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는 사냥을 간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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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프롤로그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판타지 세계 아르아브 대륙.

그리고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중원.

그곳에서 나는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두 세계를 파멸로 이끌거나, 그 세계에 군림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드래곤마저 경배하던 마법 실력과 현경에 이른 경지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건 그저 공허함뿐.

아르아브에서의 20년, 그리고 중원에서의 30년.

전 대륙을 공포로 내몬 마왕.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무림을 찍어 누르던 황제에게 발가락을 핥게 했던 초월천마.

50년 간 두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나는 그러한 이름들로 공포와 경외를 샀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나의 진정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해 준 적도, 누군가가 말해 준 적도 없는 나의 이름. 나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에 사는 스무 살 청년. 어느 날 갑자기 이름 모를 세계로 빨려 들어간 불쌍한 성현철이다.

당연하지만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은 그 두 세계의 어느 곳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행보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스으으으으으읏.

찢어진 공간 너머로 건물들이 보였다.

아르아브 대륙의 것도, 중원의 것도 아닌 생소한 건물 양식.

지구의 건물 양식이었다.

“성공했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그것만으로도 잊고 있던 감정들이 휘몰아치며 공허한 가슴속을 채우는 느낌이 든다.

손을 뻗었다.

몸에는 고농축 된 마나와 그것을 정제하여 발산하는 초월경의 묘리가 가득 담겨 있다.

이것이 차원문을 만들어 낸 창이며, 그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패다.

“언제일지, 어디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파치치칙!

손끝이 차원문의 표면에 닿으며 스파크가 튀었다.

모든 것을 압축하여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압박감에 이가 악물어졌다.

“나는 돌아간다. 비록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없을 지라도. 모두가 날 괴물 취급할지라도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눈을 감았다.

어느새 몸이 차원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챕터1



경기도 고양시 일산 서구. 신도시로 분류되어 한창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었던 이곳은 지금 지옥이 되어 사람들의 피로 얼룩지고,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 장면들을 눈에 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대한민국 3대 길드인 현무 길드 구조지원 2팀의 팀장 이예지였다.

허리 밑까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묘하게 여우를 연상시키는 쌍꺼풀 없는 눈동자, 왼쪽 눈 밑의 눈물 점은 학살의 마녀라는 그녀의 별명과는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또한 충분히 볼륨 있는 몸매의 잘록한 허리. 그 허리에서 이어지는 절묘한 골반 라인 역시 TV가 아닌 지옥의 현장 최전방에 서 있다는 것을 의심케 했다.

“사, 살려 줘. 살려 줘어어!”

그런 그녀의 시야에 겨우 닿을 만큼 먼 거리에서 건장한 체구의 남성 하나가 달려온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 아래로 핏물이 볼과 코를 타고 끈적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은 없었다.

탁!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그대로 딸려 올라갔다.

“으악! 으아아아아악!”

남자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허우적거렸지만, 남자의 머리를 쥐고 있는 괴물의 힘은 너무나도 억세었다.

곧 잡고 있던 괴물의 발톱이 놓아진다.

10층 높이까지 딸려 올라간 남자는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푸학!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다섯 개로 나뉘어 사방을 나뒹군다.

차악.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라 하기엔 너무 가뿐한 착지.

녀석은 남자의 몸통 부분에 안착한 채 남자의 머리를 양 손으로 뜯어내어 뾰족한 주둥이를 초점 잃은 눈동자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치르르르.

맛있는 것이 혀에 닿았을 때에나 나올 법한 감탄사를 토하며 게걸스럽게 뇌를 먹는다.

빠득.

그 모든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이예지는 이를 갈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저 미친 괴물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늘로 띄웠다가 떨어뜨려 남자와 같은 꼴로 만든 후, 산 채로 눈깔부터 뽑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죽었고, 등 뒤에는 그녀가 대피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리스타트.]

사라졌던 디멘션 게이트가 다시금 생겨나는 현상이다. 새로 생겨나면서, 그 차원에 꽉 차 있던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상황.

이 출몰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고 그 몬스터의 수가 허용치를 넘어 버리면 게이트가 커져서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그러니 초기에 진압을 해야 하며, 때문에 국가에서 헌터들에게 그러한 부분을 부탁했다.

사건이 터진 현장의 반경 15킬로미터 안에 있는 헌터들은 30분 안에 현장으로 가서 새롭게 생겨난 디멘션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여력이 된다면 디멘션 게이트까지 처리해야 했다.

