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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맹문재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

직업:시인 대학교수

최근작
2024년 10월 <김남주 시인의 삶과 문학정신>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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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 있는 나무들이 정일관의 시집을 가득 채운다. 아까시나무는 오월의 비탈길이 캄캄한 어둠에 밀리지 않기 위해 환한 꽃을 피우고, 벚나무는 길을 건너다가 치인 고양이를 꽃잎으로 덮어 꽃무덤을 만든다. 가시가 삐죽한 엄나무는 당당한 자태로 풍성한 잎들을 이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은은한 잎사귀로 달빛을 받는다. 봄나무는 사람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가지를 늘리고, 겨울나무는 뼈만 남았는데도 외투 한 자락 걸치지 않고 별빛을 모은다. 큰 나무는 몸을 구부리고 팔을 내밀어 넓고 깊은 그늘을 내고, 모과나무는 작고 못생긴 모과를 툭 떨어뜨려 지상을 향기로 물들인다. 바람은 수소문해서 나무들을 찾아오고, 별빛은 나무의 마음을 살리기 위해 밤하늘에서 빛난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 말고/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유언」)라는 시인의 말은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문을 닫는 한 생애의 힘이 된다.
2.
조정애 시인은 초춘호(初春號) 침몰 사고라는 역사적인 시간을 현재의 시간과 연결하는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주로 다룬다. 따라서 그림, 조각, 건축 등은 본질적으로 공간예술에 속하는 주제를 나타내는데 비해, 시는 조정애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예술에 존재하는 주제를 추구한다. 조정애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제시한 대뇌반구(大腦半球)의 환상선(loop-line)을 참고할 수 있다. 시가 일반적 혹은 보편적 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바로 먼 기억과 생각의 환상선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곧 이성적인 삶이 감각적인 삶으로 편입되면서 신경의 보고가 일관성 있고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의미를 지닌 사상과 사고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이 입증하듯 환상선을 활용하지 않고도 특정한 유형의 시를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시각, 청각 또는 촉각 이미지의 보고일 뿐이다. 이미지스트들은 기억이라는 낡은 문을 닫음으로써 감각 경험의 새로운 문들을 열어주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은 보편적인 사상이 결핍된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현재의 감각적 충동으로부터 행동하는 저급한 신경중추만이 아니라 숙고를 통해 행동하는 인간 두뇌의 반구들을 재현하기 위해 활용했다. 숙고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구성된 이미지들이며, 느끼고 목격한 바 있는 것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3.
정세훈 시인은 열일곱 살 때 공장에서 작업하다가 안전사고로 참혹하게 즉사한 동갑내기 동료를 잊지 못한다. 소규모 공장들에서 일하다가 진폐증으로 작업장을 떠날 때까지는 물론이고 시를 쓸 때마다 그 일에 대한 슬픔과 분노에 목이 멘다. 그리하여 노동자를 살리지 못하는 시는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비정규직 노동자, 해직 노동자, 산업재해 노동자,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를 위한 투쟁의 노래를 부른다. “늙은 국수공장 주인”처럼 “낡은 국수공장 기계를/눈물로/방울방울 어루만진다”(「몸이 몸을 어루만진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바위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나무들과 같은 자세를 갖는다. 위장 폐업으로 문을 닫고 철거한 공장의 공터에 등 돌리지 않고 “노동을 하듯/꽃을 심는다”(「꽃을 심는다」). 생이 다할 때까지 노동의 뿌리를 지키겠다는 시인의 시들은 아프고 슬프지만 간절하고 애틋해서 따뜻하다.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노동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아울러 연대의 힘을 준다.
4.
