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왕이 등교했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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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프롤로그



-정령왕님들께서 납십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정령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줄지어 한곳을 응시한다.

커다란 광장을 빽빽하게 메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정령들. 그리고 그들의 위로 각 속성의 정령왕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령들이여, 고개 숙여 경례하라!

가장 선두에 선 상급 정령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자, 그의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정령들은 단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각 잡힌 경례를 보였다.

마치 아이돌의 칼군무 같은 진풍경. 또는 엘리트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처럼.

그리고 고개 숙인 정령들의 상공에서 네 명의 정령왕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왕 엘림이시여, 바람의 정령왕 실프리스시여, 땅의 정령왕 어스시여,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시여. 강림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제1편 정령왕님께 경례



각 속성을 관장하는 정령왕들은 겉모습부터 다른 일반 정령들과는 다른 포스를 뿜어냈다.

말 한마디조차 쉽게 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눈매를 가진 물의 정령왕 엘림.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덕에 일반 정령들에게 인기 만점인 바람의 정령왕 실프리스.

무뚝뚝하고 과묵하기로 유명한 땅의 정령왕 어스.

그리고 당장이라도 버럭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을 지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이 넷은 모두 ‘정령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령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정령왕들로서, 그들의 능력과 업적은 그 칭호를 충분히 뒷받침할 만큼이나 위대했다.

일반 정령들은 그런 정령왕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치 그들을 신격 존재처럼 받들었으나, 그들도 역시 정령은 정령일 터.

사실 일반 정령들이 신처럼 모시던 정령왕들은 다른 일반 정령들과 다를 바 없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며 지상에 강림하고 있었다.

“엘림. 네놈이 뛰어나다고 으쓱거리지 마라. 그 재수 없는 눈매를 언젠가는 꺾어 버릴 테니까.”

“이프리트. 입 닥쳐라. 악취가 진동하는군.”

“뭐? 이 자식이 끝까지!”

“이프리트, 엘림! 두 분 다 자중하세요! 마지막까지 이래서는 안 되죠.”

정령왕의 지위에 오른 뒤, 평생을 라이벌이자 친한 친구로 지내 온 엘림과 이프리트는 그 짧은 순간에도 투덕거리기 시작했고, 실프리스는 마치 반 아이를 중재시키는 선생님처럼 둘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어휴. 정말. 둘 다 철 좀 드셔야겠어요. 이제 준비들 하세요.”

그들은 시시콜콜한 잡담을 멈춘 뒤 일반 정령들이 줄지어 있는 지상에 도착했고, 광장의 커다란 무대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일반 정령들의 위로 그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 네 명의 정령왕,

그들이 모두 무대 위에 안착하자, 가장 먼저 실프리스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 숙인 정령들을 일으켜 세웠다.

“으흠. 다들 주목해 주세요.”

실프리스의 나긋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지자 이내 모든 정령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정령왕들을 바라봤고, 실프리스는 그들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 갔다.

“사랑스러운 정령 여러분. 정령들의 아버지이자, 물의 정령왕이신 엘림 님. 그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요.”

실프리스는 짧은 인사말을 마친 뒤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뒤에 서 있던 엘림이 앞으로 걸어 나와 그녀의 말을 이었다.

“다들 오래간만이군.”

-엘림 님! 너무 멋져요!

-오늘도 눈매가 너무 멋있으세요!

엘림이 등장하자, 정숙하던 정령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엘림을 향한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 환호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르지만…….

항상 차가운 성격인 엘림의 표정은 그다지 썩 좋지 않았다.

“정숙해라.”

-흡!

-조용히 해! 쉿!

엘림의 차가우면서 매서운 말투는 시끌벅적하던 정령들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급격히 얼어붙어 조용해진 장내.

수많은 정령이 입을 꾹 다물고 나서야 엘림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너희들을 보고 지낸 지 벌써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구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날이었지. 부족한 정령왕이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에?

-엘림 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엘림이 사과를 하다니.

엘림은 물의 정령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 적이 없다.

그만큼 완벽한 존재이기도 했고 미안하다, 고맙다 같은 표현은 엘림 성격에 너무 낯간지러웠을 테니까.

정령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림을 바라봤고, 엘림은 그런 정령들의 시선을 피해 뒤를 돌아 실프리스를 불렀다.

“실프리스. 안 될 것 같다.”

“정말…… 마지막인데 그냥 한번 하시지 그래요?”

“부탁한다.”

엘림은 마치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처럼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뒤로 걸어 들어갔고, 그 대신 실프리스가 다시 걸어 나와 엘림의 말을 이었다.

“다들 당황하시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천하의 엘림 님이 사과라니, 평소라면 당치도 않으니까요.”

