번째 항목이었다.

확실히 초창기에는 입담이 없어도 뛰어난 컨트롤만 갖추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청자들은 그 재주에 질리기 시작했고, 또한 취향도 바뀌었다.


노잼만봄: 아 말 좀 해봐. 진짜ㅋㅋ개노잼이네

조커: ㄹㅇㅋㅋ

나보고잘생겼대: 이럴 거면 내가 게임하지

팩트전문가: 그건 네가 이렇게 못 해서 그런 거고

나보고잘생겼대: 솔직히 이게 그리 굉장한지도 모르겠음.

팩트전문가: 네 못생긴 거와 비교하면 솔직히 ㅇㅈ

이걸웃네: 그만 해라ㅋㅋ울겠다

팩트전문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야 우냐? 울어?


“그리고 미라야. 팬인 척하면서 악플 좀 그만해.”

“악플이라니. 실드야. 편집자가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쁜 말은 쟤가 먼저 시작했어.”

항상 내 편에 서주는 편집자.

고맙기는 한데, 옆에서 보면 기분이 좀 묘하다.

누가 봐도 차분하고 예의를 갖춘 미인이 인터넷에서 저러다니.

괴리감이 심하다고.

닉네임 ‘팩트전문가’. 미라의 일반 계정 ID다.

“그리고 네가 재미있으면 이런 일도 없어.”

“…….”

마치 내가 진 건 팀원 탓이라는 듯이 말하는 그녀.

그런데 그게 틀린 말도 아닌지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스트리머는 방송인이다.

플랫폼만 다를 뿐 텔레비전에 비추는 연예인과 비슷했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직업인.

게임 실력이 아무리 좋아 봤자, 입담도 퍼포먼스도 없다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방송인에 불과했다.

그래.

그 스트리머가 바로 나다.

한때는 나도 생방송 때 몇 백 단위의 시청자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그 숫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뒤늦게 마이크를 사서 말도 해 보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결국 시청자의 숫자는 백 단위 아래를 향해 추락했다.

‘미라도 그때 다시 만났었지.’

썰물처럼 시청자들이 빠져나가는 걸 보며 어찌할 줄 모르던 나날. 나에게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방송 잘 봤어.


처음에는 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누군지 밝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한 메일의 내용은 옛 친구를 향한 인사만이 아니었다.


-혹시, 편집자 필요하지 않니?


미라는 당시 일을 찾고 있었다.

마침 분야가 방송 편집이었고, 우연찮게 내 영상을 보고 연락했다고 한다.

나 역시 조금이라도 인기를 끌기 위해서 편집자를 구하던 참이었는지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게 작년의 이야기.

“그리고 그 망겜 좀 그만해. 어떻게 편집해 봐도 조회 수가 전혀 안 나오잖아.”


[기어 다니는 종말(A creeping apocalypse)]


일명 ‘기다종’.

내가 8년이란 세월을 바친 게임의 이름.

원래 게임 전문 스트리머는 보통 한 게임을 오래하지 않는다.

방송으로 수익을 얻으려면, 최대한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여러 게임을 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게임을 클리어하거나 혹은 유행이 지나면 더 이상 플레이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 기다종만큼은 예외였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게임에 빠져 살았다.

플레이 영상도 8년 전부터 빠짐없이 업데이트하고 있다.

굳이 방송이 아니더라도 매일 3~4시간씩은 즐겨했다.

나에게 있어 기다종은 최고의 취미였다.

아니, 또 다른 인생이었다.

‘프로게이머를 포기한 것도 이 게임 때문이었지.’

어린 시절 프로게이머를 꿈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게이머는 종목이 된 게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듣고 포기했다.

애석하게도 종목에는 기다종이 없었다.

종목이 되는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인기 있는 게임일 것.

문제는 기다종이 인기와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세간에선 망겜이라 평가받는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망겜 아니라니까!”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현대 지구에 다른 세계와 연결된 문이 출현했다.

그리고 그 문에서 온갖 괴물들이 넘어와 인류를 습격했다.

그 후 마치 그런 인류를 구원이라도 하듯, 각종 신화의 신들이 나타나 인류에게 힘을 선사했다.

플레이어는 이 인류 중 한 사람이 되어 괴물 등의 세계 멸망급 위기에 맞서 싸우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각종 신화 및 판타지, 그 외에도 사이언스 픽션(SF)과 현대가 어울려진 아포칼립스 게임.

기어 다니는 종말

“꼭 망겜 하는 사람이 그런 말 하더라.”

“…….”

누가 편집자 아니랄까 봐 일침하는 거 좋아하는구나.

그래.

조금, 아니.

많이 솔직해지자.

기다종은 망겜이 맞다.

적어도 갓겜은 세월이 흐르면 고전 명작 소리라도 듣는다.

하지만 이 망겜은 욕은커녕 아는 사람도 적은 게임이었다.

심지어 내가 잠깐 동안 인기 스트리머였던 시절에도, 기다종 동영상만큼은 조회 수가 오르지 않았다.

