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1장. 귀환하다
“폐하, 폐하! 어찌 이리도 일찍 곁을 떠나신단 말입니까!”
“아직은 이르옵니다. 폐하, 부족한 저희들을 두고 이렇게 가시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어서 눈을 뜨시어, 못난 저희들의 눈물을 꾸짖어 주십시오!”
흑흑흑!
황후, 황태자, 신하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퍼하는 목소리가 돌려온다.
“…….”
하지만 강인한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귀환을 준비 중이었다.
이번 삶에서도 목적은 달성했다.
만렙.
배울 거 다 배우고, 깨우칠 거 다 깨우친 마당에 이 삶에 딱히 미련은 없었다.
또한 천수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소중했던 추억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된 삶에 감정이 무뎌진 탓인지, 충분히 이곳을 떠날 정도의 마음가짐은 됐다.
아쉽지만,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자신이 없더라도 남은 사람들은 잘살아갈 것이다.
[사용자에게 최고 레벨 달성 보상을 지급합니다.]
그때, 시스템이 강인한에게 안내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신에게만 보이는 별도의 창들은 눈을 감아도 보이고 느껴진다.
사용자.
시스템에 연결돼 있는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최고 레벨 달성 보상 획득]
[현생(現生)의 모든 기억과 노하우를 습득합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종료됩니다.]
[다음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30분간 아무 삶도 선택하지 않을 시, 임의로 다음 삶이 지정됩니다.]
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개의 삶이 표시됐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다양했다.
[프록시스 행성, 대전사 마도르크의 삶]
[이로디아 대륙, 오른 자작가의 소공자 반스의 삶]
[소행성 무이카, 차원 개척자 클라즈의 삶]
[…….]
이런 삶들이 스크롤 한가득 있었다.
강인한은 이런 식으로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이번 삶은 지프리트 제국의 황제 테오르그 3세였고, 지난번엔 천년 마교 중흥기의 방점을 찍은 교주 강희명의 삶을 살았다.
그 전에는 오크 족의 대전사 굴라, 그 전전에는 다크 엘프 종족의 대사제 비트리안의 삶…… 등등등. 나열하기엔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만렙을 달성하면, 저런 식으로 메시지가 출력됐다.
만렙이 삶의 끝인 셈.
그렇게 최고 레벨 달성 보상을 받고 나면, 모든 기억을 가진 채 다음 삶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무한 반복이다.
만렙을 달성하지 못하고 죽을 경우에는 해당 삶의 기억이 모두 리셋 된 채, 다음 삶으로 넘어간다.
유일하게 삶의 반복을 막는 방법은 한 가지. 그가 원래 살던 세계, 지구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의 강인한은 항상 도전을 즐겼다.
그리고 늘 이런 식으로 삶을 정리하고, 다음을 준비해 왔다.
그렇게 반복한 삶의 합계가 약 1,000년.
이제는 충분했다.
‘돌아갈까.’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원래 살던 지구로 돌아갈까 하고.
자신을 기준으로 세월은 1,000년이 흘렀지만, 원래 살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한결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가난한 집안 살림에 고생만 하신 어머니, 그리고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평불만 한 번 안 하고 잘 자라 준 여동생까지.
항상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삶 속의 가족과 혈육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줘도, 늘 강인한의 마음 어딘가에는 공허함이 있었다.
마치…… 지구에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의 감정들은 게임 속의 NPC로부터 받는 그런 감정 같았달까.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염세(厭世)에 빠지면서 지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그래, 돌아가자.’
딱히 다른 삶에 미련은 없었다.
경험은 충분히 쌓았다.
이 정도면 지구에 돌아가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강인한은 스크롤을 쭉 내렸다.
그리고 맨아래, 나열된 다른 삶들과는 달리 붉은 테가 둘러져 있는 삶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구, 강인한의 삶]
[*해당 삶은 사용자가 살던 본래의 삶입니다. 리셋이나 다음 삶으로의 도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경고 문구가 적혀 있는 삶이다.
지금까진 눈길 한 번 안 줬는데, 지금은 글자 하나하나가 알알이 눈에 박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있군.’
강인한은 시야 여기저기에 위치해 있는 수많은 창들을 보며 떠올렸다.
귀환하는 순간.
자신은 각성자가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레벨 시스템이 따라오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만 시기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어디에서 멈춘 뒤, 지금과 같은 삶의 반복으로 이어졌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죽어 있지만 않으면 돼.’
죽어 가는 몸이어도 살릴 자신이 있다.
그만한 경험과 노하우가 있으니까.
정말, 말 그대로 죽은 시체인 상태만 아니면 된다.
‘가자.’
강인한은 본래의 삶을 선택했다.
이제 삶의 무한 루프는 끝났다.
돌아간다.
늘 잊지 않고 있었던 자신의 고향으로.
[지구, 강인한의 삶이 선택됐습니다.]
[본래의 삶으로 귀환하는 사용자의 마지막 삶이 됩니다.]
[테오르그의 삶, 현생을 종료합니다.]
[종료 5초 전]
카운트가 시작됐다.
강인한은 더욱 질끈 눈을 감았다.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현생의 몸이 가지고 있던 생명의 불씨가 빠르게 꺼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익숙한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
누군가의 눈물, 외침이 흐릿하게 귓가를 머물다가 사라진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겠지.
