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프롤로그
나는 정점이었다.
가상현실 게임. 스로몬 월드. 거기서 나는 일인자였다. 내 길드는 서버 최고였고, 내 캐릭터는 강했다. 압도적인 힘의 자리.
그 영광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스로몬 월드가 종료되기 전까진, 내 자리를 앗아갈 놈은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1년도 되지 않아 내 동료로부터, 친구로부터 배신당했다. 헌신짝처럼 날 내팽개쳤다.
절망과 배신감으로 게임을 접고 폐인처럼 지냈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땐 너무 늦어있었다. 나는 모든 걸 잊고 절망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5년 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결심했다.
“더는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겠어. 내가 그들을 이용하고, 홀로 나아가겠다.”
나는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 발큐레아를 시작하며 다짐했다.
배신
“쿨럭!”
피를 토한다. HP가 쭉쭉 깎인다. 힐끗 상태창을 보니, 중독. 출혈. 저주. 마비. 감전 등등. 참 길게도 나열되어 있었다.
“죽겠군….”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미치겠군. 내 마지막이 이런 거라고?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나는 쓰게 웃었다.
“….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이야? 응? 레티아.”
그러자 레티아가 이를 질끈 물며 시선을 돌린다. 죄책감이 묻어나오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배신해놓고 뭐 저딴 태도냔 말인가. 나도 모르게 이죽거렸다.
“왜 눈을 돌려? 떳떳하면 마주 보라고. 응?”
“너무 애를 괴롭히지 마.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뿐이니깐.”
나는 눈을 돌렸다. 적발을 허리까지 기른 채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 게임 중반쯤에 만났었다. 막 길드를 만들고 자리를 잡아갈 때, 오크한테 맞아 죽으려는 걸 심심풀이로 구했었다.
그리고 제법 실력이 돼서 길드에 가입시키고, 점차 무지막지하게 강해져 우리랑 어깨를 나란히 한.
한때 나랑 연인이었던 바네스.
현실 이름은 이수희.
“잡소리 말고 그냥 죽이자.”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발칸. 현실 이름은 이영재.
나랑 게임 초기부터 알던 사이였다.
고블린도 잡지 못하고 쩔쩔맬 때 만나, 서로서로 도와주고, 조언도 해주고, 간간이 만나서 농담 따먹기도 했었다.
언제나 유쾌하면서도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보이는 저 냉정한 눈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뒤로 수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나랑 잘 알고, 또 친했던 이들이다. 내가 길드를 설립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던 이들. 개중 몇 명은 나랑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몇은 싱글벙글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하….”
대체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저들이 나를? 비록 게임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얄팍한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 연락처도 알며, 사는 곳도 알았다.
사적으로 만났으며 여행도 다녔다.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도 털어놓는, 몇 년 동안이나 관계를 맺어왔던 진한 사이였다.
“...대체 왜?”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일 수도. 나는 HP 창을 바라봤다 쭉쭉 까이는 게 이제는 10%도 남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 게다가 이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저들 중 둘만 덤벼도 간당간당한 데 열이 넘었다.
“대체 왜 내 뒤통수를 친 거야?”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길드는 서버 최강의 길드였다. 후발주자로 들어왔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순식간에 판을 뒤엎기 시작했었다.
결국,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수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길드들을 고꾸라트리고, 최정상에 선 길드. 하루 들어오는 돈만 현금 수십만 원이 넘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확실한 최강. 그리고 나는 그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바네스가 앞으로 나선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한 비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 스크롤을 꺼낸다.
“너한테 말해줄 이유는 없잖아?”
그녀가 이죽거렸다.
스크롤이 찢어지고 백색 빛이 나를 감싼다.
[당신은 겔테스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감소합니다!]
“…. 그거 되게 비싼 거일 텐데.”