금시아 시인의 작품들에서도 바슐라르가 분류한 물의 상상력이 지배한다. 맑은 물, 봄의 물, 흐르는 물, 깊은 물, 잠자는 물, 죽은 물, 무거운 물, 복합적인 물, 모성적인 물, 여성적인 물은 물론이고 우주의 물, 운명의 물, 슬픔의 물, 그리움의 물, 동백꽃의 물 등으로 변주한다. 난폭한 물을 지배하는 부드러운 물이 작품 세계를 이끌어 시간 의식과 세계인식을 펼치는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날을 “우당탕탕, 소나기가 한낮을 훔쳐”(「완장」)간 것으로, 통증이 심한 어머니의 삶을 “우울한 심기를 봉합하고 방수해도 우기는/어느새 관절을 뚫고 들어”(「비의 관절」)온다고 표현한다. 춘천 대보름 축제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함성을 “강물이 춤춘다”(「독륜차전(獨輪車戰)」)라고, 삿갓을 쓰고 바랑을 짊어진 채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로 비유하고 그의 책 읽기를 “바람 한 겹에, 물살 한 장에/유유히 필사”(「비서(飛絮)―김삿갓 1」)하는 것으로 이미지화한다. (중략) 화자에게 진중함을 일러준 호수는 풍경이 아니라 시간의 물이다. 삶의 시간이 스며든 호수는 깊고 무겁고 넓고, 그리고 움직인다. 움직이는 호수는 마중 나온 나비처럼 창문을 두드린다. 두꺼비의 등을 타고 물꼬를 보러 나선다. 은신처가 있는 집을 찾아 물소리가 졸졸 흐르는 길을 따라간다. 절명한 김유정의 문장들이 안타까워 소낙비에 젖으며 꽃점을 친다. 우기에 젖는 동안 사람에 들거나 사람을 들인다. 바람을 흉내 내는 고독을 출렁이는 방죽으로 데려간다. 쓸쓸한 그림자들의 목덜미를 물의 습성으로 간질인다. 징조도 없이 거듭하는 시행착오의 눈물을 닦아준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촘촘하게 끼인 그리움을 꺼내 물 위에 띄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깃발을 물의 기운을 넣고 흔든다. 소멸하지 않고 수백 년 만에 눈뜬 연꽃 옆에 멀고 먼 전략으로 부드러운 시를 심는다.
5.
박원희 시인이 제시한 길 중에서 이순(耳順)을 나타낸 작품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주지하다시피 이순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나이 예순 살을 이른다.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인격의 형성과정을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고 술회했다. 예순 살이 되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해 다른 사람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박원희 시인의 시 세계에는 공자가 술회한 이순의 삶이 여실하다. 모든 해를 살아왔지만 그 경험들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걸어가는 길의 끝이 있지만, 퇴로가 없다고 여기고 포기하지 않는다.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별을 따라 길을 간다. 원망을 잊은 지 오래고, 불효를 반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모님의 길을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길과 옳은 길을 걷는다. 삶은 언젠가는 막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곡예 같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많은 생명체를 품고 있는 산처럼 시인의 발걸음은 고요하고 넉넉하다. 그러면서도 시끄러운 세상이야말로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나는 터전이라고 여기고 들어선다. (중략) 화자는 떠난 길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자세로 나아간다. 삶의 가치를 견고하게 가지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시간에 함몰되지 않고 창공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방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로워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님의 길을 새기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한다. 자기를 긍정하는 현재진행형의 사회적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6.
손한옥 시인의 사랑은 시 세계를 이루는 토대이자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가족을 비롯해 인연들을 품는 시인의 사랑은 쓸쓸히 비를 맞고 있는 그림자에 우산을 씌어줄 정도로 자애롭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 오백 년 보고 또 보고 싶어 할 만큼 지순하다. 시마(詩魔)에 씌어 무당이 작두를 타듯이 백 편의 사랑 시를 짓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사랑한다」) 암송하고, “하늘의 별도 달도 서너 말씩 따가지고”(「구름의 방향」) 오려고 온몸을 헌신한다. 그 지심(至心)으로 몸이 아프기도 한 시인은 사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자고 한발 물러서지만, 사랑은 초봄의 뜰 안에 심은 청갓처럼 푸릇푸릇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에서 한 치 앞을 잊고 살아가도록 이끄는 동반자가 된다. 연두색 봄비를 맞으며 움튼 사랑이 어느덧 유록(柳綠)을 지나 시집 곳곳을 초록으로 채웠다. “사랑하는 누구라도 곁에 서면 좋”(「삼복에 겨울 코트」)다고 인연들을 감싸 안는 시인의 사랑은 지상에서 가장 선하면서도 아름답다. 