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꽃들은 허물어진 화단에서 저 혼자 피고 졌다. 나는 풀이 무릎까지 수북하게 자란 마당에서 일회용 봉지커피를 타 마시며 노근리 쌍굴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노을이 지면 마당의 풀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드러눕는데 어떤 꽃도 폐가의 풀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이 소설은 몸에 관한 이야기이자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왜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자연사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슬픈 일인가? (……) 이런 질문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됐다. 2013년 『자음과모음』 겨울호에 ‘용의자 김과 나’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해 2014년 가을호에 끝내고, 3년의 퇴고 과정을 거쳤다. 퇴고에 시간을 많이 쏟은 것은 악 속에 숨은 선, 선 속에 숨은 악에 관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일이 쉽지 않아서였다.
지난 4월, 기생 부용의 산소를 찾았다. 봉분의 잔디가 하도 프르러 눈이 아팠다. 나는 묏등에 가만히 손을 갖다대었다. 그대가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놓치지 않고 쓰겠노라고, 상상이 아닌 짐작으로. 나, 적지 않은 날들을 살아왔으니 이제 짐작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이 땅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많은 기생들에게, 그들의 빈손에, 그들의 맨발 위에 이 소설을 바친다.
고백한다.
나는 요리할 때마다 교활했다.
내 요리가 먹는 사람의 눈과 마음에 각인되게끔 치밀하게 계산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어디서도 먹을 수 없는 엄마표 요리를 개발하느라 내 딴엔 노력했다. 훗날 너희가 어느 곳에 살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엄마표 요리를 몸살처럼 떠올리기를 바라며 통계피의 매운 향을 빌려오고 거피한 들깻가루를 흩어 뿌리고 뽀얀 잣알을 일일이 눌러 으깼다. 고기에 불맛을 입히기 위해 숯불과 같은 온도로 그릴의 버튼을 교묘히 조절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나쁜 머리를 바삐 굴려야 했으며 내 헐한 손을 쉼 없이 놀리는 고되고 지난한 과정이었으니, 설령 의도가 삿되었다곤 해도 진정성까지 의심하지는 말아라, 나의 아이야.
말에도 맛이 있다.
자, 그럼 여기서 고들빼기를 떠올려보자.
고들빼기라고 말하는 순간 쌉싸래한 맛이 입천장을 자극해 침이 괸다. 모든 음식은 저마다 여타 음식이 넘볼 수 없는 고유한 맛을 지니고 있다. 고들빼기의 맛과 고들빼기라는 이름이 어쩜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누구도 쌉싸래한 이 맛에 고들빼기 외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리.
다시마는 또 어떤가.
다시마라고 부를 때 혀끝에 부드럽게 말리는 발음. 고들빼기와는 다른 깊디깊은 암갈색. 그 기품 있는 암갈색이 다시마라는 이름과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한 맛으로 다가와 쓰린 속을 달래준다.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에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 냄비 앞에 서 있으면 요리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게 보인다. 그건 물론 다시마다. 여러 야채와 생선이 어우러져 맛을 내는데 다시마만 퉁퉁 불은 몰골로 국물에 어중간하게 떠 있다. 내가 가진 바다의 맛을 모두 주었으니 제발 건져달라고 통사정하는 얼굴이다. 기꺼이 씹히지 못하고 국물 맛을 내는 데 잠깐 사용되다 버려지는 다시마는 그래서 그 이름이나 맛에 비릿한 슬픔의 기운이 감돈다.
그런가 하면 나이에 따라 미각도 달라진다. 십대와 이십대는 단맛에 홀리기 쉽고 삼십대와 사십대는 신맛이 당기고 오십대는 쓴맛에 혀가 움직인다. 이토록 간사한 혀와 입맛이라니……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 가운데 도도하게 오른 주요리에 시선을 빼앗긴다면 그대는 기운찬 젊은이가 분명하다. 밑반찬에 눈길이 가는 사람, 오로지 제 가진 한 가지 맛을 고수하며 식탁 가장자리에 줄기차게 오르는 밑반찬에 젓가락이 자주 간다면, 나는 그대가 진정 무섭다. 그대는 대단한 고수이거나 기운이 없는 사람, 천성적으로 사려 깊거나 앞에 나서는 걸 꺼리는 사람, 실패만 되풀이하는 운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이 글을 읽을 그대, 내 판단이 너무 혹독한가?
요리는 원래 혹독한 것이다. 냉정하게 밑간하고 두 번 이상 뚜껑을 열지 말아야 국물 맛이 유지되는 것도 있다. 하여, 요리가 곧 인생이다.
2018년 11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오래 곁에 두어 눈독이 새파랗게 올랐다. 첫 소설집 <토란>을 낼 때는 조사 하나하나를 가지고 씨름했다면, 이번엔 조사도 조사지만 단편 한 편을 넣느냐, 빼느냐로 고민했다. 원고를 넘길 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편 하날 뺐다가 교정 볼 때 그걸 추가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역시 다음 소설집에 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한 권의 문을 여는 것과 닫는 것. 두번째, 세번째로 들어갈 소설들. 즉 목차도 많은 고민 끝에 순서를 결정했다. 각각 다른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잘 읽어보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어느 나른한 봄날. 난 겁도 없이 녹이 슨 철로를 통째 삼켜버렸다. 쇠에 난 녹이 그 쇠를 먹어 치운다는 건 알았지만 몸주인 나까지 갉아먹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때때로 뱃속이 거북했으며, 잊을 만하면 녹슨 철로 위를 덜컹거리며 부규칙하게 달리는 기차 바퀴 소리가 목울대를 뚫고 쓴 물처럼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녹을 먹고 녹이 나를 먹는구나.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밤 사이, 철로 가에는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 따위의 잊힌 꽃들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났다. 왜 지금 하필이면 아주까리와 맨드라미, 채송화인가? 입춘 무렵, 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어쨌든 가거라,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내 청춘의 자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