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9
작가의 말 297
프로듀서의 말 300
p9
"뱀파이어야."
이 미친 여자의 말을 듣게 된 경위를 따지려면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p14
장기 입원이 가능한 철마재활병원은 인천 구시가지, 그것도 재개발이 확정되었으나 사업이 멈춰 대부분 폐건물인 죽은 도시에 있었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1년간 많은 영업장과 시설이 문을 닫거나 이전했지만 재활병원만은 이곳에 남았다. 재활병원도 이전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멀지 않은 시가지로 이전할 예정이었는데 대부분이 치매 환자들인 이 병원 특성상 낯선 환경이 환자들에게 좋지 않다는 명목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호자와 연락이 끊겨 허락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더 컸다. 어찌 됐거나 그런 이유로 철마재활병원은 이곳에 남았다. 내년 즈음이면 남아 있는 상가들도 전부 빠질 예정이었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집단 자살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에 가깝다고,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찬태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말했다.
'너는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아? 답이 그것밖에 없을 때 하는 거야. 여기를 봐, 인마. 가족들이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다 죽을 때까지 여기 있는 거라고.'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연은 사건에서 느껴지는 찜찜한 기운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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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뱀파이어야."
이 미친 여자의 말을 듣게 된 경위를 따지려면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p14
장기 입원이 가능한 철마재활병원은 인천 구시가지, 그것도 재개발이 확정되었으나 사업이 멈춰 대부분 폐건물인 죽은 도시에 있었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1년간 많은 영업장과 시설이 문을 닫거나 이전했지만 재활병원만은 이곳에 남았다. 재활병원도 이전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멀지 않은 시가지로 이전할 예정이었는데 대부분이 치매 환자들인 이 병원 특성상 낯선 환경이 환자들에게 좋지 않다는 명목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호자와 연락이 끊겨 허락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더 컸다. 어찌 됐거나 그런 이유로 철마재활병원은 이곳에 남았다. 내년 즈음이면 남아 있는 상가들도 전부 빠질 예정이었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집단 자살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에 가깝다고,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찬태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말했다.
'너는 사람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아? 답이 그것밖에 없을 때 하는 거야. 여기를 봐, 인마. 가족들이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다 죽을 때까지 여기 있는 거라고.'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연은 사건에서 느껴지는 찜찜한 기운을 지울 수 없었다.
p21
여자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폴리스 라인을 따라서 돌며 시체가 떨어졌을 7층을 쳐다보았다.
"던졌을 거야, 두 손으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육신을 붙잡고, 있는 힘껏."
수연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눈으로 여자를 뒤쫓았다.
"그렇게 던져야 건물 밑에 있는 나무나 구조물에 걸리지 않을 거고, 그래야 다친 부위에서 출혈이 많지 않다는 의심을 피할 수 있으니까. 없었잖아. 시체에 피."
시체에 묻은 피의 양까지 알 정도면 아무래도 수연이 오기 전, 그리고 순경이 출동하기 전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수연이 떠난 후에 왔다면, 이 여자는 자신의 어떤 권한을 발휘해서 시체를 살펴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뭐 하시는 분인지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수사반이시면 소속을 밝혀 주세요."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완다. 나도 누군가를 잡는 일을 해."
p34
완다는 영화관 앞에 섰다. 에호민느 거리에 위치한 히르미네 극장. 주변이 벌써 컴컴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기도 했지만 눈을 치우고 난 뒤 소파에 뻗어 잠든 탓이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계속 자려고 했다. 그런데 하루를 날렸다는 찜찜함이, 어차피 이 시간에 극장을 가도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완다는 고민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자정이 되어야 돌아올 거였고, 완다가 그동안 홀로 시간을 보내야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집에 박혀 책만 읽던 완다가 밖에 나가 영화까지 보고 온다는 말에 둘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완다는 하는 수 없이 영화를 보고 온 척하기 위해 시간을 때워야 했다. 완다는 그때 처음 그 자리를 발견했다. 벨벳 소재의 붉은색 의자. 화장실의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전구가 고장 나 불이 들어오지 않고 소란스러운 극장에서 유일하게 한적하고 서늘한 곳.
그곳은 완다의 안락한 비밀 공간이 되었다. 적당한 소음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인파 속에 우두커니 있다는 느낌이 좋아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완다는 그 자리를 사랑하게 됐다. 아니, 생각해 보니 완다가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을 자리여서 좋았던 것 같다. 완다는 여유롭게 그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기에. 하지만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p76
매해 주현절 아침이면 갈레트 데 루아를 한 조각씩 접시에 덜어 누구의 파이에서 페브가 나오는지 내기했다. 페브가 나오면 그날만큼은 그 사람이 왕이 되어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한 입을 먹고 완다가 파이 단면을 쳐다봤다. 희미하게 페브가 보였다. 완다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페브를 꺼냈다. 엄지 한 마디 크기의 천사 도자기 인형이었다. 클리에는 행운이 완다에게 찾아갔다며 행복해했다. 행운…. 완다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릴리를 떠올렸다.
p98
아주 사소하고 다양한 이유가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고들 한다.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나열할 수 없을 때, 가끔 본인조차 그것을 구분해 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유 없이 좋다'라고 말한다고. 클리에는 그 말을 하며 완다가 이유 없이 좋았다고 말했다. 모리스가 이유 없이 마음에 들어 모리스와 결혼하게 된 것처럼, 저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완다의 사진을 보자마자 이유 없이 사랑에 빠졌다고.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클리에의 마음까지 의심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뱉은 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클리에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완다는 릴리와 만난 시간도 짧았고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으며 만날 때마다 고작 몇 시간씩 시시한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런데 좋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먼 곳에 살고 있는 완다의 사진만 보고도 이 아이의 양육자가 되어 주겠다고 다짐한 클리에와 모리스처럼, 완다도 릴리를 처음 만난 그날 릴리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느꼈다. 아주 많다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과 같다.
- 접기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 <무너진 다리>,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을 썼다. 모호한 소설을 쓰고 있다.
도서명: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분류: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한국 추리/미스터리소설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천년대 이후 한국소설
지은이: 천선란
펴낸 곳: 안전가옥
판형: 128*200 mm / 반양장 / 305쪽 내외
출간일: 2021년 6월 11일 예정
정가: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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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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