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레벨 0- 죽음에서 신을 만나다
누구나 신을 갈구한다.
그러나 신은 없다.
-무신론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 몸을 움직일 수 있지만, 온몸에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나는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그저 부유하고 있었다. 사방에 암흑만이 가득하고, 저 멀리 작은 빛이 하나 보일 뿐이었다.
분명 나는,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와 단기로 돈을 벌 목적으로 노가다를 다녔다.
그런데 방금 전에 크레인이 내 쪽으로 쓰러지는 사고가 났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상황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다.
너는 죽었다.
본능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존재가 내게 강제로 자각시켜 주고 있다. 이제 나도 어떤 상황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는 죽었다.
그래.
죽었구나.
하하.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죽었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죽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자마자 두 눈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바동거리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하하하.
이게 죽음이라는 건가?
예전에 죽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저승사자가 오는 건가? 천사라도 데리러 오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환생이라도 하나?
그러나 지금은 알겠다.
그런 건 없다. 죽으면 지금 나의 이 모습처럼 되는 거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자 그저 허탈한 마음이 들 뿐이다.
이렇게 보니 나, 게임 되게 많이 했구나.
어렸을 적부터 컴퓨터를 붙잡고 살았고, 수능 기간에만 안 했을 뿐. 서울 안에 있는 적당한 대학에 합격한 이후에는 또다시 게임을 붙잡고 살았다.
연애도 안 해봤고, 게임과 공부만 하는 인생이다.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지만, 학과는 평범하게 인문학계열로 진학했다.
딱히 꿈이나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게임이나 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게임 폐인이라 하지만,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게임을 건드리며 정말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내 26년의 인생을 놓고 보니 정말 웃기다. 남은 것도 없고,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인생을 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후회는 없다. 그래. 별거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즐겁게 살았으니 된 거 아닌가.
지금 죽는 것은 슬프고, 더 이상은 게임도 못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라고 하는 인간의 생이 여기서 끝난 걸 어쩌겠나.
그래.
다 끝이다.
이제 끝났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리고 저 멀리 있던 빛이 점점 커지고, 무언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생명.
유지.
시간.
인생.
욕구.
순수.
의문.
뭐, 뭐야 이건?
말이 아닌 개념 비슷한 것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들은 어지럽게 내 안을 헤집다가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너에게 묻는다. 삶을 이어가고 싶은가?
이것은 내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이상한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육성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나, 마음의 대화가 이런 게 아닐까?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전 죽은 겁니까?”
이미 확신을 가졌던 사실이지만, 한번 물어나 보았다.
-그렇다. 긍정한다. 죽었다. 끝났다.
몇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다시 내 머릿속을 채웠다.
“아까의 질문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안. 생존 욕구를 가진 자. 또 다른 삶. 기회.
단어들이 또다시 내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다 그것들은 다시 문장이 되었다.
-생존 의지를 가진 너에게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 번 더 살 수 있다고? 그런 기회를 주겠다고? 이, 이유가 뭐지? 죽은 나를 살려 주겠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아니, 지금 그런 걸 묻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물었다가 되살려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
-긍정. 질문. 받아들임. 상황. 여유. 제한.
무언가 어지러운 단어들이 다시금 나에게 들어와, 이전처럼 문장이 되었다.
-여유가 없기에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받아들이겠는가?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하겠어요! 한 번 더 살겠습니다!”
-제안. 긍정. 시작. 상징. 확정. 너의 이름. 영혼. 이동. 삶. 기회. 대가. 없음.
-제안을 받아들인 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너의 상징은 게임으로 확정되었다. 너의 이름은 더 게이머. 이제 영혼을 이동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라. 대가는 없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빠직!
갑자기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엄청난 고통이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태워 버렸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벨 1-들판에서 깨어나다
경험은 몹시 중요하다.
경험이 없다면 일을 하는데 실수를 하게 되고,
그것은 곧 실패로 이어질 수가 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서는,
그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경험론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것 같이 고통스럽다. 동시에 그 지근거리는 두통을 심장박동에 맞춰 느끼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할만 했다.
숙취 상태에서 술을 다시 진탕 마신 다음에 김치 단지에 한 3일 정도 뇌를 집어넣은 것 같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화악.
밝다. 크다.
고통스러운 가운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지 이 두 가지뿐이었다. 달이 엄청나게 컸다.
내가 아는 것보다 적어도 2배는 되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달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달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덜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달빛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달만 바라보았다.