어이가 없군.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딴 걸 생각할 줄이야. 검을 부여잡고 일어난다. 여러 개의 시선이 전신을 사납게 찔렀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날 쫓아내려 하는지. 왜 갑자기 길드 회의에서 길드장 박탈 선언을 한 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절반 이상이 동의한 이유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나를 배신했다. 이용했다. 가슴 속에 울화통이 터진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호흡이 가빠진다.
빌어먹을. 개 같은 새끼들이. 나를. 나를!
“개새끼들아아아!”
“죽여!”
검을 들어 휘두른다. 건물이 반으로 잘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기 시작한다. 날아오는 벼락을 망토로 감아 막은 후 섬광같이 달려간다.
“커억!”
“뒤져버려!”
친구였던 새끼의 가슴팍에 검을 뽑고 능력을 발한다. 번개가 요란하게 치며, 곧 잿더미가 되어 쓰러진다.
“젠장. 저 꼬락서니가 되도 길드장은 길드장이란 건가.”
“애초에 우리가 기습한 이유가 뭔데? 지금 못 잡으면 망하니깐 집중해.”
“으아아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다. 물약을 마시면서 버티고,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특수능력까지 사용한다. 하지만 모자라다. 날아오는 마법과 저주는 내 발을 옭매고, 탱커들은 검을 막는다.
저들이 내게 시전하는 전법. 내가 만든 것이었다. 종일 머리를 감싸며 제작한, 길드를 위해 만든 것.
그리고 그게 나를 노린다. 미칠 거 같다. 대체 어째서.
“크흑!”
등에서 고통이 느껴진다. 반사적으로 검을 비틀며 몸을 돌렸다.
“꺄악!”
익숙한 목소리가 비명이 되어 귀를 사납게 찌른다. 그리고 내 뒤로 틀어박히는 마법들.
“커헉!”
[HP가 2% 남았습니다!]
강렬한 경고음이 머릿속으로 울려 퍼진다. 이미 늦었는데 무슨. 쓰러진 채 허탈하게 있자 레티아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얼굴로 검을 들었다.
“미안해요...”
“개새...”
마침내 HP가 0이 되고.
삐빅!
[당신은 사망하셨습니다. 사망하여 착용하는 장비 중 하나를 떨어트립니다. 사망 페널티 24시간이 적용됩니다]
“시발!”
가로막는 큐브를 거칠게 걷어차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땅을 짚고 웩웩거렸지만 토는 나오지 않았다.
속이 쓰라리다. 불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한 가슴팍을 세게 눌렀다.
“전, 전화.”
나는 핸드폰으로 손을 향했다.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이영재, 이수희, 강영택, 이수영…. 빌어먹을. 멈춰.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붙잡고 전화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몇 분 동안의 통화음 후, 냉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받아.”
다른 이름을 고른다.
또다시 뚜르르. 1분 후 들리는 기계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난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으아아아아!”
대체 왜. 왜. 원인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온몸을 헤젓는다.
나는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게임 스타트
“4,000원입니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건네주는 편의점 도시락을 받았다.
뚜껑을 따고 젓가락을 뺀 후, 전자레인지에 집어넣었다. 위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띵!
경쾌한 알림과 함께 회전이 멈춘다. 뚜껑을 열자 고소한 치킨 냄새와 김치의 고추 향이 훅 풍긴다.
뜨뜻한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째각째각 젓가락을 놀리자 어느새 절반을 먹어치웠다. 시간 한 번 더럽게 잘 가는군.
[이번에 새로 나오는 가상현실 게임. 발큐레아는 그 어느 게임보다...]
나는 멍하니 들려오는 뉴스의 속보를 들었다. 발큐레아. 발큐레아.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가상현실게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길드들도 대거 이주해 옵니다. 대표적으로 스로몬 월드의….]
거기까지 듣는 도중 도시락이 동이 났다.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덜어내고 처박는다.
아르바이트생의 인사 소리를 들으며 밖을 나선다.
