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0. 프롤로그
“돌아가실 겁니까?”
한 마디가 그의 발걸음을 잡는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천천히 돌리는 몸짓에서 쓸쓸함과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아무도 모르게 도시를 빠져나왔건만, 그새 배웅을 위해 나온 이들이 있었는가. 그는 픽, 김빠진 웃음을 만들었다.
홀로 아득히 많은 짐을 짊어졌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 굳센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미련을 털어낸 것처럼 보였다.
“가족이 보고 싶어.”
그의 입에서 가족이란 단어가 나오자 가슴이 시큰했다. 그가 나타난지 10년이 지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던 꼬마가 훤칠한 청년이 되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가족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곳 강산도 몰라보게 변했겠지?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기대감이 물씬 풍겼다. 그리웠으니까. 10년 동안.
그를 따라온 자는 입술을 곱씹었다. 멋들어지게 생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절대자의 자리를 내놓고 가시는 겁니까. 굳이 그렇게 떠나셔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말했잖아. 가족이 보고 싶다니까. 나머지는 네가 써.”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단순했고, 확고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그의 행보는 10년 전부터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홀연히 나타나서 신마저 창조할 수 있는 경지로 올라섰으니, 항상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그의 표정은 이제 그것을 다 그린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손바닥 위에서 자그마한 돌을 들어 올렸다. 이능을 잔뜩 머금은 돌은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제조의 신인 그가 만들어낸 걸작 중 하나였다. 돌은 공간을 열었고, 그의 머리 위에 어딘가로 통하는 홀을 만들었다.
“이제 존댓말은 집어 치워. 다 떠나는 마당에.”
“…….”
유일한 배웅인은 눈물을 머금었다. 신파극처럼 유치한 이별이었다.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원래 그는 ‘이래귤러’였으니. 흐려진 시야를 들어 앞을 보니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빌어먹을……꺼져 새끼야.”
“오냐.”
입자가 되어 메아리처럼 되돌아 온 대답에 그는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흘렸다. 슥슥 눈물을 훔친 그는 거대한 마력을 일깨웠다.
전설이 졌다. 이젠 자신이 그의 뒤를 이을 차례이다. 그는 주변에 있는 바위에 깎아 글자를 새겼다. 훗날 그를 기억하고 있는 세대가 죽었을 때를 위한 장치였다.
-전설의 연금술사. 이곳에서 귀환하다.
멋들어진 필체가 돋보이는 바위를 남기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훨씬 단단해졌다. 그가 짊어지고 있던 것들을 인수인계 받았으니 그에 걸맞은 태도와 품위를 지켜야했다.
“잘 가쇼. 스승님.”
지구에서 10년 전 이곳에 왔던 모험가는 다시 지구로 돌아갔다. 낯선 곳에서 전설이라는 이명을 남기고서.
1.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여긴 안 변했네!?
어느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지구는 바뀌었다. 소행성의 충돌로 일어난 환경의 변화. 지구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렸다. 그 증거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와 던전.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군인들의 희생이 끊이지 않던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능을 각성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신체조건과 영화에서나 보았던 초능력들을 사용했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어빌리티’의 존재였다.
사람마다 고유한 재능이 있듯, 사람마다 고유한 어빌리티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빠르게 자신의 능력들을 이용해 몬스터를 사냥하고 던전들을 클리어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던전의 증식을 그나마 억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능을 각성하는 자는 일반인의 30%정도. 처음에는 누구 할 것 없이 특성을 개화하면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쓸모 있는 특성’과 그렇지 않은 특성으로 나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차별이 일어났다. 쓸모없는 특성을 가진 자들은 이능력자도, 일반인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소위 잘나가는 특성을 개화하면 로또에 맞은 것처럼 좋아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절망하곤 했다. 여느 사람은 그것이 두려워 적성이 있는데도 특성을 개화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발견된 특성은 검술, 창술, 궁술, 마법 같은 전투계열의 어빌리티와 보조마법, 치료의 서포터계열 특성. 요리, 제작, 측량, 제조와 같은 실용성 어빌리티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천시 받는 것은 ‘제조’와 ‘측량’ 같은 실용성 어빌리티다.
전투계열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귀족으로 대우를 받고 탄탄대로를 걸어가는 반면, 실용성 어빌리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취급 이하를 받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능력자로 개화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돌아오는 혜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용 어빌리티를 각성한 자들은 엄청난 제약에 묶여버려야만 했다.
능력자 특수 법안. 능력자들을 억제하는 법안은 그들에게 또 다은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성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능력자라는 것을 감추고 살았다.