인기는 무슨. 기억하는 사람 찾기도 힘들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라야. 이것만큼은 봐줘. 기다종은……그래. 내 취미 같은 거니까. 영상 편집도 안 해도 괜찮아.”

미라의 얼굴은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편집자 겸 프로듀서인 그녀는 내가 이런 망겜에 시간을 버리는 것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대화가 한두 번도 아니기도 하고, 몇 번이나 꾸짖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인상만 찡그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론 솔직하게 답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취미.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맞지도 않다. 취미를 넘어 그 이상이다.

인생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생의 일부? 아니. 달라. 전부겠지.’

남들이 들으면 비웃겠지.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게임. 그것도 망겜 취급 받는 게 인생이라니.

하지만, 남들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그 이상이었다.

사실, 게임 자체로는 이제 그리 크게 재미있지 않았다.

당연하다. 설사 갓겜이라고 해도 무려 8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다면, 질리기 마련이다.

이미 만렙을 달성한 캐릭터만 해도 셀 수없을 정도로 많다.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요소까지 전부 섭렵한 지 오래다.

했던 것을 또 하고, 닳고 닳을 정도로 했다.

솔직히 말해 이미 질릴 때로 질려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게임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걸까?

그동안 쏟은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또는― 게임을 부정하면, 여태껏 인생을 낭비한 것 같다고 느껴져서?

없진 않기는 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더 단순하다.

‘게임에서만큼은,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 한심하게도, 궁극의 자기 위안이었다.

현실에서 나는 실패자다.

직업은 취미 수준의 스트리머.

학창 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추억할 만한 이렇다 할 청춘도 즐기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누구나 한 번쯤 쓰라린 연애 해 보셨잖아요?’라는 걸 보면 공감은커녕 울컥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공부에 집중해 학력이 특별히 우수한 것도 아니었다.

사회에 나가서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했다.

겨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 싶어 새롭게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성공하기는커녕 밑바닥을 기는 중이다.

말하다 보니 조금 우울해지네.

여하튼 현실에선 이렇게나 별 볼 일 없는 나지만, 기다종에서만큼은 달랐다.

게임 내에서는 세계를 괴수에게서 수 천 번씩이나 구했다.

인류는 물론이고 신들조차 경외감을 가졌다. 게임 외에선 명실상부 기다종의 최고라 인정받았다.

만렙(滿Level) 플레이어.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다.

안 그래도 그리 많지 않던 유저들은 전부 다 떠나고 없었다.

지금에 와선 나 역시 인생에 이렇다 할 업적이 이것밖에 없어서 포기할 수 없는 것뿐이다.

‘인생의 최대 업적이 아무도 하지 않는 망겜 만렙이라니. 하하.’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 한다.

‘언제쯤 정상 궤도로 올라갈 수 있을까.’

과거의 영광을 꿈꾸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청자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선 먹고 살 만 한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적어도 미라만큼은 책임져야 해.’

미라와 함께 일한 지도 조금 있으면 2년째.

사정이 좋지 않아 월급을 인상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한때 나 같은 중소기업 말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걱정할 시간에 게임이나 더 하라면서 일축했다.

차가우면서도 언제나 함께 힘써 주는 내 편집자.

비록 나보고 재미없다며 독설을 퍼붓긴 하지만, 항상 곁에서 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 준 미라에게 고마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에게만큼은 보답할게.

그 말을 입에 담으려 한 순간이었다.

“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당황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두 눈앞에 확연히 보이는 직사각형 창— 홀로그램이 허공에 갑자기 나타났다.

두 번째. 창에 표기된 메시지가 무척이나 낯익었다.

세 번째는 홀로그램의 디자인과 메시지가 바로 기다종에서 봐왔던 것이었다.


[제 26,000 세계의 지성체들에게 알립니다.]


위험해.

올 것이 왔다.

이거 환각이구나.

꿈에서 본 적 있기는 한데 현실에서까지 보이다니.

안 돼. 글러먹었다.

아무리 기다종을 좋아하고, 질리도록 오래 했다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제 26,000 세계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당혹감을 애써 감추며, 메시지를 무시하고 얼빠진 소리를 낸 나를 보고 의아해하고 있을 미라를 쳐다봤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미라 역시 나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당황. 의문. 혼란.

그 시선은 마주 본 나를 바라보는 듯했으나 실상은 다른 것에 향하고 있었다.

아니, 나나 미라만이 아니었다.


[반복합니다.]

[제 26,000 세계의 지성체들에게 알립니다.]

[제 26,000 세계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뭐야 이거?”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외에도 옆이나 앞, 뒤.

그리고 그 너머.

카페 내부 전원이 당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앞에도 홀로그램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당황스럽다.

전조도 없이 불현듯 나타난 홀로그램.

당황하는 사람들.

그리고 멸망을 선고하는 메시지.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당신들의 삶을 위해서 싸우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다름 아닌 ‘기어 다니는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였으니까.

만렙찍고 레벨업


지은이 : 정준

제작일 : 2021.06.01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심지은

표지 :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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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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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59-53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