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해보니 흑마법사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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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1화. 검보랏빛 엔딩



드래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드래곤은 무엇일까.

강력하고 호전적이라는 레드 일족? 가장 많은 로드를 배출했다는 현명한 골드 일족? 아니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힘은 가장 강력하다는 에이션트?

모두 아니다. 뭐, 위 예시들이 틀렸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직접 겪은 바로는, 창조주인 신의 의지 하에 에덴을 조율하는 그들이 그 숙명을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든, 얼마나 나이를 많이 처먹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이라 불리는 절대적인 존재의 의지를 벗어난 것부터가 어지간히 강력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 * *



콰콰쾅!

“제기랄! 민간인들 빨리 치워!”

아비규환.

아니, 그 이상의 이 상황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키라라락!

“꺄악!”

“어, 엄마!”

수천의 인파 사이에서 보라색의 덩치들이 회전하자 붉은 토마토가 터지듯 핏물이 튀어 오른다.

악에 받친 병사들이 핏물의 원인을 막아보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키락?

“후작님!”

이미 사방이 피범벅이 된 그곳으로 백색의 갑주가 뛰어든다. 그는 전방의 덩치를 찌르고 보라색 도마뱀의 대가리를 썰어냈다.

그 뒤로 이미 터져버린 민간인의 핏자국을 하얗게 물들이는 파도가 밀려왔다.

“성검의 주인이 오셨다!”

“화이트 베인이다! 복수! 복수의 시간이다!”

현 성검의 주인인 라헤스 후작과 라헤스 후작가가 자랑하는 성(聖)기사단 화이트 베인이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창과 칼은 물론 정규 마법사로 분류되는 3서클의 마법에도 꿈적하지 않던 놈들이 백색의 파도 앞에 거짓말처럼 쓰러졌다.

이미 도시의 외벽은 함락당했지만, 어째서인지 놈들은 성벽을 넘지 못했다. 그저 뚫린 성문으로만 멍청하게 쏟아져 나올 뿐.

사기는 끝없이 치솟았고 도시의 중심부까지 밀렸던 전선은 50여 명에 불과한 성기사단의 합류로 순식간에 성문까지 밀고 나갔다.

‘좋지 않아.’

다 찢어진 갈색 로브. 검게 그을린 로브는 며칠을 흘린 땀과 전장의 열기로 쉰내가 풀풀 났다.

“밀어붙여라! 용사의 뒤를 따라라!”

와아아아아!

수천의 사람이 한마음으로 환호한다.

이 많은 사람이 똑같은 마음을 가지는 건, 실제 인류의 역사를 털어보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로브의 남자는 아니었다.

‘개새끼들.’

진작 합류를 하지 않고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을까.

놈들이 들이닥쳤을 때, 아니, 어쩌면 전투의 시작 전부터 이러한 생각을 모든 사람이 했을 것이다.

이젠 아니겠지만.

로브의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무서웠겠지. 또다시 들 수 없을까 봐.’

성검 아칼론.

그것은 본래 친구였던 강민혁의 것이다. 정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착하고 그 누구보다도 밝았던 녀석.

‘동시에 멍청할 정도로 정의만 추구하던 녀석.’

이 더러운 에덴에서 그런 마음가짐으론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 실제로도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지 않았나.

홍시우는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이를 악문 채 로브를 감아쥐었다.

10년이 다 되어 간다. 아니, 넘었나?

이 빌어먹을 신세가 된 이후부턴 날짜를 셀 여유도 없었다. 개돼지나 마찬가지인 가축에게 날짜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 열어 그들을 태우니. 플레임 그라운드(Flame ground)!”

성문과 그 뒤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오른다. 명색의 5서클의 화염계인 만큼 그 공격력 하나는 확실했다.

‘병신 새끼!’

끓어오르는 분노를 육성으로 내뱉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소리는 병신 같은 괴음뿐이다. 혀와 성대가 잘린 그에겐 정상적인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마나 배터리의 인생이 그렇다.

