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군과 싸우면서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로 지정 당시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다. 그러다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회의에서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최근작 :<의역 난중일기> ,<난중일기> ,<그림으로 보는 난중일기> … 총 93종 (모두보기) 소개 :1545년 3월 8일 문반 가문의 셋째로 태어났다. 1576년에 병과로 급제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에서 전승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최초로 임명되어 15... 1545년 3월 8일 문반 가문의 셋째로 태어났다. 1576년에 병과로 급제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등에서 전승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최초로 임명되어 1594년에도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7년 1월 조정을 기망한 죄로 통제사직에서 파직되어 투옥되었다. 출옥 후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9월 16일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 척의 왜선과 맞서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1598년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 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3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3개월 전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2,539일간의 기록들
국보 제76호,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류성룡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비판, 나라에 대한 애틋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비책(秘策)이 담긴 일기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 전야 일기
15일 계묘.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에 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떠한 신인(神人)이 지시(指示)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이 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전야에 쓴 일기로 이순신 장군의 결의를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말과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고 서 있으면 능히 천 사람도 막을 수 있다”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님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여러 장수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결의를 다진다고 해서 용기가 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전선이라곤 판옥선 12척이 전부였다. 당시 왜군의 규모는 명확하지 않으나 133척이었다고 추정되니 누가 보더라도 패색이 짙은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이 꿈까지 운운하면서 장수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할 만큼 매우 급했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이 처절할 정도의 결의를 다지고 사기를 북돋울 때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편입하려고 했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군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유명한 어록으로 이를 잠재운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이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순신 장군의 길고도 장엄한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난중일기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읽히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순신 3부작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 역시 “힘들 때마다 ‘난중일기’를 습관처럼 읽으면서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도 있었다.”고 했고,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역을 연기한 박해일은 “이순신 장군은 붓과 활이 잘 어울리는 군자다운 무인”이라고 했다.
조선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고통과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임진왜란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순신이라는 명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노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다. 난중일기는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관한 내용을 적은 진중의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 후
정조는 왜 이순신 장군의 책을 만들라고 했을까?
23전 23승 전승(全勝)의 비책이 담긴 기록 난중일기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군과 싸우면서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난중일기는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로 지정 당시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다. 그러다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되었다.
거북선과 학익진으로 전투에서 이기고,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준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노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다. 난중일기는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관한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연도별로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전쟁에 패했을 것이고 류성룡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7년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날,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 · 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水軍)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慷慨)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식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이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전쟁에 패했을 것이고 류성룡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는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과 함께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치욕스러운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께서는 피로 쓴 임진왜란의 이 책들을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