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대가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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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프롤로그. 남작 가문의 삼남



나는 쿤트 남작가의 삼남 카록이다.

삼남.

게다가 첩의 소생.

물론 아버지와 배다른 두 형은 날 서자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나 역시 딱히 내 출신에 불만은 없다. 귀족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운인가.

다만 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었다.

서자라서 상속권이 전혀 없다.

오러에 대한 재능이 없어 기사가 되지 못했다.

마나에 대한 재능이 없어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

섬기는 신이 없어 성직자도 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개뿔도 없는 인생이란 뜻이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성인이 된 날, 나는 가문에서 나가 독립을 해야 했다. 기사도 마법사도 성직자도 되지 못한 내가 가문에 남아 봤자 밥버러지밖에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문을 떠나는 내게 1,500레디나(레던 왕국의 금화)라는 거금을 주면서 말씀하셨다.

“너는 기사도 마법사도 성직자도 되지 못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으니 상인이 된다면 굶지는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곡물 상인이 되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애송이 상인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성공한 상인이 되겠다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당시에 나는 내게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기사도 마법사도 성직자도 되지 못하는 대신 거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큰 수익을 내기 위해 조급해하다가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크게 쓴맛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특출한 상재도 없는, 그냥 평범한 인간임을 말이다.

다행히 나는 거상의 재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재가 없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하자, 비로소 상인으로서 안정세를 타기 시작했다.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리스크(risk)를 줄여 나가며 꾸준히 자산을 불려 나갔다. 젊은 날의 모든 실패의 경험은 고스란히 내게 뼈와 살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나는 제법 노련한 상인이 되었다. 레던 왕국의 20인 상인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물론 레던 왕국은 작은 나라였고 대륙 전체로 따졌을 때 나 같은 건 일개 상인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나는 만족했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나는 실패한 가장이었다.

스무 살 때, 나는 귀족가의 영애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럭저럭 좋은 집안의 딸이었고, 생긴 것도 예쁘장했기 때문에 나는 냉큼 결혼을 해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내는 내가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더 많은 사치를 즐겼다. 그 허영과 높은 콧대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한 지 3년 만에 태어난 아들내미도 아내를 쏙 빼닮아서 오만하고 방탕했다.

결국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밀고는 친정으로 가 버렸고, 아들놈도 ‘아버지는 고리타분하고 형편없어서 싫다.’라며 어머니를 따라갔다.

나는 평범한 사람만도 못하구나. 내 가정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이 꼴이 되다니. 당시 가족을 잃고 나는 큰 상심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령사를 만나게 되었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도 훨씬 희귀한 존재였다.

정령사는 나를 보더니 정령술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정령사가 될 수 있다고?’

그 말은 곧 내게도 하나쯤은 재능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령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정령사는 난색을 표하고 날 말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령 친화력을 가진 사람은 만 명 중에 한 명꼴입니다. 당신은 비록 풍부하지는 않지만 분명 정령 친화력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령 친화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정령과 계약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점차 사라집니다. 당신은 애당초 정령 친화력을 많이 타고나지도 않았을뿐더러 현재 연세도 많으십니다.”

“그래도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죠? 그럼 어디 시도나 해 봅시다.”

“정령 계약 마법진을 그리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만, 정말 괜찮습니까?”

“상관없습니다.”

“하는 수 없군요.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실패해도 저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인생은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였지만, 아내와 아들에게 버림받고 나자 다시금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나는 정령사가 가르쳐 준 대로 큰돈을 들여서 정령 계약 마법진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온 자연계의 위대한 정신이여, 나의 영혼의 부름에 응답해 다오.”

주문을 외자 마법진이 밝은 빛으로 번쩍였다.

나는 기대감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빛은 이내 꺼져 버렸다.

마법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사라졌다.

실패였다. 정령 친화력이 부족하면 정령이 부름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정령사가 경고한 대로였다.

나는 허탈해졌다.

조금만 더 일찍 내 재능을 알아차렸더라면.

젊었을 적에 정령 친화력이 있음을 깨달았다면 정령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당당히 가문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구나.

나는 모든 미련을 버리고 여생을 보냈다.

남은 내 여생은 그럭저럭 만족할 만했다. 오랫동안 상계에서 구른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하게 상단을 운영했다. 부족함 없이 부를 누렸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기도 했다. 베푸는 만큼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노년이 되어서야 특별함에 대한 내 집착이 쓸데없었음을 깨달았다. 특별하니 평범하니 하는 것들은 쓸데없는 기준이었다. 자기 인생에서 자기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법이었다.

상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나는 남에게 베풀면서 살았다.

집착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생을 마감했을 때의 내 나이는 무려 90세였다.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다가 졸음처럼 밀려오는 죽음을 느꼈다. 죽음을 직감한 나는 눈을 감고 운명에 순응했다.

깊은 잠에 빠지듯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1장. 되돌아오다



신이 내게 소원을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대답할 것이다.