“후아.”
이윽고 머릿속을 채우던 고통스러운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몸에 힘이 들어오고, 정신도 또렷해졌다.
여기가 어디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여기가 어디냐는 것.
일단 이곳의 달은 너무 컸다. 지금까지 저렇게 큰 달은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여 주변을 보았다.
“헉.”
뭐, 뭐야?
시체들이잖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제법 많은 수의 시체들이었다. 옆에는 마차로 보이는 것이 반쯤 부서져서 널브러져 있었고, 내 주변에도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시체는 팔다리가 뭔가에 물어뜯긴 것 같은 그런 모습들이었고, 복부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는 대체 어디야?
제길. 시체들 사이라니.
무서웠다. 그리고 당황스러웠으며, 혼란스러웠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이,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래.
나 죽었지. 그리고 이상한 경험을 했어.
막노동판에서 사고로 죽은 이후, 기이한 ‘무언가’와 대화를 나누었었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상징은 게임이라고 했고, 내 이름을 더 게이머라고 했었다.
그다음에는?
“엄청 아팠지.”
그래.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눈을 뜨니 여기였고.
“잠깐.”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마차는 그렇다 쳐도, 죽은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해 보니 놀라운 점이 있었다.
우선은 복장과 외모가 달랐다.
금발에 흰 피부, 그리고 눈동자 색도 제각각이다. 달빛이 밝아서, 야밤임에도 그들의 외모를 확실히 볼 수 있었기에 확인이 가능했다.
외국인?
거기다가 그들의 복장도 독특했다. 그들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보던 가죽이나 사슬로 만든 갑옷 따위를 입고 있었다.
뭐야, 이건.
“이, 일단 일어나자.”
시체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게 오싹해서,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더 가관이다.
한바탕 큰 싸움이라도 한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이쪽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패하여 죽은 듯싶었다.
제기랄!
뭐야 이건.
아우우우우우!
오싹!
멀리서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오싹거리며,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제길! 엄청 무섭잖아!
“무, 무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주변에 보이는 것 중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내가 무기 볼 줄 아나? 그냥 쓰는 거다.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절그럭.
피 묻은 검을 한 자루 들고, 그다음에 창도 들었다. 초보자의 경우 창이 더 위력적인 무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싸우는 법 같은 것은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싶어서 그것들을 주워든 것이다.
그리고 둥근 모양의, 지름 1미터 정도의 제법 큰 방패도 하나 주워들었다. 검은 검집채로 어깨에 둘러메 등에 매달고, 방패 하나와 창을 들었다.
이러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일단 조심조심 시체들에서 벗어났다.
“후아.”
어느 정도 걷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
뭐야 대체?
다시 살아났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왜 시체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 몸은 또 뭐야?
내 몸이 아니잖아?
지금의 내 상태를 말하자면, 가죽 갑옷을 입었고, 거친 면바지와 가죽 장화를 신고 있다. 허리춤에는 가죽으로 만든 수통과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주머니가 하나씩 매달려 있다.
쩔그럭거리는 주머니를 허리춤의 걸쇠에서 빼 들었다.
그 안을 보니 구리인지 동인지 모르겠지만 누런 금속으로 만든 동전과 은으로 만든 동전이 들어 있었다.
이거 영락없는 중세잖아?
“과거로 온 건가? 아니면 다른 세상인가?”
다른 세상에 왔다고 하면 미쳤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했는데, 다른 세상에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과거로 온 것도 사실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
일단 내가 남의 몸뚱이로 되살아났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뭐야?
이 몸뚱이의 본래 주인은 죽은 건가?
“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두려움은 가라앉았지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여기가 어디며, 난 누구며, 뭘 해야 하는 것인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좋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취직 걱정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럼 여기선 뭐 해야 하지? 먹고살 걱정?
하긴.
먹고살 걱정을 하긴 해야 한다.
지금 이 몸 빼고는 빈털터리 상황이 아닌가?
“잠깐.”
그러고 보니 이 시체들을 뒤지면 돈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예전에 본 소설들에서, 이런 무기만 해도 제법 비싸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주머니를 가지고 있듯이 그들도 주머니를…….
“아니, 그만두자.”
고개를 홰홰 저었다. 시체를 뒤진다고? 내가?
더 게이머 : 판타지아
지은이 : 성상영
제작일 : 2017.12.11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권아주
표지 : 장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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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80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