시인과의 동행에서 맨 끝까지 이탈하지 않을 사랑이여, 영원한 도반이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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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화 시인의 시들은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선량하면서도 정연하다. 시는 고상한 정서나 그윽한 사상이 아니라 “일상의 잡다한 것과 닮아 있고/저잣거리 소음과 먼지 속에 섞여”(「발원지」) 있는 존재이기에 고심하는 밤이나 고단한 퇴근길에 싹튼다는 시론을 무결하게 완성한 것이다. 시인은 잡다한 것들을 끌어안고 “시시포스의 돌을 굴려 올리듯/시를 짓는다”(「시시포스의 돌」).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고통 속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시인이 뒤처져 있는 것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세상에 묻힌 시의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미로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시인의 길을 나무처럼 걸어가고 있기에 시인의 시는 현재진행형이다. 미진한 사랑을 향한 노래도 그렇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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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혜 시인은 기억의 넝쿨이 무성하게 뻗어나가 활짝 꽃 피고, 그 꽃들에 연두 나비가 날아오기를 희망한다. 시인은 희미해진 기억을 찾아 나래를 펼치고, 무지개 같은 기억을 담으려고 수레를 끌고 언덕을 넘는다. “색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별은 밍밍해서 서럽지 않”(「이별의 배경」)다고 노래할 정도로 정열적이다. 시인의 기억은 저녁 같은 어둠을 환하게 지피고, 얼어붙은 길을 오렌지 같은 햇살로 녹이고, 연보 같은 외로움을 연민한다. 한 물결에 생활을 쓴 가족 기록부를 집으로 가져오고, 흑백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창문을 열고 환희의 순간을 맞는다. 검은 웅덩이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꽃잎들을 꽃비로 흩날리기도 한다. 얽혀 있는 선 같은 기억을 풀어낸 시인의 시들은 “신이 발에 맞춰 자라나”(「신을 잃어버렸어요」)듯이 생소하다. 봄밤의 꽃 그림자같이 오묘하고도 매혹적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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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시인은 이쪽 모서리에서 저쪽 모서리로 제 그림자를 옮기는 나무를 따라 걷는다. 나무의 뒤꿈치를 종교처럼 바라보면서 우물물을 마시고 미용실에 들러 푸념 가진 사람들과 북적거리고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이라고 여기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오르내리며 별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초록색을 칠한다. “가계부를 적다/한풀 더 꺾여버린 여자”(「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의 눈물을 꺼내 비 그친 오후의 마당에 펴서 말리며 거꾸로 매달린 것들을 노래한다. 하늘의 텃밭을 호미로 고르면서 어머니가 좋아하던 별을 한 소쿠리 심고, “노란 밀밭에서 푸른 힘줄을 보이며 밀을 베는 백 년 전쯤의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고 싶”(「푸른색과 노란색」)어한다. 화물차 안에 놓여 있는 목장갑과 먹다 만 찐빵, 저쪽 모서리에서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발견하고 유등의 불빛이 난로처럼 비추어지기를 기도한다.
10.
조미희 시인은 달이 파먹다 남긴 캄캄한 밤에 자신은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풍요로운 고층 빌딩의 그림자 속에 숨겨진 그들은 한여름이라도 추울 수밖에 없고 아픈 곳도 보여주기 싫어한다. 어둠의 옷을 더 편하게 여기고, 부러지지 않은 희망을 지니고 있지만 뿌리를 키우지 못한다. 시인은 그들의 가난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가난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키워온 것이 가난이라고 당당하게 노래한다. 가난한 꽃과 가난한 낙엽과 가난한 근로계약서와 가난한 밥을 움켜쥐고 기적 같은 시를 쓰는 것이다.
11.
바람의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는 오새미 시인의 시들은 들꽃 향을 실어 오고 연둣빛 속삭임을 들려준다. 하늘을 응시하는 이파리처럼 한들거리고, 구름을 실어 온 나비처럼 햇살을 비춘다. 차가운 눈발을 녹이는 원기를 일으키고, 문양과 설렘 같은 화음을 낸다. 바람의 무게와 질량을 측정하는 저녁이 오면 시인은 가슴속에 담긴 상처와 슬픔과 눈물을 말려 발원지로 만들고 지나온 여정을 색칠한다. 마르지 않은 가슴을 새들의 바느질로 다독이고, 열정의 이름표를 현수막처럼 내건다. 바람이 닿은 시인의 시들은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바람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다」)고, 마침내 무성한 눈망울의 정원을 이룬다.
12.
