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 귀환하다 001화

0000

제 1화



chapter 1



시산혈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끔찍하고도 잔인한 전장에선 한 남자가 있었다.

불의 대공이라 불리는 이산.

그는 20여 년 전 발할라 대륙에 갑작스럽게 소환된 지구인이다.

이산은 학교로 향하던 길에 갑작스럽게 이곳 발할라 대륙으로 소환되었고, 그 후 이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 왔다.

소환되는 것과 동시에 각성한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숲 속에서 객사했을 것이다.

이산은 전방을 까마득하게 채운 마수들을 향해 손을 한번 크게 휘둘렀다.

이산의 손짓 한 번에 수천의 적들이 불타올랐다.

이산의 고유 능력은 ‘발화’. 그는 불을 다루는 플레이어였다.

그의 압도적인 무위에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의 정점인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자들도 숨소리를 죽였다.

이산은 20년간 이런 전장에서 살아왔다.

처음엔 생존을 목적으로 적을 죽였고, 그다음에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죽였으며 결국,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산은 절망했다.

그러다 정말로 우연히 알게 된 정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을 자신의 의형인 ‘황제’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짜 맞춘 듯이 이어지는 ‘차원문’들의 동시다발적인 폭발. 그 후 예정된 듯 수십만의 마수를 이끄는 마왕의 침공.

이산은 황제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차원의 돌’을 대가로 마왕군을 섬멸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지금. 마왕군과 이산이 지휘하는 군대가 피로 물든 대평원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중 지휘관인 이산과 마왕, 둘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마왕의 온몸은 화상으로 얼룩져있었고 이산은 그에 반해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흡사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이산의 모습에 아군인 병사들조차 몸을 떨었다.

마왕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네놈이!…… 이방인인 네놈 하나 때문에!”

이산은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마왕의 주변으로 마력들이 순식간에 휘몰아치며 폭발했다.

퍼어엉!

폭발에 온몸을 둥글게 말아 최대한 버티던 마왕이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온몸은 걸레 짝이나 다름없었다.

손가락으로 툭 쳐도 그 자리에서 허물어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아군 병사들은 물론이고 살아남아 마왕에게 기대를 걸었던 마수들 모두가 패닉에 빠져버렸다.

마계를 다스리는 왕을…… 저렇게 순식간에 제압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지만 분명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마왕의 눈에서 검붉은 피눈물이 흘렀고 그는 절규했다.

“……죽여버릴 것이다! 네놈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우리 마…… 컥!”

화르륵.

이산이 손가락을 까딱함과 동시에 마왕의 안면이 불타올랐다.

이 피와 살점으로 물든 전장에 상대의 저주를 잠자코 들어줄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산은 성자보다는 차라리 악마와도 비슷한 성정의 남자였다.

그리고 뒤로 천천히 허물어지는 마왕.

털썩.

전장의 모두가 숨죽이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땅에 서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불을 다룬다는…… 한 제국의 대공 이산이었다.

이산은 천천히 걸어가 안면이 녹아내린 마왕의 앞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산의 시선은 너무나도 무심했고 또한 오만했다.

이산의 눈에 들어온 마왕의 모습,

마왕의 모습은 처참했다.

비어있는 눈구덩이에서는 눈동자로 추정되던 액체가 흐르고 있었고

나머지 안면 부위들은 형체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녹아있었다.

살아나도 평생 해골 같은 얼굴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마왕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백 년…… 백년대계가…… 군주님들에게 아직 보답도 못 했는데…….”

그 작은 소리에 이산의 무심하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드러났다.

그것은 의문이 서린 표정이었다.

“군주? 너 마왕 아니었냐?”

쿨럭.

마왕의 입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난 대리인일 뿐…… 마계를…… 다스리는 군주님들은…… 아직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곧 이 땅에 인간들의 고통 어린 신음과 절망이 닥쳐오리라. 크하하하!”

뭔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산은 마왕의 저주 서린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너네 많이 해 처먹어라.”

피식 웃던 이산은 볼일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려서 아군 진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군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이산은 천천히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콰아아앙!

이산의 뒤편에서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발이 마왕을 비롯한 마수들을 덮쳤다.

한순간에 마왕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돼버렸고 수십만이 넘어가는 마수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사라져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무력에 한 제국 병사들은 환호성도 잊을 만큼 긴장한 채 자리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전군, 잔당을 소탕한다.”

멍한 표정의 병사들은 이산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고수의 북 치는 소리와 뿔 나팔 소리가 전장을 울리자 모든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마수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고조되는 전장의 분위기.

땅이 진동하고 마수들의 괴성이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심점을 잃은 마수들의 괴성이 위협이 될 턱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짐작했다.

이 마수와 인간의 전쟁은 인간의 압도적인 승리라고.

