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지구가 처한 환경의 위기와는 달리 대부분의 인류는 무감각하게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09:47』의 주인공 가족처럼. 이야기는 이들이 배를 타고 비진도를 향해 배를 타고 가는 8시 40분부터 시작한다. 재깍재깍 시간은 흐르고 화장실에 간 아이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때의 시간은 9시 47분이다. 현실의 시간일까? 상상의 시간일까? 이 순간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중첩되는 시간이자 교차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11시 50분에 이르면 현실 속에서 갈매기가 낚아채 간 토끼인형이 아이 바로 앞 바다에 두둥실 떠내려와 아이를 깊은 바다로 유인한다. 11시 59분, 토끼를 쫓아 헤엄쳐 온 아이는 거대한 고래 눈동자와 마주친다. 그리고 12시에 이른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비진도를 등에 지고 있던 고래가 깨어나 포효하자 섬은 아수라장이 되고 고래와 함께 사라진다. 아이와 토끼인형은 가족을 찾기 위해 고래를 따라가지만 그 어디에도 가족은 없고 둘을 위협하는 갈매기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연이어 세상의 모든 고래가 깨어나고 먼바다에서 시작된 고래섬들의 용트림은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 건물과 산 등 육지의 모든 것을 덮친다. 바다가 온 세상을 쓸어내고 나서야 고래의 움직임은 느려지고 정적이 흐른다. 고래들은 서서히 몸이 풀어져 바다는 고래들의 잔해로 가득해지고 아이와 토끼인형은 숨죽이며 이들을 지켜본다. 그때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포 속에서 정어리가 나와 떼를 이루어 수면으로 향한다. 정어리 떼를 쫓아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 배 한 척이 보인다.
아이와 토끼인형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가까스로 배에 오른다. 비진도를 향하며 가족과 함께 탔던 바로 그 배다. 아이는 화장실 창문을 통해 배 안으로 들어오고 토끼인형은 갈매기가 낚아채어 하늘 저쪽으로 멀어져 간다. 흠뻑 젖은 아이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엄마는 토끼인형을 안고 아이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때 시간은 다시, 9시 47분이다.
이기훈
충북 제천에서 세 아이 아빠로 그림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2013년 ‘BIB 브라티슬라바 국제일러스트레이션전시회 어린이 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으며, 2010년 볼로냐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와 단 두 명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주어지는 ‘2010 MENTION’에 선정되었다. 2009년에는 CJ 그림책 축제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글 없는 그림책 『양철곰』, 『빅 피쉬』, 『알』이 있고 다양한 책에 일러스트를 그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현실과 상상, 그 경계의 자유로움에서 맛보는 전율
9시 47분, 환경위기시계가 가리키는 지구의 2020년 현재 시간이다. 환경위기시계는 리우환경회의가 열린 1992년부터 매년 발표되었는데, 당시 시간은 7시 42분이었다. 12시가 되면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는 종말을 맞게 되며, 지난 30년 동안 2시간이 흘렀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 역시 2시간 남짓이다.
이기훈 작가는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와 인류를 향한 희망을 그만이 할 수 있는 역동적이면서도 극도로 세밀한 사실주의적 표현에 담아냈다. 지구에 종말이 다가오고 그 속에서 희망의 방주를 발견하는 아이가 겪는 상상과, 환경위기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인류의 현실은 ‘시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매끄럽게 넘나든다. 현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책을 보는 어느 지점에서 상상으로 넘어갔을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면 그때서야 독자는 상상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현실은 또 타임 루프를 통해 이야기의 앞으로 이어지며 상상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함 속에 머물게 되는 세련된 장면 구성과 연출에 그야말로 짜릿함과 탄성을 짓게 된다.
작가의 전작인 『양철곰』과 『빅 피쉬』가 건네는 지구를 배반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와 『알』에서 보여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설정이 이번 작품인 『09:47』에서는 모두 한 발 더 나아가 농축되어 있다. 내용 전개와 표현력, 그리고 메시지 등의 측면에서 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 이기훈 작가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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