김림 시인의 시 세계는 나무의 존재학 혹은 나무의 사회학이다. 시인은 바다의 길 끝에 선 어머니와 수렁에서 풀려난 아버지의 생애를 몸을 비운 나무 같다고 여긴다. 목백일홍을 꺼지지 않은 불꽃을 지닌 존재로, 은행나무를 풍성한 수다를 떠는 존재로 바라본다. 헐벗은 채 홀로 선 나무로부터 가난 증명서를 떼기도 한다. 어른들이 무시하고 싫어하는 아픈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가로수에게 고개 숙인다. 나무가 지나온 길을 따라 역사를 품고 광장에서 촛불을 든다. “생전에 빚진 이라면/오직 나무 한 그루”(「옥선(玉蟬)」)라는 마음으로 미시령에 오르자 거친 혈맥을 내보이며 환영하는 나무들, 시인은 그 앞에서 어깨의 높이를 회복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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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묵 시인은 30년도 더 된 헌책을 품을 정도로 시간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 기억되는 것을 더 바라는 나이라고 할지라도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사진 찍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젊은 날의 분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책을 사는 일을 책 읽을 시간도 함께 사는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시간의 존재로 인식하는 시인의 자세는 겸손하고 진지하면서 노나메기 세상을 지향한다. 시인에게 “세월의 발자국 따라/당신이 온 것처럼”(「누군가 온다」) 사랑도 인생도 역사도 강물이 되어 오고 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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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승 시인의 시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죽음 의식이다. 사자가 물소의 목을 물어도 “물소 추억과 사랑은 한 점 씹지 못”해 “물소 목숨은 먹지 못하고 고기만 먹은”(「울음의 기원」) 것에 불과하다고 했듯이, 시인에게 죽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끊어지는 일 이상을 의미한다. 시인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다. 삶이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음/먹는”(「죽음을 자장면이라,」) 것이며, 바닥에 깔린 죽음이 “나무를 키우고/햇빛을 통째로 물고 있”(「발바닥으로 듣기」)다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아침에 일어나 울타리와 뒤뜰과 산에 피어 있는 개나리며 홍매화며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보낸 조화(弔花) 같다고 생각한다. “햇빛은 매일 문상할 것이고/소나무는 상주 노릇 할 것”(「유서 즐겁게 작성하기」)이기에 자신의 장례를 치르지 말고 화장해서 땅에 뿌려달라는 부탁도 한다. 김수영 시인은 『메멘토 모리』를 번역한 뒤 해설하면서 “그대는 흙이니라, 멀지 않아 그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창세기』의 말이나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들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다”라는 『찬미가』의 한 대목을 새기고 상주사심(常住死心)을 확립했다. “죽음도 닦으면 닦을수록 반짝이겠다”(「죽음의 발자국」)라는 강태승 시인의 노래 또한 지상의 우리를 나무처럼 세우고 빛나게 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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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희 시인은 첫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갈매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갈매기는 공중에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차게 부는 바람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온몸의 힘을 다한다. 시인은 갈매기의 그 숨결을 들으며 자신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 속도가 경악할 정도로 빨라 인간 소외를 실감한다. 따라서 공동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동네 미용사와 지적장애아를 둔 어머니 등을 품는다.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를 비롯해 김남주 시인, 박광숙 소설가, 권정생 아동문학가, 안은미 무용가 등을 만난다.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박지원의 『열하일기』, 최진이의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 등을 읽기도 하고, 세월호 참사, 평화의 소녀상, 잃어버린 골목 등을 찾기도 한다. 민족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시인이 되고 싶은가 등도 고민한다. 시인은 자신의 문학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세상과 대결한다. 자본주의 속성에, 거짓 욕망에, 비겁함에 항복할 수 없다고 자신을 독려한다. 문학의 힘이 “현실에 발을 디딘 상상력에서 오며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반응하는 데서 온다”(「시가 부족한 게 아니라 삶이 더 부족하다」)라고 믿으며 바다 위의 갈매기처럼 맞서는 것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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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시인의 시집에서는 눈에 익은 얼굴들이 찾아와 귀에 익은 안부를 묻는다. “아이는 앙 울고 까르르 웃”(「잠귀」)고, 건기경보 3월인데도 아이들이 깔깔 웃는다. 할미꽃이 피고 꽃댕강이 지는 봄밤에 어디선가 쇠부엉이가 울고,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밤 귀뚜리가 운다. 