뽀드득뽀드득 새하얀 눈밭을 거칠게 짓밟으며 길을 걷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머리에 올라와 차갑게 식혔다.
“에이씨.”
거칠게 머리를 턴다. 잡생각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하자.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단칸방에 이른 나는 쿵쾅거리며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금방이라 무너질 듯 삐걱거리는 소리에 절로 가슴이 철렁했다. 이거 고치든가 하지. 하긴, 싼값에 사는 게 어디냐.
올라가는 도중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하. 여기에 사는 사람이 큐브를 산다고? 뭐 하는 사람이야?”
“몰라. 또 이상한 놈이거나, 아니면 게임에 미친 백수겠지. 아 씨. 근데 언제 와? 추워 죽겠는데.”
반가운 목소리에 계단은 마저 올라갔다. 내 집의 문 앞에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책임자와 같은 이가 마주 인사했다. 그러면서 께름칙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혹시 이 집의 주인이신가요?”
“네.”
“아이고. 드디어 왔구나. 추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아니요. 왔으니 됐지요. 그럼 바로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문을 열었다.
* * *
“공간이 좀 비좁은데….”
“여기 이렇게 바꾸면 될 거 같은데요?”
“아, 그럼 되겠네. 막내야. 저기 좀 붙잡고 있어라.”
“네.”
남자들이 거대한 큐브를 들고 방구석에서 열심히 조립한다.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근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그냥 그런대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왜요?”
“아, 이런 최신식 큐브를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긴 그러리라. 눈앞에 설치되고 있는 흑색의 큐브는 그 가격만 반억에 이르는 물건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은 꿈도 못 꾸는 기계. 나도 그걸 사기 위해 모든 돈을 쏟아부었다.
당분간은 쪼들려서 살아야 하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음험하게 웃었다.
잠시 후, 그들이 땀을 닦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설치 완료되었습니다. 1분 후 바로 사용하실 수 있으시고요. 또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수리가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애들아! 가자!”
“네.”
우르르 그들이 빠져나가고 곧 단칸방에 나 홀로 남았다. 방 안이 비좁아진 느낌이다. 방 1/3 정도 크기의 큐브가 들어섰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흑색의 큐브. 느껴지는 광택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이전에 사용하던 큐브는 이거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당시에는 제법 최신식이었는데, 이거랑 비교해보면 구닥다리처럼 느껴졌다.
통장에 남은 돈은 오백.
이제 이걸로 당분간 버텨야 한다. 공장도 때려치워서 수입원도 없다. 적금까지 깨가며 산 큐브다.
난 큐브 문을 열었다.
익숙한 홀로그램 창들이 펼쳐진다.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비슷했기에 조작에 문제는 없었다.
[대기 시간 45초]
앞으로 45초 뒤면 발큐레아가 시작된다.
과연 어떨까.
인기가 엄청나다는 건 알겠다. 게임이란 말만 나오면 귀를 틀어막던 나조차 알 정도였으니.
소식을 듣자마자 발큐레아에 대해 찾아봤다.
루카스가 꽁꽁 숨기고 있는지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한 차원 더욱 도약한 가상현실.
촉감도, 반응도, 인공지능도 모두 절정에 달한 게임이라는 것뿐.
뭐, 말이야 언플도 가능하니 믿지는 않지만, 클로즈 베타를 테스트한 놈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앞으로 발큐레아가 가상현실을 이끌어 갈 거라고.
[대기 시작 20초]
진짜 그럴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놈들도 온다는 거지.
배신자들의 이름을 검색해 본 결과 제법 기삿거리가 많았다.
스로몬 월드의 기둥.
그들이 발큐레아에 온다고 했었나. 퍽 웃기는 기사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하는 심장을 애써 눌러 담는다.
마침내 타임아웃이 되고 백색 창이 나타난다.
정점이 돌아왔다
지은이 : 파란영
제작일 : 2017.02.11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김유리
표지 : Angju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 본 작품은 (주)고렘팩토리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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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