-실프리스 님. 엘림 님 어디 아파요?

-평소의 엘림 님과 달라…….

정령들은 평소와 달리 낯선 모습을 보이는 엘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음…… 아프지는 않지만, 슬픈 소식은 있네요.”

-슬픈 소식요?

실프리스의 ‘슬픈 소식’이라는 말을 들은 정령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 젓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슬픈 소식이 뭘까?

-어…… 아침밥을 조금밖에 못 드셨나?

-바보야! 그런 거일 리가 없잖아!

-그럼 뭔데?

-음…… 어젯밤에 나쁜 꿈을 꾸신 게 아닐까?

-바보야! 그거나! 그거나!

순식간에 광장을 가득 채운 수많은 정령의 목소리.

정령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목소리는 순식간에 장내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고, 실프리스의 온화한 목소리는 어느새 그 사이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끄러워…… 졌네요.”

하지만 실프리스는 그런 정령들에게 화를 내기보단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고,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이프리트가 못 봐 주겠다는 듯이 미간에 인상을 쓴 채 앞으로 나와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 안 다무냐!”

-헙!

이프리트의 거친 호통은 엘림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정령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엘림이 카리스마라면, 이프리트는 공포.

한순간에 정령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살살하시지.”

실프리스는 호통을 치고 제자리로 들어가는 이프리트에게 싱긋 미소를 보내고서는 조용해진 정령들을 향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여태까지 이 자리에 섰던 모든 정령왕들 중, 엘림. 그는 가장 특별한 정령왕이었습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 모두가 지금 평화 속에서 산다는 것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그런 그가 오늘부로…….”

그렇게 실프리스가 말을 이어 가던 그때, 그녀의 뒤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

그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엘림.

엘림이 천천히 걸어 나와 실프리스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고맙다. 실프리스. 하지만 역시 마지막은 내가 하는 게 맞을 것 같군.”

“후훗.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실프리스는 엘림에게 옅은 미소를 보내며 뒤로 물러섰고, 엘림이 다시 앞으로 나와 정령들의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후…….”

어딘가 긴장한 듯 보이는 엘림의 한숨.

엘림은 허공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이내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짧게 말하겠다. 나는 오늘부로 물의 정령왕의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다. 지금까지 잘 따라 주어 고마웠다.”

-에?

-히끅.

엘림의 충격적인 발언이 끝나자, 정령들은 하나같이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는 몇몇 어린 정령들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정령은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존재의 사퇴.

믿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겠지.

그렇게 엘림이 말을 끝마치자, 뒤에 서 있던 다른 정령왕들도 앞으로 걸어 나와 엘림의 말에 한마디씩을 거들기 시작했다.

“엘림. 그는 가장 위대한 정령왕이지만 그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다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맞아! 엘림 하나 없어도 이 이프리트 님이 계시잖냐!”

“……엘림. 잘 가라…….”

실프리스, 이프리트, 어스 순으로 엘림의 말에 한마디씩을 거든 뒤 이내 정령왕들은 짧은 손 인사와 함께 뒤돌아 무대 뒤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반 정령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알다시피 모든 이별은 슬프지만, 준비할 시간도 없이 헤어져야 하는 갑작스러운 이별은 보통보다 몇 배는 더 슬픈 법일 터.

몇몇 일반 정령들은 갑작스럽게 떠나가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엘림을 원망할 것이다.

그것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냉철함의 대명사 엘림이라도 이별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마치 신처럼 여기던 정령왕도 이별에는 서툴렀으니까.



* * *



뒤를 돌아 일반 정령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정령왕들은 푸른빛이 맴도는 광활한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했다.

꽤 오래 이어진 그들의 비행.

어깨가 조금씩 뻐근해지고 정령의 도시는 어느새 보이지 않을 때쯤 그들은 드디어 땅에 발을 디뎠다.

“여긴가.”

정령왕들이 발을 디딘 곳은 일반 정령들은 알지 못하는 외딴 공간인 보랏빛 나무가 우거진 숲.

바이올렛 포레스트(Violet Forest)에 도착했다.

평범한 정령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그 숲속 한가운데에는 언제 생겨난 지 모를 커다란 차원 문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고, 정령왕들은 조심스럽게 차원 문을 향해 느린 걸음을 옮겼다.

엘림을 제외한 세 정령왕은 차원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각자 나름대로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엘림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지을 뿐.

그리고 이내 망설임 없이 차원 문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잠깐!”

그렇게 아무 미련 없어 보이는 엘림이 차원 문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이프리트가 급하게 엘림을 붙잡아 세웠고, 애써 슬픈 얼굴을 숨기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엘림! 너 나중에 돌아올 거지! 너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강한지 승부가 안 났다고!”