‘이제는 확실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거다.’
강인한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의 자신은 보잘것없는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이제는 시작점이 확실히 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상상 그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있다. 강인한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지이이잉-
무너지기 시작하는 차원.
그리고 익숙한 칠흑의 통로가 나타나고.
쉬이이이이!
영혼이 한없이 추락하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팟!
통로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점으로 존재하더니, 이내 점점 커지며 빠르게 내게 가까워진다.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
강인한은 힘껏 소리쳤다.
“다 왔구나!”
그리고 빛이 뿜어내는 섬광에 모든 것을 맡겼다.
다시 눈이 떠지는 순간.
자신의 삶은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2장. 몸풀기
“강인한! 강인한, 이 새끼 어디 있어?”
“킬킬킬! 바퀴벌레만큼 빠른 새끼구만! 하긴 각성자가 아니면, 뭐 빠지게 달리긴 해야지. 클클!”
눈을 뜨자마자 귀에 들린 것은 두 남자의 비열한 목소리였다.
강인한은 어찌된 영문인지 숲속에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쫓는 듯한 발소리가 있었다.
들린 목소리는 두 명이었지만, 발소리로는 일행이 넷이나 됐다.
‘아.’
그 순간.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조합됐다.
강인한의 삶을 살다가 다른 삶으로 불려 가기 전, 어떤 상황이었는지 인지한 것이다.
짐꾼으로 던전에 왔다.
짐꾼, 말 그대로 각성자들의 짐을 대신 들어 주고 허드렛일을 하는 존재.
짐꾼도 잘만 하면 돈이 꽤 된다고 해서 초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지원했는데, 잘못 걸렸다.
4명의 각성자들로 구성된 이 공대는 그야말로 살인마 사이코패스들이 모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팟!
그 순간.
강인한에게 일련의 창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삶을 반복하면서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강인한 : Lv. 1]
[랭크 : F]
[체력 : 5]
[근력 : 5]
[마력 : 5]
[민첩 : 5]
[물리 방어력 : 0]
[마법 방어력 : 0]
[스탯 포인트 : 5]
“각성했군.”
예상대로였다.
강인한이 뒤를 돌아보자, 50m 정도 지점까지 녀석들이 쫓아와 있었다.
도망쳐서는 답이 없다.
아울러 피를 흘리지 않고 살아 나갈 방법도 없었다.
애초에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미친놈들이다. 어떻게 손봐 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빠른 판단일 터.
‘검이 빠르겠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에는 검이 편했다. 마법도 괜찮지만, 지금의 마력 수준으로는 파이어 볼이나 한두 개 날리면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인한은 바로 근력에 5를 투자했다.
그러자 볼품없던 마른 몸 여기저기에 순식간에 힘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검을 양손으로 힘껏 휘두르면, 유효한 상처를 적에게 입힐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문제는 검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체적인 수급이 필요했다.
수급 대상은?
바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는 저 살인마들이었다.
푸스슥.
강인한이 달리던 것을 멈추고, 마른 지면 위에 있던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들었다.
그리고 뒤로 돌았다.
정면에 민머리의 남자가 보인다.
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데, 예기가 잔뜩 서려 있는 것이 값비싼 검처럼 보였다.
‘자세가 형편없군.’
진정한 검술을 펼치려면, 달리고 있다고 해서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흐트러지는 경우는 십중팔구 힘만 믿고, 완력으로 검격을 펼치는 경우.
물론 멋모르고 당할 혹자는 이를 위력적으로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강인한의 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투성이였다.
“얼씨구?”
강인한이 멈춰선 채로 자신을 응시하자, 민머리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소리쳤다.
“포기한 거냐? 좋아, 그럼 다리부터 잘라 주지. 클클클! 얼마나 파닥거리는지, 구경이나 좀 해 보실까!”
시잉!
민머리가 검을 앞으로 내렸다.
있는 힘껏 무릎을 사선으로 내리치겠다는 살의가 담긴 공격이었다.
“…….”
강인한은 기다렸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전투에서는 동선이 최대한 간결해야 했다. 그리고 일격에 상황을 정리하는 게 편하다.
“하아아앗!”
민머리의 일갈.
다음 순간.
강인한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힘껏 민머리에게 뿌렸다.
추확!
“아읏! 이 개새끼가!”
순간 뿌려진 모래에 두 눈을 감은 민머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살겠다고 발광하는 놈을 죽여야 쾌감이 살지. 킬킬, 각성 못한 게 죄지, 뭐가 달리 죄겠냐?”
시야만 다시 돌아오면 놈은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려던 바로 그때.
“어라?”
방금 전까지 오른손에 묵직하게 느껴졌던 감각이 사라졌다. 혹시나 싶어 손을 움켜쥐니, 들려 있던 검이 사라지고 없었다.
“허?”
민머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모래 때문에 흐릿해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바로 그때.
푸슉!
매서운 일검이 시원하게 민머리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끅……!”
단말마의 비명.
그것이 민머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유언의 전부였다.
만렙 귀환자입니다만?
지은이 : 청초
제작일 :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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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김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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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85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