뛰어나고 마음 여린 고용주(라 부르고 주인이라 쓴다.)를 만난다면 마나 흡수의 고통도 덜하고, 적어도 애완동물 정도의 취급은 받겠지만, 시우의 고용주는 그렇지 않았다.

이 무능한 늙은이는 60년이란 인생을 마법에 처박아 넣고도 5서클의 마법을 하나밖에 쓸 줄 모르는 그야말로 병신 중 상병신이었다.

같은 마법사들에게도 반쪽짜리 5서클로 놀림 받던 늙은이는 그래도 마법사라고 이렇게 마나 배터리를 줄줄 달고 안전한 후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저래선!’

화이트 베인이 아무리 가장 강력한 기사단이라 해도 이젠 50밖에 남지 않은 소수 정예다.

물론 앞선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인 만큼 정예 중 정예겠지만, 그래도 인간이다.

저 역겨운 드라칸보다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멍청한 늙은이는 4서클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5서클 마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성문을 탈환할 수 있었던 화이트 베인은 불길에 가로막힌 채 넘어오는 드라칸만 상대하고 있었다.

뭐라도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현재 마법사는 그를 포함에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심지어 5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그중에서도 절반.

즉 이딴 개 짓거리를 함에도 그 누구도 그에게 입을 열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마나를 회복하던 마법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스륵.

‘그래. 너밖에 없구나, 로로야.’

쉰내가 풀풀 나는 로브 안에서 시원한 감촉이 목을 휘감는다.

앞섬을 슬쩍 든 시우는 목을 감싼 백색의 비늘들을 확인하며 숨을 골랐다. 마음이 좀 진정되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늘 이런 식이다.

몇 년 전쯤이었을까.

동기들이 몇 십 년간 자신을 무시한 것에 화가 찼던 놈은 마침 옆에 있던 마나 배터리들에게 화풀이했고 혈기왕성했던 젊은 배터리 하나가 반기를 들었다.

‘그 나이 먹고도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꽤나 묵직한 팩트라고 생각했지만, 늙은이에겐 9서클 대마법급이었나 보다. 그 후로 놈은 당시 마나 배터리들을 고용이 아닌 구매로 바꾸곤 모조리 혀와 성대를 잘라버렸다.

그 상실감에 여자 하나와 어린 남자아이는 자살을 시도했고 성공적으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시우 역시 그것을 목표로 하던 중 이 아이를 만났다.

마치 백호를 뱀의 형상으로 만들면 이러할까. 백색의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지닌 녀석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위험한 독사로 보였다.

하지만 시우에겐 더없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녀석은 신기하게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호감을 표했다. 영물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녀석의 위로 덕에 여기까지 버텨왔다.

어렸을 적, 공룡을 그렇게도 좋아했었다. 멋있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이를 먹고 안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파충류를 좋아했던 거였다.

쿠앙!!

이제는 아니지만.

“저, 접근을 막아!”

“가드! 가드는 어디에!”

망할 늙은이가 서 있던 자리 뒤에서 격렬한 파장과 소란이 일어났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푸아악!

“끄아악!”

“커헉!”

비명과 소란은 점점 커져 갔다. 난 정문 쪽을 바라봤다.

압도적인 무위를 펼치던 화이트 베인은 어느새 수세에 몰려있었다. 그렇다면 내 뒤에 일어난 난리는 뻔하다.

‘드라칸!’

용제의 주력 병력으로 뽑히는 드라칸. 오거에 준하는 몸집과 힘을 가지고 있는 용족 몬스터.

시우는 뒤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앞으로 몸을 던지며 군데군데가 좀 쓰라린 것 같았지만, 급박한 상황 덕분인지 크게 아프진 않았다.

크라악!

정면도, 옆도 보랏빛 덩치들이 들이닥친다.

광기에 서린 놈들의 눈동자와 줄줄 흐르는 침은 마주한 병사들의 공포를 자아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후방에 있던 마법 병단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가드들의 도움과 마나 배터리들의 목숨으로 몇몇 마법사는 살아남겠지만, 그래서 봤자 몇 분이나 더 살 수 있을까.