이는 헌터들이 강제로 가지는 의무. 의도적으로 이에 불응하면 법적인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팀은 그러한 지원 병력이 오는 30분 동안 몬스터들의 마수에서 사람들을 끄집어내어 대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30분은 얼어 죽을.”

말이 30분이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생각하는 헌터들이. 즉, 나라가 해 주는 게 시원찮다 생각하는 그들이 30분 안에 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 역시 그들만의 사정이 있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뛰어드는 것이니 만큼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애초에 고의적으로 오지 않는 이들도 있다. 법적 처벌이 기다린다고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때문에 1시간은 버티고 있어야 다른 헌터들이 그녀와 그녀의 팀을 도와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예지는 여기에 왔다.

그녀는 다른 이들처럼 자기 몸을 사리기보다는 타인을 구하는 일을 중시해 왔으니까.

하지만.

‘10분도 버티지 못해.’

이번엔 달랐다.

끼아아악!

인간형의 마른 몸에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 1.5미터쯤 되는 구부정한 몸체에 달린 2미터의 날개.

조금 전 남자를 죽였던 몬스터는 몬스터 도감에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지금껏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몬스터.

한 2성급 몬스터쯤 될까?

그녀가 능히 상대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끼악! 끼악!

-끼아아악!

검게 물든 하늘. 그 하늘이 검은 이유가 바로 이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그만큼 수가 많았고, 때문에 모여든 헌터들이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느릿하게 날아오고 있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

그것의 생김새는 다른 것들과 비슷했지만, 그 덩치는 10층짜리 건물의 크기와 맞먹었다. 자잘한 몬스터들이 문제가 아니다. 저 덩치 큰 놈이 문제였다.

느껴지는 마력은 어마어마했고,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것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으니…….

그녀는 품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스톱워치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0부터 시작된 숫자가 초단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버틴다.’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저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없겠지?”

그녀의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하직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당연한 대답. 이예지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한 이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예!”

부하 역시 그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그의 부하 헌터들과 함께 생존자들을 통솔하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예지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팀장님? 안 가십니까?”

그 말에 이예지가 피식 웃었다.

“안 가신다.”

“그, 그게 무슨!”

“내가 가면 저건 어떻게 막을 건데?”

그리 말하며 그녀가 눈앞을 가리켰다.

10층 건물 크기의 악마와, 그 악마가 거닐고 있는 시커먼 몬스터들이 그들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열린 디멘션 게이트는 대부분 작다. 하지만 거대한, 말 그대로 체급이 다른 경우도 존재했고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칼의 날카로운 끝 부분의 무언가를 뚫으면 그 뒤로는 수월하다. 처음이 어렵지 그 상처, 즉 문을 넓히면 넓힐수록 더욱 거대한 존재감의 녀석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핵미사일밖에 답이 없다.

그리고 이곳은 경기도 고양시. 수도인 서울과 아주 가까운 곳인 만큼 그런 것은 미친 짓이다.

한다고 한들 박멸을 장담하지 못한다.

“같이… 같이 막겠습니다!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하는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부하직원의 말에 지금껏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래, 안전하고 돈 많이 버는 사냥터보다 사람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고 가시밭길을 선택한 녀석들이 모인 곳이 이곳이니까.

마음과 사명감은 부하직원도, 이예지 자신도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특했다. 하지만.

“넌 새끼야, 그게 문제야.”

그녀의 입에서 칭찬은 나오지 않았다.

“너희가 다 이곳에 있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피시킬 거지?”

“그건…….”

“무책임한 말을 한 대가는 내일 경위서로 받겠다.”

부하직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의 끝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기 때문이다.

“살아서 돌아갈 거다. 경위서 받아야 되니까.”

“……조심하십시오.”

그는 그제야 그녀의 별명을 떠올렸다.

학살의 마녀.

그리고 그 학살엔 적아의 구분이 없다.

“모두들 빠져나간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팀장님에게서 멀리 떨어진다!”

2팀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대피하는 이들을 재촉했고, 넘어지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 능력을 사용하여 공중에 띄우거나 던지고, 반대편에서 그것을 받아 가며 짐짝 취급을 하기까지 했다.

차후 불만을 표출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불만을 표출하고 대다수가 그 불만에 손가락질하려면 ‘내일’이 주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일’을 안겨 주기 위해서라면 2팀은 이들을 얼마든지 짐짝 취급할 의향이 있었다.

“새끼들, 대피자들 짐짝 취급하는 인성 보소.”

아주 잘 배웠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칭찬을 해 주기 위해서 그녀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했다.

천마는 사냥을 간다 


지은이 : 은남

제작일 : 2018.01.24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성애

표지 : 장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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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87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