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문학과는 다르다. 영화에는 가시적 이미지가 있다. 영화는 이미지의 흐름이다. 이미지의 운동이다. 거기에 소리가 얹힌다. 언어가 있다. 이 두 축의 결합?결렬이기도 한 봉합?은 이론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형상과 담론으로 되어 있으며, 언제나 이 양쪽에서의 감상과 이해가 필요하다. 영화는 영화 안의 세계인 디제시스의 영역과 그것을 지지하는 메타 영역으로 갈라져 있다. 영화는 양의성의 예술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 않고서 우리는 세계의 비의에 다가갈 수 없다. 혼란스러움은 반성적이며, 그런 한에서 생산적 경험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인공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리얼’을 위협하며 ‘리얼’이 무엇인지 묻는다.
시나 소설은 독자가 혼자 읽는 것이다. 영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혼자 보는 것이지만,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관객은 혼자가 아니다. 이런 경험의 영역까지를 고려할 때, 우리는 영화를 더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다.
(…)
역사가 끝나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꽤나 신기한 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오던 빛, 장대비가 내리던 날의 제 창문에 비친 빛, 이번에는 그것을 ‘레몬옐로’라고 불러봅니다. 투명해져가는 몸을 끌고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지만,
여러분, 저는 ‘그 빛’에 이른 것일까요?
2018년 5월
문학계의 사건들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 민음사의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 폐간과 『릿터』 창간. 『릿터』 창간호에 아이돌 스타 ‘종현’ - 보이 그룹 ‘샤이니’ 보컬 - 의 인터뷰와 사진이 게재되었다는 것은 사뭇 획기적인 일로 여겨진다. 『세계의 문학』이 세계문학의 고전들을 소화하면서 한국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한 민음사의 전망을 대변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때, 『릿터』의 변화는 매우 급격한 것이었다. 둘째, 독립잡지 붐. 이 붐은 ‘신경숙 표절 사건’과 거의 동시에, 혹은 조금 뒤미처 일어났다. ‘신경숙 표절 사건’은 근대문학 제도의 유효성에 대한 여러 파생 담론들을 발생시켰거니와, 이 담론들이 대형출판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문학계의 환경에 작은 파열부를 만들어낸 것이 독립잡지 붐의 형태로 불거졌다고 볼 여지가 있다. 독립잡지가 주류 대형잡지에 대한 대안 매체로서 등장한 셈이다. 독립잡지의 체제를 살펴볼 때, 가장 주목되는 것은 ‘비평의 소거 消去’ 현상과 일반인 투고란의 마련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복잡하지만, 그 방향은 독자 친화적이라고 비교적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 셋째, 문단 내 성폭력 사건. 이 사건은 ‘문단’을 참칭한 일부 파렴치한 문인들이 일으킨 추문이지만, 그것을 넘어서 등단제도나 문예창작학과 시스템, 입시제도 등 근대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제도의 어두운 면이 조장한 범죄로 다루어야 할 면도 있다. 그 사건에 나이 든 권력자들뿐 아니라 젊은 문인들이 포함된 것은 대형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마련한 스타시스템의 부작용 탓도 있다.
다음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여기에 덧붙여두고 싶다. 첫째, 구로다 나쓰코 黑田夏子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쿠타카와상을 수상했다는 것. 대형 잡지사의 작품이 아니라 『와세다문학』에 실린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가로 쓰기를 하고 있다든지 히라가나 중심의 글쓰기였다고 하는 것 등은 부차적인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아베 가즈시게 阿部和重와 이사카 고타로 伊坂幸太郞가 『캡틴 선더볼트』2014라는 장편소설을 ‘합작’으로 내놓은 것.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결합이라는 맥락에서 이 사건은 세간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풍토에서 보면, 이 사건은 ‘합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셋째, 코미디언 마타요시 나오키 又吉直樹의 아쿠타카와상 수상 2015. 여기에 여러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수상작 『불꽃』은 이미 국내에도 번역·소개되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사사키 아타루(佐佐木敦)에 의해 ‘문학의 상대화’라는 맥락에서 조명된 바 있다 『ニッポンの文學』, 講談社, 2016.
