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우리 반에 나만큼 뚱뚱한 아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간단한 건강검진을 하였고, 그 아이는 ‘빈혈’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전해준 양호선생님의 말에 반 아이들이 모두 다 웃었다. 웃지 않은 아이는 딱 두 사람 뿐이었다. 그 아이와 나. 콤플렉스란 참 슬프고 아픈 거다. 콤플렉스에 대처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벗어나거나, 평생 안고 가거나. 이 소설을 쓰면서 내가 홍희를 안아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몇 번이고 “홍희야, 괜찮아”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그 덕분인지, 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자라면서 연년생 언니와 나는 ‘1일 1전쟁’을 치렀다. 동네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먹질을 하며 싸우기도 했고, 말다툼을 하다가 밤을 새운 적
도 여러 번이다.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그렇게 싸웠다.
하도 싸우다 보니, 엄마가 우리 둘의 머리카락을 묶어 뒀다. 이나와 주나 자매 사이에 일어난 일 가운데 많은 에피소드가 실제 경험담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의 오답 노트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아, 난 글쓴이처럼 살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니까 이 글은 왜 내가 시시하게 살게 되었는지, 나아가 어떻게 시시한 어른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 삶의 이야기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어른을 준비하는 너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길, 그리고 나의 진심이 너에게 닿길. (프롤로그에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내가 만났던 십대들 덕분이다. 지난 7년 동안 350여 학교에서 많은 십대들을 만났다. 처음 강연을 갔을 때만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는데, 이제는 한 시간이 너무 짧기만 하다. 해주고 싶은 말은 많은데 10분의 1도 채 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십대들을 직접 만나면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글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내가 만났던 십대 아이들과 함께 쓴 것이다. 십대들을 만나며 나의 십대를 돌아보게 되었고, 현재의 나와 마주하게 되었고,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과거 어딘가에서 열다섯 살의 김혜정이 현재를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아이에게, 그리고 언젠가 열다섯 살이 될 나의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더 딱딱해지고 그저 그런 어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전에 이 말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내가 별 볼일 없는 어른이 되어감을 느낄 때 다시 이 글을 꺼내 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나는 제법 꿈이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어느 샌가 현실의 기준에 나를 맞춰 세우면서 “이건 안 돼.”, “내가 저걸 어떻게 해.”라며 시도도 하지 않고 계산부터 했다.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게 정말 싫었는데, 내게 시시한 어른이 묻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십대 때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요즘 많은 십대들이 기대하지 않고 꿈꾸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럴 때면 그냥 좀, 실은 많이 슬프다.
2년 전 봄, 십대들의 창업 이야기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글쎄요, 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내 몫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업이라든지 경영이라든지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안을 받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여울과 지후, 다솜, 유준이란 인물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아이들이 어디까지 갈지,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도 무언가에 막 도전하고 싶어졌다. 내가 주인공 아이들이 된 것마냥 가슴이 뛰었다. 아이들이 경험한 잘된 실패를 나도 겪고 싶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설렜던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잠시나마 설렜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기대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작가가 이야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작가를 택한다는 말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말을 실감했다.
3년 전 가을, 어쩌다가 아침 9시라는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무료함에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맛집 사장님들이 40~50대의 나이 든 분들인데, 특이하게 20대 중반의 젊은 남매가 사장님인 집이 소개되었다. 식당을 운영하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남매가 식당을 맡아 운영 중이었다. 잠깐 방송을 봤지만, 그 이후로 계속 그 남매와 식당이 떠올랐다. 그들이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했고, 진심으로 잘 살고 있기를 바랐다.
남매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았고, 재규와 재연이 라는 인물로 나타나 자꾸 날 불렀다. 하지만 시작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무게에 도저히 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미뤄두고 있는데, 2012년 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베를린자유대학에 가게 되었다. 홀로 이국땅에서 4개월을 지내면 매우 외로울 것 같았고, 그곳이라면 재규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듯했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작정하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만난 학생들과 교수님들 덕분에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그곳에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채워졌다. 한국말을 유독 잘했던 빈센트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자기 이름이 빈센트 반 고흐와 같지 않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빈센트와 반 고흐가 이야기로 들어왔고, 반 고흐를 만나기 위해 6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에 다녀왔다. 이은정 교수님은 정성스런 집 밥을 대접해주셨는데, 그 밥이 너무 따뜻해서 집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다.
베를린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그곳이 내게 준 따뜻함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를 쓰지 못했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거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다.
한 해에 6만 명에 달하는 청소년이 학교를 그만둔다고 한다. 1퍼센트라는 수치는 결코 작지 않을뿐더러, 학교에 다니면서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설이 해답은 되지 않겠지만, 예전의 나와 지금의 너,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