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평기사가 되었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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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 악플을 썼더니 소설 속으로 빙의한 건에 대하여



내 유일한 취미는 퇴근 후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그날도 야근을 마치고 맥주 캔 하나를 땄다.

그리곤 최근 재밌게 보고 있던 웹 소설을 읽었다.

“아니, 이 작가 미친 거 아니야?”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작가가 슬럼프에 빠졌나 보다.

요새 올라온 연재분의 내용이 심각하게 막장이다.

“이럴 거면 휴재를 하든가. 잘 만든 작품을 이따위로 망치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판타지 소설은 ‘반역의 아르미다츠’라는 제목이다.

반란으로 몰락한 왕실의 왕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반란을 일으킨 가문의 히로인들을 이용해 복수를 한다.

궁극적 목표는 왕실의 재건이다. 하렘물이 제법 섞인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스케일이 커지더니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결국 오늘 마지막 히로인까지 죽었군.’

이 소설은 주인공 못지않게 세 명의 히로인이 중요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세 명의 히로인이 뜬금없이 연달아 죽어 버린 것이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전부터 좀 무너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와, 완결?!”

심지어 이렇게 해 놓고서 오늘 자로 급하게 완결을 때려 버렸다.

“차라리 휴재를 때려!!”

이건 무기한 연중보다 못한 완결이다.

“댓글도 난리가 아니구만.”

아니나 다를까, 댓글 창에도 작가를 향한 온갖 욕설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나 또한 댓글에 달린 욕들에 심히 공감했다.

여기까지 220화. 초반에는 제법 취향에 맞아 재밌게 읽었다. 중후반부턴 좀 무너지는 거 같았지만 정들어서 하차하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 이런 식으로 독자의 애정을 배신한 작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스마트폰 액정을 꾹꾹 누르며 작가를 욕하는 댓글 무리에 합류했다.


[글 이따위로 쓰지 마라, 작가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치고서 글 좀 써라!

개연성 1도 없이 갑자기 쟤들은 왜 죽이는데?

심지어 여기서 왜 완결을 치는데?

내가 다신 네놈 작품 보나 봐라!]


220화까지 오는 데 쓴 돈이야 기껏해야 치킨 한 마리 값 정도다.

하지만 유독 아깝게 느껴졌다.

“참나, 모처럼 괜찮은 소설 건지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네.”

악플을 남기고 나니 허무해졌다.

나는 야근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럼 ×발, 네가 써 보든가ㅗㅗ 히로인 걔들 잘 구원해서~ 해피하게 엔딩 내 봐라~ 못하면 넌 영원히 머머리다!!]


의식을 잃기 직전, 머릿속에 이상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 * *



“……기사님, 기사님! 아이참, 기사님!! 일어나십시오!”

아까부터 누군가가 날 깨우는 소리에 의식을 찾은 나는, 목소리보다는 입 냄새로 추정되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누구?”

“아직 술이 덜 깨신 겁니까? 술이야 이동하면서 깨면 되니까 어서 가십시오, 기사님! 치안대장님이 찾으십니다.”

“어어?” 하면서 누런 이가 인상적인 병사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걸었다.

처음엔 ‘꿈속의 꿈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저 병사의 입 냄새도 그렇고.

퍽.

“아얏!”

“통로 보수 공사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조심하세요.”

걷다가 통로에 튀어나온 돌에 어깨를 맞으니 고통이 느껴졌다.

‘끄응, 확실히 꿈은 아니군.’

악취와 고통까지 느껴지니

어찌어찌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몰래카메라? 아니다. 꿈도 아니다. 정신 질환? 그것도 아니야.’

건물 복도를 지나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눈앞의 연병장을 비추는 눈부신 햇빛에 눈을 찡그렸고.

‘크윽!’

이와 동시에 작은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곤 머릿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제법 익숙한 세계의 기억이기도 하겠다.

‘어젯밤에 읽던 소설 속으로 빙의를 했다고?!’

문득 잠들기 전에 머릿속에 전해진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럼 네가 한번 구원해 봐. 불쌍한 그들의 이야기를.

살짝 기억이 수정된 느낌이다.

―실패하면 영원히 ■■■다!

원래는 무시무시한 협박과 비속어도 있었던 거 같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모면하자!’

내가 빙의한 이 엑스트라의 기억 중 신상에 대한 정보 일부를 파악했다.

나는 곧장 어색하지 않게 입을 열 수 있었다.

“기사 로니아드 칸브라만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치안대장님.”

겉모습은 평소와 다름없게, 속으론 식은땀을 흘리면서.

빙의한 몸의 기억을 훑어보는 데 주력했다.

“로니아드 경, 자네…….”

“예, 치안대장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에 용기를 냈다.

나는 최대한 밝고 나이스하게 치안대장을 대했다.

“자네, 바본가?”

“네?”

