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훈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배가 좌초하면서 헨드릭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들은 그 후 13년 동안 조선에 머문 뒤, 1666년 본국으로 탈출하였다. 하멜은 자신의 소속 회사에 사고 경위와 체류일지 등을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하멜 표류기’로 출판되었다. 17세기 당시 조선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코리아 리포트’인 셈이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하멜은 위로는 왕,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접촉하며 당시 조선사회의 이모저모에 관해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세계가 12개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바다 시계(視界)는 태국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중국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실제 하멜 일행의 체류가 독자적 대외 교섭 시도로 비칠까 염려하여 청나라에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 겹쳐 조선 사람들은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남쪽 오랑캐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세상 물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2세기 후에 전개될 망국(亡國)의 씨앗이 이미 이때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20세기 들어서야 하멜일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여름, 350년 전 한 서양 사람이 쓴 조선 관찰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오늘을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