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늙은 내가 들어가게 될 요양원에 대해 생각하는데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개인 물품은 아주 적어서 6인실의 침대 옆 협탁에는 세 권의 책만을 보관할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그중의 한 권이 내가 쓴 이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할머니들이 그게 뭔데?라고 물으면 조금은 머쓱하고 조금은 뿌듯해하며 내가 쓴 책이라고 자랑하다가 잘난 척한다고 욕도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났다. 나는 그렇게 명랑하고 고독하게 나와 함께 잘 늙고 잘 죽어갈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건 안 될 줄 알면서 안 되는 걸 한 기록이자 열두 명의 친구들이 내게 들려주는 길고 긴 농담. 이 농담이 다른 분들께도 농담이 되어 주길 꿈꾸면서.
아주 긴 입덕 부정기를 지나 이제야 고백하건 대, 나는 소설이 좋다. 때로는 소설이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해, 라고 뻔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자주 내 소설 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해지지만 그건 나의 문제일 뿐, 소설은 언제나 나를 한결같이 담대하고 공평하게 사랑해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건 소설을 사랑하며 읽고 쓰는 많은 독자들, 이야기의 팬들이 소설에, 그러니까 나의 최애에게 만들어준 선한 영향력 덕분이 아닐지.
복미영의 이야기를 쓰며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이 소설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복미영의 팬이 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나의 소심한 바람일 뿐, 복미영은 자신이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 제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독자에게라면 용맹하고 경솔하게 먼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나의 팬이 되어라. 그리고 부디 지금부터 내가 나의 팬을 위해 준비한 작고 다정한 역조공 이벤트를 받아주길 바라.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의 팬이 될 수 있도록 당장 너의 팬 클럽을 만들어라. 나는 내가 못 하는 것들을 복미영이 해서 좋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마이쭈와 초코파이, 그와 유사한 작고 다정한 것들을 건네고 나눠먹는 것으로밖에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내 소설의 인물들은 자꾸만 별것도 아닌 것을 건네주고 건네받곤 하는 모양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굳이.
그것이 여기 담긴 여덟 편의 단편에 담긴 마음.
이 이야기를 처음 쓴 것은 2015년 겨울이었다. 2년 전 공모전을 통해 한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지만 아무도 내게 다음 책을 기대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썼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그때 쓸 수 있는 것을 썼다. 내면의 악에 대한 공포와 통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 채 영원히 어둠과 절망 속에서 평온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서. 세상 밖에 가짜 전쟁을 풀어놓는 것으로 비로소 얻는 평화가 뿜어내는 짓무른 악취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절망의 전염성에 대해서.
한동안 나는 이 소설을 세상 밖으로 내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나쁜 상상과 비관, 기저에 깔린 혐오의 정서는 이미 세상에 팽배했기에 굳이 이야기를 통해서 더 많은 절망과 어둠을 풀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쓴 덕에 나는 방 밖으로 한 발씩 나와 느슨한 연대로 서로의 고독을 응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단 어둠을 재료로 만든 절망의 실타래라도 애써 두 손 모아 꽁꽁 뭉쳐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을 풀어 다시 희망을 짜는 일은 조금 수월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방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둠이 눈에 익어야 하듯이.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