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많은 독서를 통해 세상을 사는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익혔다. 앞선 이들의 좋은 점을 책으로 간접 경험했다. 다독과 정독을 병행했는데 중요하거나 이해를 더 깊게 해야 하는 책들은 100번 이상 읽었다. 구양수와 소동파가 주고받은 시를 정리한 <구소수간>을 1,100번을 읽은 게 좋은 예다. 이처럼 정사에 바쁜 임금은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고(四鼓: 오전 2~4시)에 일어났고, 하루 5시간 공부원칙을 지키며, 내전(內殿: 왕비의 거처)에서도 글 읽기에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세종의 독한 공부는 평생 공부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정치, 문화, 경제, 군사,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왕자 시절에는 아버지 태종이 걱정할 정도로, 등극 이후에는 신료들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공부에 몰입했다.
최근작 :<혁명가와 의병장을 키운 어머니> ,<세종대왕 자녀교육법> ,<묵재 이문건의 문학과 예술세계> … 총 13종 (모두보기) 소개 :신문기자 출신의 역사작가로 조선왕실 비화에 밝다. 구전과 문헌, 현장 취재를 종합한 세종대왕 스토리 발굴로 인기가 높다. 20년 넘은 언론계 생활을 뒤로 하고 서울시립대에서 조선왕실사를 강의했다. 현재는 서울자유시민대학 교수로 역사와 스토리텔링을 강의하고 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사직 환구 왕릉제향 전수자다. 지은 책으로는 <세종의 공부>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 <태조와 건원릉> 등 10여 종의 베스트셀러가 있다.
“인문학과 실용학의 경계를 넘다”
세종의 하루 5시간 독한 공부
세종의 신조인 ‘여의이위범사전치 칙무불성予意以謂凡事專治, 則無不成’은 무슨 일이든 전력을 다해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세종은 많은 독서를 통해 세상을 사는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익혔다. 앞선 이들의 좋은 점을 책으로 간접 경험했다. 다독과 정독을 병행했는데 중요하거나 이해를 더 깊게 해야 하는 책들은 100번 이상 읽었다. 구양수와 소동파가 주고받은 시를 정리한 《구소수간》을 1,100번을 읽은 게 좋은 예다. 이처럼 정사에 바쁜 임금은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고(四鼓: 오전 2~4시)에 일어났고, 하루 5시간 공부원칙을 지키며, 내전(內殿: 왕비의 거처)에서도 글 읽기에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다. 세종의 독한 공부는 평생 공부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정치, 문화, 경제, 군사,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왕자 시절에는 아버지 태종이 걱정할 정도로, 등극 이후에는 신료들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공부에 몰입했다.
수학은 제왕학의 근본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실용학보다는 인문학에 깊이 빠졌다. 물론 조선시대 실용학과 인문학의 구분은 현재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추구한 책 읽기는 독서공부였다. 삶의 자세를 궁극적으로 탐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계기로 삼았다. 유교 인문학은 철학적인 면에 치우쳤다. 세종은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실용학과 인문학이 융합되어야 함을 생각했다. 그래서 신료들에게 실용학인 역사학 공부를 권유했다. 수학, 천문학, 음악, 의학, 역사학, 외국어 공부는 모두 생활을 윤택하게 하려는 방편이었다. 수학을 국가 경쟁력으로 보고, 연구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요구했다. 향악과 아악을 고루 신경 써 맹목적인 보수와 무조건적인 외국문물의 수입에서 이상적인 균형을 유지하게 했다. 또 하늘길은 조선과 명나라가 다름을 분명히 하고 독자적인 천문학 공부 분위기를 조성했다. 의학과 역사 공부에서도 주관을 확립시켰다. 학문 탐구는 과학과 미신을 구분하게 했다. 이처럼 겉만 화려한 공부보다는 인문학과 실용학의 경계를 넘어 자신과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공부를 독려했다.
충보다 효! 최고의 스승은 아버지다
세종의 궁극적 꿈은 예의국가 완성이었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보살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왕실부터 솔선수범해야 효과적이다. 왕은 자기도야에 이은 만백성의 바른 통치에 나섰다. 임금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었고, 노인에게는 일어서서 답례했다. 제왕의 모습이 아닌 아들과 연소자의 예절을 택했다.
또 최고의 스승은 아버지임을 인식하고 세자, 수양대군을 직접 가르쳤다. 그 방법은 밥상머리 교육이었고, 스토리텔링 교육이었고, 내리 공부였다. 세종의 육성이다.
“나는 날마다 세자와 더불어 세 차례씩 같이 식사한다. 밥을 먹은 뒤에는 세자가 동생들에게 옛 교훈에 대해 말하게 한다. 나도 또한 수양대군에게 공부를 가르쳐준다.”
며느리를 훈계하기 위해 《열녀전》을 가르쳤고, 왕족에게는 엄격한 원칙을 요구하며 종학에 입학시켜 교양교육을 받게 했다.
평생공부가 만든 세종의 지식경영
세종 치세를 이끈 대표 주역인 허조, 황희, 맹사성, 변계량은 모두 스타일이 달랐다. 허조는 원칙주의자인 반면에 황희는 극단의 대립을 피하는 중용의 덕을 설파한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자연론자였고, 변계량은 문장력이 일품으로 많은 것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허조는 법가, 황희는 유가, 맹사성은 도가, 변계량은 불가적인 내음이 났다. 이들의 특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세종의 이상주의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융합됐다.
또한, 임금은 이론과 실습을 중요시했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이 한 예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세자에게 강무, 대리청정을 지속적으로 시켜 이론공부와 실습을 병행 할 기회를 주었다. 생계형 범죄와 인륜 범죄를 구분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보장제도를 실천했다. 많은 공부를 통해 투철한 역사관, 국방관을 가진 임금은 나라의 강토를 넓혔고, 국민 통합을 위해 계승의 정책을 펼쳤다. 이처럼 다양한 인재를 다스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창의력과 실행력은 세종의 깊이 있는 평생 공부에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