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의 정령사가 되었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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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Prologue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태현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구석에 놓인 약상자를 뒤적거렸다.

얇고 알록달록한 약 상자 속에서 두통약을 찾아낸 그는 한 알을 꺼내 버쩍 마른 입안에 던져 넣고 마실 물을 찾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진하게 내린 커피뿐이다.

마지못해 다 식어 버린 커피를 약과 함께 삼켰다. 약발이 잘 안 드는 체질이었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며 눈두덩이 위를 손가락으로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두통으로 올라간 안압 때문에 눈알이 빠질 듯 아팠다.

재차 한숨을 쉬고 눈에서 손을 떼며 퀭한 두 눈으로 모니터 화면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1:56]

오늘도 역시 자정 전에 퇴근하긴 글렀다.

새벽 2시 전에는 퇴근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해도 집에는 갈 수 없다.

회사에서 집까지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출근 시간이 9시다. 게다가 내일은 8시 반까지 출근해서 오전 브리핑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물론 브리핑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인 팀장의 몫이었지만 회의 시작 전에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 놓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한태현은 다시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커피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르겠다. 물보다 커피를 배로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이 커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없는 생각에 혼자 헛웃음을 지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잠을 못 자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탕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충 컵을 닦고, 커피를 새로 내렸다.

뜨끈한 커피를 담은 컵을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그는 어두컴컴한 사무실 안에 유일하게 밝혀져 있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뜨거운 커피를 조금 마셨다.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데 인중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주룩 흘렀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인중을 훑었다. 코피였다.

“쯧…….”

미간을 찡그리며 휴지를 뽑아 코 밑을 막았다.

의자 헤드에 머리를 댄 채 잠시 기다렸지만, 코피는 멎을 줄을 몰랐다.

잠시 휴지를 뗐을 뿐인데, 마치 수도꼭지가 덜 잠긴 것처럼 주룩 흘러내렸다.

빌어먹게도, 흰 드레스 셔츠 위로 피가 떨어졌다.

“아!”

짜증 섞인 비명을 지르며, 그는 재빨리 휴지를 더 뽑아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던 와중에 내일 브리핑 때 쓰기 위해 뽑아 놓은 자료 위로 손에 묻었던 피가 약간 튀었다.

“젠장!”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욕지거리를 뱉으며 종이에 튄 피를 닦으려다 멈칫했다.

일단은 이 코피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했다. 그는 곧장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피에 젖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손과 코 그리고 입 주변을 닦아 냈다.

다시 코를 막자, 피가 얼마나 나는지 목구멍 뒤로 넘어오기까지 했다. 녹슨 쇠를 입에 넣은 것처럼 비릿한 피 맛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몸이 안 좋기는 안 좋구나.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190에 가까운 큰 키와 체격이 무색할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딱 맞던 드레스 셔츠도 헐렁하게 품이 남았다. 바지는 허리띠를 하지 않으면 아래로 주룩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린 위장병 때문에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다. 몸무게를 재 본 지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하다.

두 눈은 퀭했고,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병자가 따로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눈싸움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코피가 멎었다. 더러워진 휴지를 버리고, 얼굴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아 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시야가 검게 물드는 걸 느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몸이 기울어진다는 걸 느꼈을 때, 쿵 소리가 났다.

한태현은 자신이 쓰러졌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쿵, 쿵, 울려 대고 숨을 쉬는 자신의 호흡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잠시 후, 검게 물들었던 시야가 잠시 돌아왔다.

사무실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쓰러졌을 때 프린트해 놓은 서류를 건드렸는지, 바닥엔 검은 글자들이 박힌 흰 종이가 마구 흩어져 있었다.

저걸 주워 다시 분류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머릿속으론 생각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느리게 꺼져 가는 불씨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 졸렸다.

시야가 다시 암전됐다.

느리게 꺼져 가는 불씨처럼 그의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졌다.



* * *



누군가 한태현의 몸을 흔들었다.

그 덕에 그의 의식이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좀 더 자게 해 줘.’

그는 속으로 애원했다.

애석하게도 상대는 그의 속마음을 듣지 못한 채 더욱 격하게 흔들어 댔다.

“……! ……님!”

한태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는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한태현은 자신이 야근 중에 쓰러졌음을 떠올렸다. 아마 자신을 깨우는 이는 늘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옆 부서의 임 대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부지런하네, 임 형은.’

어지간히 놀라게 한 것 같아 좀 미안해졌다.

그보다 정신이 들면서부터 뒤통수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이건 두통과 다른 물리적인 통증이었다.

쓰러질 때 어디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기억은 없는데.

아픈 건 머리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마치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다.

공기에서는 녹슨 철을 녹여 디퓨저로 만든 것 같은 역겨운 피비린내가 났다.

짐승에게서나 날 법한 꾸릿꾸릿한 냄새도 함께였다. 숨이 막혀 입을 벌렸다. 숨을 들이켜자 입안으로 흙이 들어와 사레에 걸렸다.

“콜록, 콜록!”

“헉! 주인님, 정신이 드세요?!”

기침을 하자 머리가 울렸다. 근데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뭔가 이상하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많이 다치셨어요?”

주인님?

1. 이세계의 정령사 (1)



한태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지러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눈썹 윗부분이 박살 난 시체였다.

눈알 하나도 툭 튀어나와 안와골 속 붉은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헉―!”

그는 기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자신의 앞에 있는 누군가를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들이받았다.

“아!”

“윽!”

상대는 이마를, 한태현은 부딪힌 코를 부여잡으며 다시 벌러덩 드러누웠다. 부러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말 아팠다.

“주, 주인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당황한 목소리로 소년이 말했다.