그나마 노력하면 변할 수 있었던 세상은, 완벽하게 룰렛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 * *
깊은 던전 속. 컴컴한 공간이었다. 외부와는 단절된 곳,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무수히 많은 장애물과 함정, 포진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물리쳐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던전의 왕은 오늘도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증오스러운 능력자들은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입구에서부터 자신의 부하들을 거쳐 와야하기 때문에 그는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던전의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머리 위에서 하얀 빛이 쏟아졌다.
[부오!?]
소머리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띠웠다. 새하얀 빛은 어두컴컴한 던전을 환하게 비췄다. 빛은 달무리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하나의 동공을 만들었다. 정확하게 왕의 머리 위였다.
“읏차!”
퍼억! 소리가 울렸다.
머리를 맞으면 몬스터나 사람이나 똑같이 기분이 나빴다.
왕은 난데없이 머리를 얻어맞았다.
기분이 나빴다.
던전의 왕은 분노가 치솟았다. 이곳에서 감히 자신의 머리를 짓밟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육중한 거체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움직였다. 붉게 물든 눈. 뜨겁고 하얀 콧김. 주르륵 흘러내리는 침방울. 공포감 조성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왕은 침입자를 찾아 눈을 굴렸다.
“여긴?”
어느새 침입자는 안전하게 땅에 착지했다. 어두운 분위기에도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음파에 담겨 있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
던전의 왕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더욱 열이 뻗쳤다. 그의 분노가 거대한 함성이 되어 대기를 때렸다.
[크아아아아아-!]
공기가 밀려나갈 정도의 포효를 내지른 던전의 왕. 그의 존재감은 던전에 있던 모든 동식물들을 긴장케 했다.
“하, 거 참 시끄럽네.”
이방인은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것을 방해한 녀석을 쳐다보았다. 소머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중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였다.
그는 픽 웃었다. 10년 전엔 이 녀석을 보고 추한 꼴을 보였었지. 하지만 그는 10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꿀럭꿀럭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림자는 하나의 형체를 만들었다. 입자처럼 모인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가 던전을 훑었다.
[주인. 힘이 많이 상했군.]
“차원 이동이 탁 하면 억 하고 되는게 아니잖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림자 역시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사이 자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시당한 미노타우르스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부오오!]
도끼는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소리를 동반하며 검은 그림자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반달 모양의 눈동자를 변화시키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쾅! 소리가 나며 땅거죽이 튀었다. 도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림자는 도끼를 피해 미노타우르스의 옆구리 옆에 나타났다.
그림자의 팔이 주욱 늘어났다. 그림자의 팔은 보검보다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며 미노타우르스의 옆구리를 양단했다.
미노타우르스는 비명을 질렀다. 푸확! 피가 튀었다. 진득한 혈향이 남자의 코끝을 자극했다. 미노타우르스의 내장이 보기 흉하게 쏟아졌다.
미노타우르스는 고통으로 범벅이 된 숨을 몰아쉬며 육중한 몸을 땅에 뉘였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한순간에 반 시체가 되어버린 미노타우르스에게는 더 이상 왕의 위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눈은 징그러운 현장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림자는 피도 묻지 않은 손을 휙 털어버리며 널브러져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미 던전의 왕은 그 힘을 다 소진했다. 일격에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그림자는 무참히 왕의 머리를 짓밟았다.
퍼석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르스의 머리가 짓뭉개졌다. 왕은 그대로 절명했다. 그림자는 흐릿한 실체를 다잡으며 투덜거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마력이 전부 사라졌어. 아공간도 완전히 뭉그러졌군.”
남은 것은 수많은 개조를 거친 육체와 그림자. 막대한 양의 지식이었다.
남자는 이곳이 어딘지 완벽하게 기억났다. 자신이 다른 세계로 갔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렇다는 것은 던전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라는 것인데.
“일단 빠져나가자. 보스만 빼면 잔챙이들이니까 괜찮을 거야.”
[가자. 주인.]
그림자가 앞장섰다. 남자는 그의 뒤를 쫓았다. 던전의 안은 매우 고요했다. 간헐적으로 빛나는 수정들이 그들의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일반인이 들어오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는 어두운 던전 속에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기감은 이미 일반적인 인간을 상회했다.
가장 강한 몬스터를 일격에 죽인 그림자를 앞세워 던전을 수월하게 돌파했다. 그는 산책과도 같은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잠시 추억에 젖었다.
* * *
그의 이름은 운하. 중학교 2학년의 나이로 각성한 능력자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전투적인 재능을 부여해 주지 않았다. 그의 어빌리티는 ‘제조’ 여태까지 개회된 어빌리티 중에 가장 쓰레기라고 평가받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포션을 만들기 위해 던전을 돌아다녔고 육체 단련과 지식의 습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법이었다. 1차 몬스터 대침공이라고 명명한 사건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지고 어머니가 독에 중독되었다.
인서울 연금술사
지은이 : 우림
제작일 : 2016.10.06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배성림
표지 : 김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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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18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