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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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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기억으로 넘어간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낯익은 거실,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C. 모든 것이 똑같다. 리사는 그것이 조금 전에 봤던 것과 같은 기억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인을 하려고 팔을 휘두르는데, 재이가 그 팔을 붙잡으며 말한다. “그냥 일단 봐.”
민지형의 장편소설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에는 기억을 업로드하고 체험하게끔 하는 기기가 나온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특권을 지닌 존재다. 다만 그중 일부는 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특권조차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잠시나마 즐긴다. 그러나 개인의 기억이란 진실일지라도 사실이 아니며, 하물며 같은 사건을 복수의 당사자들은 다르게 기억한다. 사실과 망상이 섞인 기억이 파일 형태로 공유되는 시대에, 호기심 가득한 가사 도우미 재이, 라이프 랜드스케이프의 개발자 리사는 만난다.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은 혼자서는 결코 깨고 나올 수 없었을 세계를 산산조각으로 박살 내 줄 이를 만나, 비로소 잊고 있던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되는 이야기다. 재이는 알고 싶다 : 살면서 복수를 꿈꿔 보지 않은 여자가 세상에 있을까. 다른 여자의 고통과 마주할 때마다 함께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던 여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도둑, 협잡꾼, 냉혈한, 거짓말쟁이, 규칙 위반자이자 포기를 모르는 승부사이기도 한 이 소설 속 여자들은 자신들이 머무르도록 그어진 선 밖으로 질주하며 우리가 때려 부수고 싶어 했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사막 한가운데서도, 지옥에 떨어져도 뻔뻔하게 웃으며 살아 돌아올 주인공이 함께 절벽을 뛰어넘자며 손을 내민다면 당신은 어떨까? 주저하기 전에 기억하자.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 사람들의 기억이 업로드되어 행복하고 짜릿한 기억들만 언제든 다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면, 그런 기억들이 타인에게 생생하게 공유될 수 있다면, 인간의 기억과 망각이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이 질문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이미 인간의 두뇌가 외부로 확장된 시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외부 기억 장치와 클라우드 접속 단말 노릇을 하고, 저마다 SNS를 이용해 보고 듣고 느끼고 누린 것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지금, 민지형은 아직 오지 않은 신기술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가 빚어낸 미래를 통해, 첨단 기술과 자본주의가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시대의 명암을 그려 낸다. 마치 SNS의 확장판 같은 발랄한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이 업로드되어 공유되고 재생되는 콘텐츠가 될 때, 경험한 기억과 생생한 망상이 뒤섞이고, 때로는 해상도를 높이거나 낮추며 수정될 때, 기억을 콘텐츠로 만들고 다시 체험하는 과정에서 어떤 기억이 타인의 의지에 따라 삭제되거나 변조될 때, 우리의 “기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람들의 비밀에 관심이 많고 선을 넘나드는 트릭스터 가사 도우미 재이와,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리사, 그리고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호라이즌의 총수로 냉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노아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기억”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끔찍한 기억이 타인의 음습한 욕망의 먹이가 되고, 개인의 기억을 권력을 쥔 자들이 입맛대로 손댈 수 있는 시대, 타인의 업적을, 정치인의 비리를, 기업의 과실을, 대형 참사와 노동자의 죽음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우고, 다크웹을 통해 누군가의 악몽 같은 순간들이 “죽이는 파일”의 형태로 돌아다닐 때, 이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혹은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의 힘이다. 누군가는 욕망을 위해 이용하는 타인의 기억에, 누군가는 공감하고 연대하며 복수에 나선다. 시스템에서 그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혹은 그 당사자가 죽는다 해도, 기억을 이어받는다는 행위는 뜻을 이어받는 일이다. 망각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지가 주는 마음의 평화라면, 고통을 기억하고 의지를 이어 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미래로 가는 열쇠다. 기억하고 기록하여 과거를 미래로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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