쓰윗 쯔윗 울며 날아간 동박새의 울음이 나뭇가지에 걸려 울리고, 달이 뜨자 각다귀들이 서로 잡아먹을 듯 달라붙어 교성을 지른다. “죽은 할머니죽은고모죽은아버지죽은엄마죽은동생죽은 봉선이 언니 봄밤에 비명을 지르”(「소리들」)고, 캄캄한 밤에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무서운이야기를해줄게 무서운이야기를해줄게에”(「환절기에 듣는 동화」)라고 말한다. 축축하고 컴컴한 동굴에서 얼굴바위들이 소리 내어 구르고, 망자가 그토록 싫어하던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크게 운다.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오”(「갑자기」). 무거운 차이콥스키와 어두운 베토벤과 가벼운 모차르트의 음악도 들린다. 시집이 내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둠과 밝음을, 우연과 필연을, 불안과 평온을, 무서움과 안도를, 슬픔과 기쁨을, 그리고 함몰과 구원을 경험한다. 우리의 생은 얼마나 견고하게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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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 동인 시인들이 전하는 서정적이면서도 서사적인 발라드는 바다를 찜해서 차려낸 아귀찜 같은 맛이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여름 저녁에 핀 배롱나무꽃의 색깔이고, 회화나무 사이에 떠 있는 반달 같은 분위기이다. 인연을 맺었다가 풀어져 가버린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 잠 속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그리움은 인정처럼 깊고 따스하다. 시장통 모퉁이의 순댓국밥집이며 떡볶이와 라면을 파는 분식점을 지나면서도 공복을 채울 수 없어 길가의 토끼풀을 뜯어 전을 부쳐 먹고 싶어 하는 노년 실업자의 토로는 슬프고 아프다. 독립군을 때려잡고 정신대 공출까지 나섰던 일제 때의 순사가 해방 뒤에는 경찰로 변신해 배고픈 민중의 배를 찬 만행은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국민만 섬기겠다며 국민에게 거짓말하는 정당을 없애자는 목소리는 함께 구호를 외치게 한다. 인공지능 사회 이후 로봇과 로봇이 사람을 낳고 식물과 짐승이 만나 잉태하는 등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액체사회의 도래 예고는 허구적인 것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18.
조숙향 시인은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붉은 저녁 쪽으로 가고 있다. 가는 동안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어디쯤에서 길을 잘못 든 것 같기도 해 현기증을 느낀다. 길이 흐리고 어둡고, 허공이 커다랗게 다가오기도 한다. 제 그림자의 상처를 응시하고, 또 다른 나비의 죽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비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도,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도, “신을 이해하는 것”(「두텁게 다가오는 것-팡세」)에도 어려움을 갖는다. 하지만 나비는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견뎌내야 한다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기고, 이마에 땀방울이 벚꽃처럼 피기도 한다. 허공의 길을 끌어당기는 나비는 상처를 입은 채 언덕 위에 불끈 솟아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지나간 길에 햇살이 푸른 것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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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 팔랑팔랑 소금쟁이 사뿐사뿐 토끼풀 방긋방긋 전봇대 아저씨 하하하 아기 구피 피용피용 개울물 찰랑찰랑 비눗방울 동글동글 봄비 토닥토닥 나팔꽃 까꿍 까치 깍! 깍! 깍! 내 마음 싱글벙글 ... 모두 모두 신났어요 하하 호호 우리를 불러요 함께 뛰고 웃고 손잡고 놀지 않을래요? (이성우 시인의 동시집 『감귤아 도와줘』가 손짓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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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별유천지란 문패가 달린 예쁜 대문을 이애리 시인이 열어주기에 냉큼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대했던 무릉도원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석회석 광산에서 끼니를 때우는 시인의 아버지와 숙부와 외삼촌, 그리고 장독대 항아리에 쌓인 돌가루를 닦는 어머니가 보인다. 돌무덤을 안고 저세상의 별이 된 장 씨 아저씨도 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두타산 계곡에 핀 쪽동백과 이기령을 넘는 잎새바람과 마늘밭에서 숨바꼭질하는 고양이가 보인다. 삼화시장의 떡방앗간에서는 깨 볶는 냄새가 고소하고, 월평경로당에서는 한글을 읽고 깨치는 어르신들이 즐겁다. 구름이네 농장에서 여물어가는 감자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무릉별유천지의 출입문을 잊고 말았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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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시인에게 ‘오늘’은 기원의 중심이고 지도의 중심이고 안부의 중심이다. 얼굴의 중심이고 방향의 중심이고 단련의 중심이다. 시인은 그 “오늘을 찾기 위해 어제 덮은 이불을 걷”는다. 어제처럼 말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오해하는 습관이 강한 그늘에서 오늘을 이해하고 오늘의 궤도를 유지하고 오늘의 창을 닦는다. 오늘을 살려내려고 살기를 품은 채 눈물의 풍경을 닦아내고 목표의 모퉁이라도 붙잡으려고 근육을 푼다. 오늘을 번식시키려고 아이가 먹다 남긴 음식을 주워 먹는다. 오늘의 주름을 펴려고 늙어가는 입김을 조금씩 불어 넣는다. 