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 모두 곤하게 자는 시간에 아버지는 벌써 논에 다녀오시고, 보글보글 된장찌개 냄새에 잠이 깨면 아이들은 닭 모이도 주고 소 먹이도 주고 소꿉장난에 나물 뜯기, 물놀이에 하루 종일 바빴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원한 우물물에 목 축이고, 밤이면 그림자 놀이에 쏙 빠져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노는 게 참으로 자연스러웠던 우리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진경 작가는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가 지나는 동안 시간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색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새벽의 색과 한낮의 색, 저무는 하루의 색과 밤의 색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는지 감상하는 즐거움이 무척 크다.
이진경 (그림)의 말
그림책 그림을 그려 본 적 없는 나의 첫 번째 그림책이다.
몹시 추웠던 지난겨울에 그렸다. 3년 만에 완성된 그림들이다.
들장미 넝쿨이 담장에 걸린 그늘 아래 꽃을 따고 싶어 오랫동안 그 밑을 오가던 순간을 기억한다. 얇은 운동화에 닿는 자갈과 발바닥에 따뜻함과 이마를 스치는 언덕에서 부는 고요한 바람도 기억한다. 쨍쨍한 햇볕 아래 그늘을 따라 걷던 골목의 그냥 그런 소소한 풍경 속에서 등 뒤에 흐르던 땀 냄새를 맡고 한 발 한 발 터벅이던 어린 발끝. 난 이런 시절을 보내고 살아왔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작업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숨과 숨 사이, 노란 나비의 팔랑이던 허공과 이름 모를 벌레의 얇은 날개에 비치는 빛나던 황홀함.
누렇고 낮게 번지던 흙먼지의 느림. 비 오는 소리를 듣던 안방과 유리 창틀에 고인 물이 닿던 기분 좋은 차가움. 동그랗고 하얀 펌프가 돌아가며 내는 휘발유 냄새와 소리가 퍼지던 마당.
연필을 깎아 주던 아버지의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습기와 서늘함이 있던 마루를 좋아했다.
좀 떨어진 공터에 산들거리던 띠풀과 강아지풀을 바라보던 푸른 놀라움. 그들을 따라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수박씨를 심고 새싹을 간절히 아끼는 마음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던 한낮. 저마다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
그 눈부신 시간을 지나오던 모든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를 난 기억해 냈다. 지금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그걸 아는 것이, 세상에 빛나는 놀라움과 순수 그리고 온전히 믿고 다 열려 있어 기쁜 상태. 이것이 내겐 이 작업의 의미다.
이것들을 느끼도록 도와준 햇볕. 풀. 별과 어머니. 그리고 수많은 나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