한태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눈앞에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는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검은색 싸구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두 눈구멍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가면이 미처 가리지 못한 얼굴의 일부분은 화상으로 살이 녹아 흉이 져 있었다.

‘얜 뭐야?’

고작 열둘 혹은 열셋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한태현은 주위를 홱홱 돌아봤다.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놀란 나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까지 거칠었다.

‘방금까지 사무실에 있었는데, 이게 대체?’

주위를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의 주변에만 시체가 족히 스무 구는 넘어 보였다. 바로 머리맡에도 시체가 있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그 시체의 배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발아래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가 등이 찢긴 채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늑대 형상을 한 괴물의 시체도 바로 근처에서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 혀를 내밀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자연히 그 괴물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스테리어의 늑대.’

잿빛 털에 네 개의 붉은 눈과 세 개의 뿔이 달린 마수였다.

마수의 이름을 기억해 내자 다른 기억들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동시에 깨달았다.

‘나 죽었구나.’

‘한태현’이 죽었음을. 그것도 과로사로.

머리에 뭔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으니 뇌출혈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2주 뒤에 퇴사였는데.’

그리고 억울해졌다.

‘그동안 내가 모은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되긴 다 잃은 거지. 망했네.

한태현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자 뭔지 모를 끈적한 체액이 손에 묻어났다.

마수의 침일지도 모르겠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소년이 답했다.

“마수가 주인님이 서 계시던 마차를 들이받았어요! 주인님은 미처 못 보고 그대로 떨어지셨고요. 하마터면 진짜로 큰일 날 뻔했어요! 캄베른의 부단장님이 아니었으면 주인님은 마수한테 물어뜯기셨을지도 몰라요.”

흥분한 소년은 막 큰 소리로 말하다 끝에 가선 침울하게 말끝을 흐렸다.

소년의 시선은 한태현의 발아래에 있는 시체에 닿아 있었다. 그 시체가 캄베른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혼란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차츰 가라앉았으니까.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양쪽 볼을 부풀리며 크게 내쉬었다.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헤이 스타일스, 서른 살.

이 땅, 동대륙의 체아펠 왕국 출신의 용병으로서 이 나라, 저 나라 들락거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정령사였다.

‘용병. 그래, 일하는 중이었지.’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소년이 말한 마차가 반파된 채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저 마차 위에 서서 정령 마법을 쓰며 습격해 온 마수들에게 대항해 싸우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막 늑대 한 마리를 <흙의 창>으로 수십 개의 구멍을 내주던 순간이었다.

‘주인님, 뒤에!’

소년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 반사적으로 <흙의 방패>를 등 뒤에 펼쳤는데 마수가 마차를 그대로 들이받았었다.

머리가 아픈 건 아마도 튕겨 나가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안 죽은 게 용했다.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다.

“네 덕에 살았구나.”

헤이는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칭찬을 받은 소년은 시선을 내리깔고 안절부절못하며 괜스레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제, 제가 뭘요.”

소년의 이름은 렌키. 나이는 열두 살.

석 달 전에 도시 메지튼의 노예 시장에서 사 온 어린 노예였다.

헤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뒀다.

‘노예.’

새삼 그것이 대단히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동대륙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노예’이고,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데. 아무래도 ‘한태현’이 가진 기억과 자아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머리 박고 저승사자랑 키스라도 했나? 왜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건데?’

전생의 기억이라기엔 과로로 쓰러졌던 게 방금 일어난 일처럼 아주 생생했다.

게다가 지금도 자신은 ‘한태현’으로서 존재했고, ‘헤이 스타일스’의 자아는 오히려 침잠해 있었다.

아니, 둘의 자아가 융화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쪽으론 비위가 약한 ‘한태현’이 선혈이 낭자한 참상을 보고도 태연할 리가 없으니까.

적어도 기절하거나 공황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조금 놀랐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주인님?”

멍하니 있었던 탓인가, 렌키가 의아해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자꾸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불안해 보였다.

갑자기 떠오른 전생의 기억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헤이는 웃었다. 어린애잖아.

“넌 어때? 다치지 않았어?”

“전 괜찮습니다. 주인님이 만들어 주신 참호에 숨어 있던 덕에요. 아, 그리고 이거.”

렌키는 바닥에 놓여 있던 지팡이 하나를 건넸다. 정령의 힘이 깃든 하얀 오크 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헤이의 물건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받아 들며 렌키의 몸을 살폈다. 흙먼지가 묻은 것 빼고는 전혀 이상 없어 보였다.

“그래, 다친 데는 없어 보이네.”

“네, 전 정말 괜찮아요.”

렌키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이 와중에 웃을 수 있다니 이 녀석도 어지간히 강심장이구나, 싶었다.

“스타일스.”

그때 한 용병이 다가왔다.

메지튼에서부터 시작된 이 여정에서 상단의 호위를 맡은 캄베른 용병단 소속의 남자였다.

솔로로 활동하는 헤이를 제외하면 지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상단이나 용병단 소속이었다.

“귀중한 정령사께서 뒈져 버렸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살아 있다니 참 다행이야?”

“그쪽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는 매사에 빈정대는 화법을 구사했기에 헤이는 익숙한 듯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용병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단장님과 상단주가 자네를 찾아. 얼른 가 봐. 거기 노예 꼬맹이 좀 빌려도 되나? 일손이 부족해서 시체 치우는 일이나 거들었으면 좋겠는데?”

용병이 렌키를 향해 턱짓하며 말하자, 렌키는 헤이를 빤히 쳐다봤다.

이세계의 정령사가 되었다


지은이 : 심예준

제작일 : 2020.01.07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가영

표지 :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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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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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449-68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