불패의 대공, 불의 지배자, 불의 종주, 마나의 지배자…… 수많은 별칭으로 불리는 대공 이산이 함께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승리를 뜻했다.

그것이 이산이라는 한 남자가 한 제국에서 지니고 있는 무게였다.

달려나가는 발할라 연합군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이산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아…지겹다…….”



전쟁이 끝나자 이산은 말 그대로 영웅이 되었다.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한 제국의 내전, 황자들의 난을 비롯해 주변 국가들의 반란을 혼자서 제압하고, 거의 혼자서 ‘마왕군’을 섬멸했다.

그의 이름은 이산, 한 제국에 존재만 했지 단 한 번도 실제로 누군가 임명된 적이 없었던 ‘대공’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위에 앉아있던 그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그가 위치해있는 자리가 한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는 대전임에도 불구하고 이산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산이 말했다.

“형님. 약속 지켰으니 차원의 돌 넘겨주세요.”

대공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인물치고는 말투가 길가의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었지만, 대전에 모여있는 모든 귀족을 비롯해 황제마저도 그런 이산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힘, 그것이 모든 것을 눌러버린 것이다.

황제, 레오폴트 2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우야…… 꼭 가야겠느냐?”

“가야 합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면 여기에도 있지 않으냐…… 나는 너의 가족이 아니더냐? 내 딸 레이첼은?”

이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차원의 돌 주세요.”

망설이던 황제는 결국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이산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영롱한 빛에 모든 귀족들의 눈이 빛났다.

저것이…… 그 말로만 듣던 차원의 돌…….

그 누구든 저 돌만 있다면 원하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믿지 못할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물건. 가히 보물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희소성은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평소라면 딴죽을 걸었을 귀족파의 수장 막시밀리안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이산은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귀족파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제국의 황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이산이 직접 자기 고향으로 사라지겠다는데 딴죽을 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딴죽을 거는 놈이 있다면 직접 칼을 뽑아서 목을 쳐버릴 정도로 그는 이산의 부재를 환영했다.

돌을 건네받은 이산은 복잡한 표정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레오폴트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 그릇된 욕심에 너를 희생시켰으니 겨우 이 정도의 보상만으로 네가 나를 용서해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황제의 진심 어린 말에 이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벤토리.’

그러자 이산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가방이 생겨났다. 그리고 안의 내용물들이 입체영상으로 떠올랐고 이산은 그중 ‘엘릭서’라는 항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빈손이었던 이산의 손에는 보라색의 액체가 가득 담겨 있는 유리병이 하나 생겨났다. 이산은 손에 들고 있는 병을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기사가 눈앞에서 벌어졌음에도 대전의 모든 귀족은 놀라지 않았다.

이산이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병을 건네받은 황제는 이게 무엇이냐는 듯 이산을 쳐다보았다.

“엘릭서라는 건데 드래곤한테 받아온 겁니다. 잃었던 원기를 보충해주고, 음…… 그냥 오래 살고 지금보다 젊어지실 겁니다. 한 40년 정도?”

그 말에 가만히 있던 막시밀리안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괴물 같은 저 황제가…… 40년이나 더 황제를 해 처먹는다고? 막시밀리안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 감히 신이 아뢰옵건대 이산 대공은 이계의 인물, 그가 주는 물건의 효력이 황제 폐하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봐도 받으라는 말이 아닌 되돌려주라는 의도가 있는 그 말에 이산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그러자 막시밀리안 공작의 왼손에서 불씨가 생기더니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그의 왼팔을 뒤덮어버렸다.

“으…… 으아악!”

그의 비명이 대전 안을 울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황실 근위병이 대전 안으로 뛰어들어왔다가 막시밀리안 공작의 왼손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한번 보고 이산 대공의 모습을 한번 보고는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미 한 제국에는 이산의 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고 그는 황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일개 근위병이 감히 이산의 행보에 제지를 가한다? 목숨이 수백 개가 있어도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거기다 황제마저 가만히 있지 않은가? 근위병들은 조용히 대전을 벗어났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막시밀리안 공작, 하지만 신기한 것은 공작의 왼손에서 시작된 불은 그의 왼쪽 팔만을 덮을 뿐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산의 험악한 말이 대전 안을 울렸다.

“존만이가 어딜 끼어들어?”

그러자 순식간에 불길이 사그라들었고 불길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공작의 왼팔이었다고 추정되는 재 덩어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 그는 귀족파를 이끌며 황제파와 대립하는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막시밀리안 휘하의 귀족들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군주, 귀환하다

 

지은이 : 넉울히

제작일 : 2017.08.26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권아주

표지 : 김경환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 본 작품은 (주)고렘팩토리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며 무단전재 또는 무단복제 할 경우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ISBN : 979-11-6013-64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