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다섯 해 가까이 썼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엮는다. 작품들 대부분이 가재골 우거에 와 묻힌 뒤 만든 이야기들이다. 그동안 나는 이곳 푸나무와 뭇짐승들, 그리고 갖가지 자연현상들을 무슨 경전처럼 받들고 읽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지닌 의미와 값을 내 나름 읽고 새겨 보려 한 것이다.
이제 작품 만드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다. 한 갑자 시를 쓰고 보니 쓰잘데없는 관성도 생겼다. 또 시의 언술이 설명으로 툭 빠지기도 한다. 탓은 나이 탓밖에 할 게 없다. 이다음 과연 시집 하나 더 문세(問世)할 수 있을까 저어된다. 앞으로도 작품이야 만들 터이다. 시가 나를 끌고 가기도 하리라.
차(嗟)라. 평생 시의 길에 선 나그네는 그 발걸음 멈출 수 없는 게 숙명인 것을.
임인년 초봄
가재골 우거에서
호랑이 등에 올고 달리면 끝장까지 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기호지세(騎虎之勢)’란 옛말 그대로 시를 타고 달리다 어디쯤 나도 끝날 것이다. 요즈음 운명이란 그런 것이고 삶 역시 그런 우연이란 생각에 곧잘 황홀해한다.
그동안 오래 더듬더듬 매만지던 「마음經」도 일단 마무리했다. 생각의 좀도둑질도 끝난 셈인가. 개별 시집으로는 이번이 일곱번째다. 결코 부지런한 다수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밀고 갈 수 있는 한 갈 생각이다.
막바지 스퍼트인가 혹은 까닭 없는 조바심인가. 지난번 산문집 <말의 결 삶의 결>(2005) 이후의 글들을 모아 엮는다. 대략 십 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계제가 있을 때마다, 비록 주문 생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마다하지 않고 글을 써 왔다. 이번에 그 글들을 묶으며 새삼 앞에 던진 물음 앞에 서야 했다. 곰곰 가늠컨대 앞으로 또 산문집을 엮으리란 자신도 그럴 기회도 없을 듯해서다. 나이 탓만은 아닌 것이 몇 해 전부터 나는 산문 쓰기를 접었다. 실제로 몇 군데선가 온 청탁도 거절했다. 그런 글쓰기에 필요한 집중력도 지구력도 현저히 떨어진 사실을 그 즈음 절감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십여 년 치 글들을 가급적 빠트리지 않고 한자리에 묶고자 힘썼다. 결국 책의 허우대만 그만큼 커져 버리고 말았다. 나로서는 과연 막바지 스퍼트인가 혹은 까닭 없는 조바심인가.
그때그때 생산된 글답게 한자리에 묶고 보니 품새가 예사 허술한 게 아니다. 이따금 비슷한 소리가 중복되기도 하고 나름 투식화(套式化)한 어사도 많이 눈에 띈다. 할 수 있는 한 외과적 수술 내지 성형을 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고민 끝에 그대로 넘어가기로 작심했다. 집필 시 생각의 미숙함이나 당시 주어진 글의 여건들을 고려할 때 어설피 가감 않는 것이 되레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그게 내 생각의 변모한 궤적을 뒤좇아 확인하는 데도 더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반면 일부 글들은 독자를 지나치게 염두에 두었거나 지면(誌面) 특성에 맞춰 썼던 탓에 그 굴곡이 큰 점, 많이 미흡하고 많이 아쉽기만 하다.
왜 시는 불교와 만나는가.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연작시 '마음經'을 써 나가며 나는 줄곧 이 물음을 안고 씨름을 했다. 주로 선불교를 공부하며 내 시와의 미학적.인식론적 친연성을 도모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작 시편들을 만드는 틈틈이 시와 불교에 관련한 몇 편의 산문들을 써 왔다. 이번 책에도 <한국시와 불교적 상상력>(2004) 이후 썼던 그 방면의 몇몇 글들을 묶었다. 그 글들을 묶으며 확인한 점은 내 공부의 무게중심은 어디까지나 불교보다는 시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시인으로서 또 우리 근현대시를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의 당위이자 본래적인 한계였던 셈이다.
나는 짧지 않은 기간을 교직에 몸담았었다. 그 기간 함께 우리 근현대시를 공부한 학연으로 나는 여러 시인들을 만났다. 이들과의 학연이 꽤는 크고 엄중해서일까.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나는 이들의 시를 읽고 그 정신적 궤적을 부지런히 살펴 왔다. 이 책의 3부와 4부의 글 상당수는 나와 학연을 나눈 시인들의 작품에 관련한 것들이다. 나로서 다만 바라기는 이들 작품론들이 지난날 우리 시의 여러 쟁점이나 전개 양상과 함께 읽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뜻하지 않게 귀촌을 했다. 그리고 변함없이 작품을 썼다. 이번 시집은 귀촌 이후의 작품들로 엮는다. 아래 글은 그 귀촌의 후일담이다.
“그 외진 산골에 들어가 어떻게 살어?”
“괜찮습니다. 대학 선생 오래 한 덕 보는 건 혼자서도 잘 논다는 거지요. 아마 저 혼자서도 잘 놀 겁니다.”
얼마 전 집안 형님 한 분을 만나 여러 얘기 끝에 이런 수작을 나누었다. 선대(先代) 조고(祖考)의 묘하(墓下)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귀촌을 한 다음이었다. 동탄 신도시에서 쫓겨 나올 때 우리 집안은 이곳 산골로 선대 조고들을 모시고 내려왔다. 그리고 십 수년을 지나 나는 학교 일을 접었고 백수 노릇도 그만 지겨워진 끝에 이 마을로 낙향한 것이었다. 덩달아 학교 일할 때 보던 각종 자료와 책, 잡지들도 여기에 와 비로소 제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여기저기 끌고 다녔던 책짐들인데 역시 나를 따라와 정착을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지금껏 막연하게 무엇엔가 쫓긴다는 도시적 삶의 강박도 이곳에 와 나는 내려놓게 되었다. 대신 하루의 긴 시간 대부분을 혼자서 놀며 사는 팔자가 되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시간들에 제임스 조이스, 헤르만 헷세, 마루야마 겐지와 같은 작가들을 만나 논다. 그도 아니면 유실수를 비롯한 나무들 가꾸기나 터앝 일구는 일로 메운다. 그 탓일까. 나는 새삼 이곳의 새와 짐승, 나무들을 각별하게 상면하게끔 되었다. 뿐만인가. 아침저녁 놀과 달, 별들의 전에 몰랐던 품새와 움직임과도 만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이들, 자연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작품들 속에 두루 자리 잡는다. 겸해서 졸시에다 “앞산 하늘 끝 뜬 노을 아내 삼고 뒷산 고라니 자식 삼네” 하는 허황한 수작까지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송나라 때 시와 그림만을 그렸던 전업 시인 임포(林逋)는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은거지의 매화를 아내로 삼고 두루미를 자식 삼아 살았다고 한다. 또 죽을 때는 생평에 썼던 시와 그림을 모두 불살랐다고도 한다. 그렇다. 저 철저한 은일의 삶을, 그 흥취를 내 어찌 감히 흉내라도 낼 터인가. 그렇긴 해도 마지막 생을 위해 들어온 이 산골 자연 공간이야말로 내 말년 와유(臥遊)의 창작 산실이 아닐 것인가 싶다.
―산골 자연과 보내는 한 시절?
2018년 이른 봄 오류헌(五柳軒)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