“그래.”

이프리트가 엘림을 향해 인사를 건네자 평생 눈불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던 그의 눈가에 눈불이 맺히기 시작했다.

화륵…….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은 눈불.

이프리트는 그런 눈불을 삼키며 엘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마지막을 얘기했다.

“……그래야지. 잘 가라. 엘림.”


『눈불』


대다수의 정령은 슬프면 눈물을 흘리지만, 불의 정령 같은 경우에는 눈물 대신 불꽃이 방울지어 떨어지는 눈불을 흘린다.

(잘못 흘렸다가는 화재가 일어날 수도.)

그리고 이프리트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어스도 자기 나름대로 슬픔을 감춘 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엘림…… 그동안 즐거웠다…….”

그들은 슬픈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엘림은 충분히 그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이프리트는 얼굴에서부터 티가 나긴 했지만.

“저…… 엘림 님…….”

그렇게 이프리트와 어스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실프리스는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엘림을 불렀고, 이내 엘림은 실프리스의 눈물을 한 손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실프리스. 저 두 녀석까지 감당하려면 네가 이제 고생이 많겠구나. 물론 넌 충분히 강하지만, 항상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지는 마.”

“엘림 님…….”

실프리스는 엘림을 바라보며 그의 손길로 인해 두 볼을 적신 눈물을 소매로 스윽 닦아 내더니 이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엘림에게 건넸다.

“엘림 님을 처음 볼 때는 되게 귀여우셨는데……. 언젠간 또 볼 수 있는 걸까요?”

실프리스는 아직 못다 닦은 눈물과 함께 엘림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고,

엘림은 나지막이 실프리스가 전해 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건…….”

실프리스가 전해 준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평범해 보이는 목걸이.

그러나 목걸이에는 세상 그 어떠한 보석보다 푸른빛을 띠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이는 마치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정령왕들의 마지막 인사를 담은 것처럼 보였다.

엘림도 그걸 알아챈 것인지 받아든 목걸이를 한 손에 꽉 쥐었고 이내 다른 정령왕들을 향해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귀여웠다니. 농담이 심하군.”

…….

“간다.”

그렇게 엘림의 진정한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꽉 움켜잡으며 차원 문 속으로 느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특별한 정령왕은 정령계를 떠났다.

누군가는 엘림의 미소를 보며 ‘정령계를 떠나는 게 그렇게 좋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미소는 그가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더 슬픈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마 남은 세 명의 정령왕들은 평생 엘림의 미소를 잊지 못할 터.

그리고 엘림 역시 그들의 마지막 표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엘림은 정령계에 많은 걸 남긴 뒤 떠났고, 정령계는 슬픔을 삼키며 가장 소중한 것을 떠나보냈다.

고마웠습니다.

엘림님.



* * *



“여기는……?”

“일어나. 입학식부터 지각할 거야?”

아래층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의 방과 침대.

이 익숙한 것들은 그가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는 걸 단숨에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다.

역사상 가장 특별한 정령왕인 엘림.

그의 본래 정체는 한국의 평범한 10대 학생이었다.

“어지러워…….”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령왕 이었는데.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떠한 방식으로 정령계에 다녀왔는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정령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그저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꿈을 꾼 건가?”

그 역시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평범한 10대 소년이 정령계의 왕 자리를 맡다니.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소리일 테니까.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목걸이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이 아니라는 듯이 푸른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던 건가.”



* * *



나는 평범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밥은 안 굶고 세끼 전부 잘 챙겨 먹을 정도의 가정환경과 딱히 친구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은 학교생활.

차갑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모나지 않은 성격과, 눈매가 더럽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특별하지는 않은 외모.

나는 말 그대로 평범했다.

“강호! 오늘 우리 PC방 갈 건데? 너도 가실?”

“미안. 학원 때문에.”

“아냐, 그럴 줄 알았어. 내일 보자!”

평범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남들보다 몇 배로 빽빽한 스케줄이 있다는 것 정도?

나의 하루는 분 단위로 쪼개진 계획표로 이루어졌다.

몇 시 몇 분은 영어 학원.

또 몇 시 몇 분은 수학 학원.

내가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잠자리에 들 때뿐.

나는 그렇게 평범하지만, 숨 돌릴 틈 없는 일상을 보내며 살아왔다.

“피곤해 죽겠다.”

하루의 모든 스케줄을 끝마친 시간인 새벽 두 시 반. 지금 자도 앞으로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할 터라 나는 씻지도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해가 뜨면 평소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평범한 나의 일상은 사라지고 특별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 벌써 아침인가.”

분명 내가 잠이 든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내 앞에 눈을 감아도 눈이 부신 밝은 빛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 짜증 나…….”