2010년대 한일 양국에 걸쳐 일어난 이상의 사건들을 물론 ‘문학의 상대화’라는 말로 압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화’라는 말은 사태의 심대함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면도 있다. 더 거시적으로는 ‘근대의 종언’이라는 맥락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끝!’ 섬광과 폭음이 없는 ‘끝’, 말하자면 ‘신념의 부서짐’이라고 할 만한 ‘세계의 끝’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근대인을 멸절시키는 빅뱅은 없다. ‘세계의 끝’은 근대인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지리멸렬한 세계의 대명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끝’에서 근대적 작가들이 대면하게 되는 것은 아즈마 히로키 東浩紀 식으로 말하면 ‘동물화한 독자들’이다. 여기서 ‘동물’이란 ‘문학의 규칙’에 익숙해져버린, 문학을 ‘공략집’과 같은 일종의 매뉴얼로서 수용해버린 ‘길들여진 독자’를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자’가 아니라 이미 ‘소비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비자’라는 말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세계의 끝’은 모든 가치가 교환가치로 치환되어버리는 ‘말류 자본주의 사회’다. 이곳에서 문학계는 연예계처럼 바뀌어버린다. 스타와 뚜쟁이가 있고, 문학은 잘 모르는 팬 클럽이 득세한다. SNS는 마케터들이 침을 흘리는 공간으로 주목 받는다. 모든 문학 행사에 텔레비전 쇼의 요소가 가미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문화의 위기 현상은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진지한 독자들’과 ‘진지한 비평’이 존재했던 시대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엘리트 근대’는 종종 향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강의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낯선 대학생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강의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리터러시는 현격하게 낮아졌고, 문학은 이제 학생들의 안중에는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탄식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대는 이미 끝장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부스러기로서 제도적 장치들은 일제히 삐걱대는 소리를 내더니 여지없이 불쾌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굵직한 표절 사건이 일어나고,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이 삐져 나왔다. ‘등단 장사’나 ‘시집 장사’의 문제도 어디선가 터져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 우리가 결별해야 하는 것은 근대의 낡은 제도들이다. 신춘문예나 신인추천제를 통해 작가를 만들고, 문학상 제도를 통해 작가를 관리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작가가 되지 않아도 인생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쓰고 싶은 열망이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작품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문학청년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하는 시민이 있고,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가보다 더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판사나 잡지사의 위계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는 문학계의 서열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 그것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 기존의 잡지 생태계를 교란하는 새로운 매체를 스스로 만들고 주변의 지인들과 함께 향유하는 데서 작은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마저 등단한 사람이나 등단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구분 없이 누구나 쓸 수 있고,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한 비평을 받을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좋다.
새로운 문학, 혹은 다른 문학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의 문학도 역시 근대문학의 이상 理想을 계승하는 한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즉,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문학은 그 인간 이해에 복무한다는 것 말이다. 속 시원하게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정말 답답한 말을 한다고 하는 독자들의 비난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지만, 이것이 내가 ‘세계의 끝’에서 발견한 ‘윤리’라면 ‘윤리’다.
이 책은 2013년 이후 각종 문학매체에 발표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첫 평론집 『환대의 공간』현실문화, 2013이 나온 지 3년여 만의 저서인 셈이다. 조금 무리를 해서 많은 글을 써왔고, 그것을 정신없이 엮은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어떤 일관된 기획 속에서 쓰였다고는 할 수 없다. 거의가 시의적인 글들이다. 『환대의 공간』에서 많이 벗어난 논의를 하지는 못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나는 문학환경의 변화나 문학 자체의 위상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이 책에서는 전작에 비해 ‘독자’에 거는 기대치가 높아진 편인데, 그것은 잡지 생태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독립잡지를 거점으로 하여 ‘즐겁게 놀 수 있는 독자’라면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두서없이 여기저기 발표한 글들을 엮은 것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한국문학에 대한 내 고민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제주도에서 쓴 것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나와 서울 중심의 문학계를 보고 있으면, 서울에서 안 보이던 것들도 더러 보인다. 서울에서 할 수 없었던 말을 여기에서는 할 수 있다. 그런 용기가 생긴다.
이 책은 제주도의 독립출판사 ‘파우스트’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독립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는 것은 내게는 하나의 실험이다. 이것이 대형 출판사 중심, 대형 온라인서점 중심의 문학 생태계를 교란할 만한 실험은 아니지만, 거기에 동의하고 편승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면에서 그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다고 자평하고 싶다. 출판을 떠맡아준 ‘파우스트’의 홍임정 선생님, 안민승 선생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2016년 세모 - 서문
나는 시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좋은 시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유행에 뒤떨어지는 시만 쓰고 있다. 게다가 실패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버젓이 독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만 나는 배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언제나 주장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더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눌변이고 지나치게 외곬으로만 살아왔다. 모든 면에서 이기는 일보다는 지는 일에 더 익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천생 시인' 보다는 '심지 굳은 사람'이 되고 싶다. 지는 게임에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은 졌다고 투덜거리지 않는다.
첫 시집을 독자 여러분께 수줍게 내놓는다. 여기 묶인 시들은 시 자체나 시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위안 같은 것도 있지만 자기 연민이 되는 것은 피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리고 울음의 끝에는 포옹도 있다는 것을 들려드리고 싶다.
나는 시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좋은 시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유행에 뒤떨어지는 시만 쓰고 있다. 게다가 실패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버젓이 독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만 나는 배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언제나 주장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더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눌변이고 지나치게 외곬으로만 살아왔다. 모든 면에서 이기는 일보다는 지는 일에 더 익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천생 시인’보다는 ‘심지 굳은 사람’이 되고 싶다. 지는 게임에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은 졌다고 투덜거리지 않는다.
첫 시집을 독자 여러분께 수줍게 내놓는다. 여기 묶인 시들은 시 자체나 시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위안 같은 것도 있지만 자기 연민이 되는 것은 피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리고 울음의 끝에는 포옹도 있다는 것을 들려드리고 싶다.
2007.11 - 초판본 시인의 말
우주의 시간은 길고 길어서 우리의 이 삶과 똑같은 삶이 언젠가 꼭 되풀이되는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또 그런 일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시간의 굴레 속에서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약간의 차이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첫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서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것과 조금 달라진 개정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내놓습니다. 시는 조금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번 생에 만난 사람들과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2020년 3월 제주에서 씀. - 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