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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름:한용운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879년, 충청남도 홍성 (처녀자리)

사망:1944년

최근작
2024년 1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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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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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30년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 당수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27년 경성지회 회장
1924년 대한불교청년회 초대 총재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1914년 불교강구회 총재
1914년 조선불교회 회장
1913년 통도사 불교강사

저자의 말

<나를 쳐라> - 2005년 12월  더보기

스님께서는 문자를 전공하지 않았어도 그 시의 규범과 정공精工이 어떤 당대의 시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스님의 변화무쌍한 행리는 밝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과 같음이로다. 아직도 선지禪旨의 오묘한 운율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으니 스님의 경지를 어찌 의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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