그냥 이대로 죽은 채 있게 해 주세요. 저는 지금이 너무 편안하거든요.

달콤한 잠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나른했다. 죽음은 원래 이렇게 편안한 건가 봐.

아아, 너무 좋아.

흔들흔들.

“공자님!”

누구야? 날 자꾸 흔드는 게.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공자님! 카록 공자님! 어서 일어나세요! 지금이 몇 신 줄 알기나 하세요?”

누군가가 나를 거칠게 흔들었다.

대체 누구야? 늙은이를 마구 흔들어 대는 이 무례한 여자는.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데.

“끄응…….”

비로소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이 눈을 괴롭혔다.

으음? 여긴 천국이야, 지옥이야?

그런데 어째 익숙한 얼굴이 내 눈앞에 서 있다. 신경질이 난 듯 팔짱을 낀 채 무섭게 쏘아보는 여인.

맙소사.

어릴 때 날 돌봐주었던 베티 유모였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와 저 후덕한 몸매. 내가 가문을 떠난 열여덟 살 이후로 본 적 없었던 그녀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전의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역시 내 기억력, 아직 쓸 만하다니까.

그나저나 여긴 천국 맞나? 맞겠지?

눈을 비빈 나는 아직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여어, 72년 만이야, 베티 유모.”

나는 실로 수십 년 만에 베티 유모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친어머니를 일찍 여윈 내게 베티 유모는 어머니와도 같았지.

“뭐라고요?”

그런데 그녀는 눈살을 찡그렸다. 뭐야? 내 인사가 마음에 안 들었나? 포옹이라도 해 줄 걸 그랬나?

“여긴 천국이야, 지옥이야? 아아, 베티 유모가 있으니 천국이겠군. 설마 안 본 사이에 큰 죄를 지은 건 아니지?”

“지금 죄를 하나 지어야겠군요.”

그러면서 베티 유모는 내 등을 짝 때렸다.

“으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등짝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하고 따가웠다.

“무, 무슨 짓이야, 다 늙은 사람한테!”

아무리 유모라지만 너무하잖아!

“……나 원 참, 자칭 다 늙은 양반 자기 얼굴 좀 보시죠?”

베티 유모는 손거울을 내밀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뭐, 뭐야?”

경악에 찬 모습의 새파란 청년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암갈색 머리칼, 자신만만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잔주름 하나 없는 하얀 피부.

90살 노인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열여덟 살 시절의 내가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우와! 대단해! 천국에서 주는 서비스인가? 땡큐, 신이시여!”

천국에 오면 젊어지는구나! 좋다!

“하아.”

그런데 베티 유모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잠꼬대는 이제 그만하지 그래요? 오늘은 카록 공자님께서 가문을 떠나시는 날이잖아요.”

“……엥?”

지금 뭐라고 했어, 유모?

“엥이 아니에요, 엥이! 오늘부터 공자님은 열여덟 살 먹은 성인이라고요! 성인이 되면 독립하겠노라고 스스로 선언하셨잖아요.”

띵!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두드려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이 저 우주 너머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난 죽었는데? 여기 천국 아니었어?

설마 다 꿈이었던 거야?

90년짜리 기나긴 인생이 모두 꿈이었단 말이야?

“그럴 리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잖아!

지난 90년의 세월 동안 나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고,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 세상에 이런 디테일한 꿈이 대체 어디에 있냔 말이야!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잔말 말고 어서 준비하세요! 홀로서기의 첫걸음을 내딛는 날인데 말끔하게 단장하셔야지요.”

“어……. 응…….”

나는 베티 유모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붙잡혀 욕실로 질질 끌려갔다.

씻고, 말리고,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말끔히 정돈하고, 밝은 아이보리색 계통의 예복도 차려입었다.

“그럼 행운을 빌게요!”

베티 유모는 기운차게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베티 유모와 작별하고, 옷가지가 잔뜩 들어 있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가문을 나섰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가 왜 어린 시절로 되돌아온 거냐고. 누가 설명 좀 해 줘!

그렇게 ‘어어’ 하면서 걷는 사이에 저택의 정문에 도착했다.

세상에나.

저택 정문에는 아버지와 맏형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버지 바스크 쿤트 남작.

맏형 아서 쿤트 대공자.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하던 아버지와 역시나 나보다 30년이나 일찍 죽었던 아서 형님을 보자 멍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190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장신에 기사 가문의 수장답게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엄한 얼굴에 잘 다듬은 턱수염, 강인하지만 자상한 눈동자를 보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아버지와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얼굴을 했지만 턱수염이 없고 대신 눈빛이 좀 더 날카로운 아서 형님이 서 있었다.

가문의 중추인 두 사람은 어떤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직접 나와 있었다. 가문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는 나를 배웅해 주기 위해서.

경영의 대가


지은이 : 니콜로

제작일 : 2022.02.09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한서진

표지 : 시월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 본 작품은 (주)고렘팩토리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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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811-75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