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우화의 강>, <이슬의 눈> 등 부드러운 언어로 삶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감싸안는 시인 마종기.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는 마종기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아 지난 50년 동안 발표한 시 가운데 50편을 고르고, 각각에 얽힌 사연을 수록한 시작(詩作) 에세이이다.
처음 해부용 시체를 마주하고 느낀 삶과 죽음의 경계, 처음으로 꽃을 피우는 꽃나무처럼 순수하고 떨리던 젊은 날, 그 말하지 못한 모든 이야기들, 먼 타국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환자들, 장남이 되어서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임종, 외로운 이민 생활을 함께 견디며 살다가 무장강도에게 목숨을 잃은 동생을 향한 그리움… 거친 인생의 전기를 맞을 때마다 시인의 상처를 다독였고, 많은 이들에게 살아갈 희망과 위로가 되어준 50편의 시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물빛과 하늘빛을 여백으로 거느리고 있는 시, 갈대처럼 바람을 타고 있는 시, 따뜻하면서도 맑고 쓸쓸하면서도 담백한 삶이 살아있는 시, 쉬우면서도 단단하고 단순하면서도 순한 희망을 놓지 않는 시, 시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서로를 울력하듯 어깨를 맞추고 있는 시…… 스스로를 정련하지 않고서는, 아니 이 삶을 견인하지 않고서는 얻기 어려운 시의 경지라는 걸 선생님의 삶과 시를 보며 새롭게 깨닫고 있는 즈음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는 시인이 되었고 그 시간으로부터 그는 시를 살면서 시간을, 서정을, 그리고 그리움을 살았다. 그는 별이다. 비유가 아니다. 그 별의 중심에 심을 박아 물을 끌어올리고, 땅을 일구고 집을 지어 추운 영혼들을 이주시키는 그는 어느 먼 별의, 우리들의 가장이다.
: 국문과를 다니면서, 창작동아리에 나가면서 기성의 시와 시인들을 냉소하며 한껏 건방져 있던 나는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읽고 겸손해졌다.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이 시집 모든 책장의 귀퉁이를 접어두어야만 했으니까. 이로써 나는 고수가 세상에 정말 있으며, 내가 그를 알아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절대 고수의 놀라운 검술을 목도한 시골 칼잡이처럼 이후 나는 말수가 줄었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첫 장을 열면 저자의 서문에 시선을 두게 된다. ‘내가 낳지도 않고, 평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내 삶의 중심에서 나를 지탱해준 조국, 세상의 모든 비바람을 피해 늘 의지해온 내 조국에게 오래 다져온 사랑과 그리움으로 이 책을 삼가 바칩니다.’
작가에게 조국은 모국어라고 했던 이는 얼마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이다.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시인에게 조국은 더욱 더 모국어일 터이다. 이 말에 비추어 본다면 시력 50주년을 맞이해 출간된 이 책을 조국에게 바친다고 했으니 결국 이 책에 들어있는 시와 에세이들을 그는 한국어에게 바친다고 쓰고 있는 거라고 나는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1966년에 이 땅을 떠나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간절한 이정표 같은 아름다운 시들을 썼다. 그는 ‘내가 시를 안 썼으면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숨긴 채 스스로 선한 50편의 시에 담담하게 시의 뒷이야기를, 혹은 시가 탄생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시가 지어지는 바로 순간의 이야기를 시 옆에 펼쳐놓았다. 격렬하고 비통하기도 한 그의 자전을 통해 우리 굴곡 많은 현대사의 형편들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국경 너머의 세계를 접하다 보면 어찌된 셈인지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 온 그를 통해 오히려 한국어의 정서와 그늘과 뿌리와 소슬함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그에게 모국어는 두고 떠났던 그 모든 것들의 영혼을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또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모국어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하룻밤을 더 모으면 이슬이 고일까,/ 그 이슬의 눈을 며칠이고 보면/ 맑고 찬 시 한편 건질 수 있을까,/ 이유 없는 목마름도 해결할 수 있을까. -「이슬의 눈」 中에서->와 같이 투명한 시를 우리가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슬은 아침이 되어서야 맑은 눈’을 뜨고 ‘간밤의 낙엽을 아껴’ 준다고 쓰는 한 시인의 시력 50년을 기념해 엮은 오십 편의 시와 오십 편의 이야기가 이 여름의 더위를 누그러뜨려주기를.
내 문단 등단 50년을 기려주겠다고 해서 졸시 50편을 골라 그 시에 관련된 이야기나 그 분위기에 대한 글을 보태어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러나 내 시에 대한 분석이나 해석이나 이론이 아닌, 그 시를 읽으면서 내가 시를 썼던 당시의 내 문학적 상상력이나 당시의 분위기를 평이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정말이지 시는 애초부터 내게는 사랑의 대상이었지 분석과 해석의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시일지라도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몸의 어딘가에 눈물의 흔적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밤잠을 설치면서 허둥댄 흔적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 탓일 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나는 오늘도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늦은 나이의 하룻밤을 지새우며 볼품없는 시 한 편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가족도, 이웃도, 그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외국의 하루, 혼자 목소리를 낮추어 새로 만들어본 시 한 줄을 가만히 읽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 시인의 시도 정성껏 읽어본다. 그리고 그 시에서 우러나오는 빛나고 뿌리 깊은 기쁨을 혼자 은밀히 즐긴다. 그런 기쁨 역시 아무의 것도 아닌 바로 나 혼자의 것, 그래서 나 혼자의 승리라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그 뿌듯한 마음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