“아무리 기사에게 학식이 크게 중요치 않다고 하지만, 자네가 이번에 쓴 보고서, 이건 도대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치안대장의 말에 나는 재빠르게 이 몸의 기억을 되새겨 봤다.

‘아아.’

마침내 떠오른 원래 몸의 주인이 썼던 보고서의 내용.

‘병사들과 술 마시면서 만취 상태로 대충 휘갈겨 쓴 거라고 말하면 더 혼나려나?’

이 로니아드라는 기사의 인생도 참으로 막장인 듯 싶었으나.

‘원작 소설에 이런 인물이 있던가?’

곧이어 로니아드의 기억 중에 예사롭지 않은 기억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오기 시작했다.

“하물며! 자네는 검술 실력도 어중간하잖아?! 학식도 낮아, 검술 실력도 낮아, 이쯤 되면 고참 병사가 자네보다 더 쓸 만하겠어!”

치안대장은 딴생각에 빠진 로니아드를 앞에 두고 온갖 폭언을 하고 있었다.

“자네!!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예? 예! 듣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써서 올리겠습니다.”

빙의 현상 때문에 사실상 폭언의 데미지가 0이다.

나는 치안대장에게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올려 경례를 했다.

‘저 새끼는 명예도 없나?’

일반적인 기사라면 일반 병사와 비교하면서 모욕을 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로니아드라는 하급 평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하긴, 요즘 세상에 기사도는 무슨.’

치안대장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로니아드에게 말했다.

“한 시간 내로 다시 써 오게. 만약 이번에도 보고서가 실망스러우면, 난 공작성에 자네의 기사 직위 해제를 진지하게 건의하겠네.”

“네.”

기사 퇴출이라는 초강력 위협을 던졌음에도 로니아드의 반응이 덤덤하다.

치안대장은 이내 이해하길 포기하고는 파리 쫓듯이 그를 내보냈다.

‘보고서라.’

기억을 더듬어서 종이와 펜이 있는 하급 기사들의 공용 집무실을 찾았다.

나는 곧장 앉아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종이와 잉크 사용료로 20쿠퍼 되겠습니다.”

“…….”

그 전에 이곳을 관리하는 병사에게 동화를 지불하고서 말이다.

“이 정도면 되려나?”

보고서를 쓰는 것은 아주 쉬웠다.

일단 빙의한 몸이 글 정도는 확실히 아니 일자무식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세계의 시대는 그렇게 발전한 때가 아니다.

마법의 여명으로 중세에서 이제 막 벗어난 세계다.

심지어 학식과는 거리가 먼 기사라는 집단이다 보니, 보고서는 알아만 볼 수 있었으면 되었다.

지구에서 내 직업은 회사원이었다. 사무직, 화이트칼라.

제법 이름 있는 중견 기업의 중간 관리자였다.

‘야근으로 단련된 화이트칼라의 보고서 실력을 보여 주지.’

지금 내가 빙의한 로니아드의 행정 업무 능력은 아마 이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 최강일 것이다.

이곳의 일반적인 보고서는 대충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됐다’라는 추상적인 형식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는 것은 21세기 지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보고서 틀이다.

육하원칙과 숫자로 뒷받침된 자료 첨부와 분명한 책임 소재, 그리고 대처 방안까지 제시한 보고서다.

“우와…… 기사님, 제가 글은 못 읽지만, 지금 기사님이 글 쓰시는 것을 보니 마치 사제님들이 글 쓰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관리하는 병사가 내가 쓴 보고서를 보면서 감탄했다.

나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다시 연병장으로 나갔다.

“응?! 벌써 썼나? 제대로 쓰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보고서를 다시 쓰러 들어간 지 15분 만에 나오자, 치안대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다 썼습니다.”

하지만 나는 치안대장에게 노빠꾸로 방금 쓴 보고서를 제출했다.

‘굳이 구두로 보고해도 될 법한 문제인데, 여기 치안대장은 융통성이 없군.’

내가 쓴 보고서를 치안대장은 시큰둥하게 받아 든다.

그리고 보고서를 읽은 지 몇 초도 안 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거, 자네가 쓴 게 맞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대필을 해 주기에는 15분은 너무 짧습니다, 치안대장님.”

내 말에 치안대장은 의심이 해소됐다기보다는 오히려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잘 쓸 수 있었으면서 처음 제출한 보고서는 왜 그따위로 쓴 거야?! 날 가지고 놀아?! 엉?! 내가 이번에 새로 부임했다고 이것들이 간을 본다 이거지?!”

“절대 아닙니다! 그게, 처음 제출한 보고서는 어제 만취 상태에서 급히 쓰던 거라서…….”

“그게 그거잖아! 나가, 이 새끼야!!”

오히려 연병장에서 나를 쫓아냈다.

소설 속 평기사가 되었다


지은이 : E급작가

제작일 : 2021.01.26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심지은

표지 : G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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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59-13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