나는 눈을 감고 밝아오는 아침을 피하고 싶었지만 빌어먹게도 밝은 빛은 눈을 감아도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결국, 밝은 빛에 못 이겨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나.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벽에 붙어 있는 전등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어디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벽을 더듬거려도 스위치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지.”

이상한 기분과 함께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번뜩 뜬 뒤, 헐레벌떡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여긴 어디지…….”

분명 나는 내 방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내가 깨어난 이곳은 척 보기에도 내 방 침대가 아니었다.

시원하게 탁 트여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초원과 그 중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맑고 투명한 강.

그리고 나는 그 초원에 흐르는 얕은 강 한가운데에서 깨어났다.

“아, 꿈이구나.”

철썩!

나는 스스로 내 뺨을 후려쳤다.

보통 이러면 꿈에서 깨는 법이니까.

하지만 내 볼은 빨갛게 부어오르며 욱신거리기만 할 뿐.

내 꿈을 깨우지 못했다.

“왜 안 깨는 거지.”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깐. 뭐지.”

분명 나는 물이 흐르고 있는 강에서 깨어났다.

물이 흐르고 있던 강 속에서 깨어났으면 당연히 몸이 젖어 있어야 할 터.

하지만 흐르는 물에 적셔진 나의 몸은 하나도 젖어 있지 않았다.

“뭔데 이거.”



* * *



“그래. 침착하자.”

나는 천천히 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다.

아까 전 강물에 나를 비춰 보았을 때의 모습 또한 원래 내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키는 170cm를 웃돌고 더러운 눈매에 그다지 건장하지 못한 체격인 원래의 나와 달리, 지금 강물에 비친 나는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고 또 건장한 체격에 얼굴까지 잘생겼다.

눈매는 조금 비슷하긴 한데.

…….

좋아해야 하는 건가.

“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계속해서 강물에 내 얼굴을 비춰 보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은은한 순풍이 부는 것같이 차분하고 감미로운 미성의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뒤를 돌아봤다.

“저…… 이번 대의 물의 정령왕님, 맞으신가요?”

“누구시죠?”

“네? 누구냐니요?”

서로가 서로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

이것이 나와 실프리스의 첫 만남이었다.

“정령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네? 분명 새 정령왕님이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앗, 맞으시네요. 새 정령왕님.”

“그게 무슨…….”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여자가 나보고 정령왕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미친년이네 하면서 지나갔을 게 분명하지만.

이런 걸 보면 일단 저 여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실프리스는 싱긋 웃으며 내 손을 가리켰고, 나는 의문과 경계를 가득 품은 얼굴로 내 양손을 내려다봤다.

“이게 뭐야…….”

내 양손 주위를 은은하게 감싸는 푸른색의 물방울들.

마치 누군가의 마법인 것처럼 그것들은 실프리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계속해서 내 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에게 실프리스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제가 정말 정령왕인 걸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상황을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실프리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내 손을 감싸고 있는 물방울들을 가리켰고, 난 그녀의 진실한 표정에서 일단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령왕이라니.”



* * *



“정신이 드세요?”

“네…… 뭐…….”

나는 조금씩 지금 이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정신을 차리자, 실프리스는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나를 어디론가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그녀가 미심쩍었지만, 우선은 실프리스의 뒤를 따라 한참 동안 광활한 초원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걸어도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푸른 초원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투명한 강뿐.

그렇게 내가 실프리스에게 ‘속았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녀는 내게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 도착이에요. 새 정령왕님.”

“여긴 어디죠.”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도시.

광활한 푸른 초원 끝자락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도시였다.

“우와…….”

“따라오세요.”

실프리스는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도시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 역시 그녀를 따라 도시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와! 오셨어!

-얼른! 준비해!

넓게 펼쳐진 도시 광장 속에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한눈에 봐도 수많은 정령들.

그들으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게 다 정령들인가.’

그리고 내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어린 하급 정령들이 나를 바라보고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달음에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새 정령왕님이다!

-우와! 정령왕님! 정령왕님!

-정령왕님! 안아 주세요!

“어…… 어?”

내가 어리둥절한 상태로 어린 정령들의 어리광을 한 몸에 받는 사이, 멋진 자태를 뽐내는 한 상급 정령이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차렷! 새로 강림하신 정령왕님께 고개 숙여 경례하라!”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날부터 정령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운명인 것처럼 순식간에 정령계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정령계에 흐르는 강물이 차가워질 때쯤, 난 완벽히 물의 정령왕 엘림이 되었다.


“나는 이번 대의 물의 정령왕. 엘림이라고 한다.”

정령왕이 등교했다


지은이 : 아리해

제작일 : 2020.12.09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심지은

표지 : 시월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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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7051-2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