오늘의 신호를 기다리고 오늘의 담장을 세우고 오늘의 중력을 적용한다. 미래의 윤기 나는 거짓말을 들으며 오늘의 허리를 튼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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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 시인의 시집 『광부의 하늘이 무너졌다』는 극한적인 작업환경에서 땀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잃은 광부들에게 바치는 노래이자, 막장 정신으로 노동 탄압과 산업재해에 맞선 광부들의 투쟁 보고서이다.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라는 시인의 외침은 질곡의 탄광사는 물론 광부들이 처한 현실을 강하게 일깨워준다. 광부들이 꿈꾸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희망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절실하기에 우리는 광부들이 이루어가는 역사를 기대하고 성희직 시인과 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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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아 시인의 시는 “생의 어긋난 통점들이/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움켜쥐고 살아내는 사람들 속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지만 “눈보라 앞세우며 장사 밑천 한 보따리 머리에” 인 어머니와 “이름표를 차고 실내화를 신고” 보호센터로 등교하는 아버지를 품는 데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시인의 시들은 뿌리가 깊고 단단해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가지를 키워 올려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대파며 양파며 “마늘 까기의 달인”이자 무한 인심을 기부하는 “주공마트의 대명사” 이웃 노인은 물론이고 전태일, 노숙자,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아르바이트 청년들, 사라진 공구장인들, 코로나19의 폭격으로 무너지는 자영업자와 노동자 등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보도연맹사건, 여순항쟁, 제주 4·3항쟁, 5·18민주화운동, 미얀마 민주화운동 등의 역사 속으로 당당히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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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를 주워 파는 일로 힘겹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보살펴 주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혼자 외롭게 지내는 할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후미진 갯벌에 묻힌 ‘푸른 병’은 떠나간 엄마 대신 아빠와 지내는 민규를 위로해 줍니다. 푸른 병이 건네준 편지에서 ‘르네’라는 아이는 하늘나라로 간 엄마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으슥한 골목에서 데리고 온 고양이 ‘해리’는 아빠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진호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호는 엄마 아빠의 온기를 알기에 제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해리를 마침내 돌려보내 줍니다. 이 동화책에 등장하는 기발한 상상력의 인물들은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한부모 가정이나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통해 가족이 위협받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씨가 빠진 해바라기처럼 잇몸을 다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어.”(「잘 가, 그림자」)라는 장면에서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줍니다. 가족이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인지를 뛰어난 사회 동화의 감동으로써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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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환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신이 “물려받은 건 오직 건각(健脚)뿐”(「복숭아뼈를 위하여」)이라고 여기며 달린다. 건널목을 건너고 철교를 건너고 목 잘린 가로수 길을 첨벙거리며 건넌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스산한 길에 떨어진 마스크를 밟으며 발꿈치를 달군다. 그에게 달리기는 결코 여가활동이나 취미 생활이 아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걸음마를 뗀 이후” “무엇을 향해 나아갔던”(「첫,」)가 되물어보고 사무친 마음으로 언덕을 오른다.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새벽길을 나서서 김밥집에 들른다. 화자는 복숭아뼈까지 힘을 내어 달린다. 못에 찔려 피가 나고 속살이 드러났지만 야무지게 견디면서 “불꽃 같은 몸부림의 노래”(「스티로폼 서정」)를 부른다. 더이상 울지 않기로 다짐하고 신념으로 흘리던 눈물도 그친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사랑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기꺼이 나아간다. 자식을 낳으려고 출렁이는 강물을 따라 흐른다. 공중이 새들에게 젖을 물리고 길이 끝나지 않은 바퀴에게 젖을 먹이듯이, 한 마리 까치가 더 멀리 날아가도록 지킨다. “길거리에 서서” “꾸역꾸역 밥을 삼켜본 짐승만이 볼 수 있는/지평선”(「길밥의 형식」)을 하늘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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