절망적인 상황에 벽을 기대던 시우는 묘한 끌어당김에 고개를 돌렸다.

‘로로?’

어느새 로브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은 휘감은 내 목을 놓지 않은 채 골목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시우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골목으로 달렸다.

좁은 골목인 만큼 드라칸을 만났다간 그대로 찢겨나가겠지만, 얌전하던 녀석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사실 이거라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물의 생존 본능은 인간과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얼마쯤 뛰었을까. 무너진 붉은 벽돌의 건물이 보였다.

저 사이로 가라는 건가. 난 로로가 당기는 방향으로 잔해를 비집고 들어갔다.

파묻혀 죽으라는 생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이내 드러나는 공터에 들뜬 마음으로 움직였다.

‘여긴?’

앞서 무너진 건물과 별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곳곳이 무너지고 돌담이나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박살 나 있는 곳. 시우는 목의 허전함을 느끼며 재빨리 바닥을 쫓았다.

스륵.

이 난리 통에도 녀석의 움직임이 우아하다고 느낀다면 정말 미친 걸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던 시우는 이내 로로가 휘감는 석상에 눈이 갔다.

‘뭐지?’

녀석은 석상을 휘감은 채 꼭대기에 머리를 척 걸치곤 시우를 바라봤다. 이끌리듯 다가간 그는 이곳저곳 부서진 석상을 만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감을 잡지 못하겠지만, 시우는 정확히 이것의 형태를 알 수 있었다.

‘뱀.’

뒤로 부서진 거대한 돌조각들을 보아 날개 달린 뱀의 석상이었음이 분명했다. 로로가 어떻게 이곳을 안 걸까.

중립 지역인 이 도시 라헤스에 처음 진입했을 땐 로로를 만나기 전이었다. 한낱 뱀인 녀석이 이곳에 와봤을 리는 없고.

‘그렇다는 건, 신상 같은 건가? 하지만 뱀의 신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중립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 아카데미에서 어지간한 배경지식은 다 배운다.

특히 마법사 지망이었던 시우는 그 지루한 강의를 다른 직업들보다 더 많이 들어야 했다.

콰아아아아앙!

순간 어마어마한 폭음이 귀에 이명을 만들었다.

폭음에 걸맞은 진동이 함께 바닥을 내달렸고 시우는 석상을 끌어안은 채 한동안 몸을 웅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은 가라앉았고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만졌다.

‘바람?’

석상을 안고 있던 팔을 푼 시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잔해 속이다.

그런데 서늘한 바람이 로브가 펄럭일 정도로 불어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을 싸늘하게 만드는 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성검 아칼론은 마를 벨 때 특유의 소리를 낸다. 그래 마치 영화 속 광선 검처럼.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비명은커녕 짜증 나는 드라칸의 하울링도 들리지 않는다.

시우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보랏빛의 ‘무언가’였다.

특별한 드라칸인 줄 알았던 그것은 점점 고개를 들어 올릴수록 틀렸다는 걸 알려주었다.

검보라색의 거대한 드래곤.

하나 이제껏 겪은 드래곤과는 달리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려 온전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여태 느껴본 위압감 중 가장 강력하다 못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정도라는 것과 ‘저것’으로 인해 곧 내가 죽는다는 것.

놈이 아가리를 쩍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 *



“으아악!”

튀어 오르듯 일어난 시우는 한동안 몸을 떨었다.

따스한 햇볕이 방안을 가득 채움에도 사시나무 떨리듯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이 떨림은 추위 때문이 아니다.

공포. 죽음을 눈앞에 둔 생명의 당연한 감정이었다.

“여긴 내 방? 기억이……. 기억이 난다고?”

그리고 밀려드는 당혹감.

에덴에서의 죽음 후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그의 움직임은 순간 뚝 하고 멈췄다.

조심스레, 갓난아기를 만지듯 아주 조심스레 목을 휘감았다.

“나……. 마, 말이.”

회귀해보니 흑마법사


지은이 : 에르히

제작일 : 2020.01.02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주희

표지 : 고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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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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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449-59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