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비롯한 현대문학의 거장 24인이 쓴 동화들을 묶었다. 작가들의 개성만큼이나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 24편이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생과 소멸, 소외와 부조리, 사랑과 열정, 여유와 희망 등 우리 삶을 사유와 깨달음으로 이끌어내는 테제들로 가득한 동화 모음집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보여주는 그로테스크와 환상성, 게오르크 카이저의 시공을 넘나드는 상상력, 호르바트의 기지와 반전, 구스타프 마이링크의 환상과 서사,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토마스 만이 보여주는 은유와 익살의 세계, 요아힘 링엘나츠의 유머와 풍자... 대가들의 통찰력 깃든 문학세계의 한 단면과 함께, 그들의 구속받지 않는 상상의 세계, 인간의 심연을 향한 첨예한 이성주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최근작 :<기도시집>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필사노트> ,<[큰글자책] 평생 간직하고픈 시> … 총 252종 (모두보기) 소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12월 당시 오스트리아제국 보헤미아 지역의 프라하에서 하급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보호 아래 남겨진 그는 10세부터 14세까지 육군 초급 군사학교를 거쳐 예비사관학교로 진학했으나 병으로 중퇴한 후 프라하, 뮌헨, 베를린의 대학에서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18세였던 1894년 첫 시집 「삶과 노래」을 발표한 후 1926년 12월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시인으로 살았다.
그의 삶은 유소년시절 11년과 생애 마지막 5년을 제외하고 한 곳에서 1년 이상을 계속해서 머문 적이 없는 노마드의 삶이었다. 그의 여정은 뮌헨, 베를린을 시작으로 보르프스베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프랑스의 파리는 물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여러 도시에까지 이른다. 특히 루 안드레아스─살로메와 함께 한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 여행과 로댕의 비서로 머물렀던 파리 체류 경험은 그의 문학에 깊이 각인되었다.
릴케는 이러한 체험과 함께 타고난 섬세한 감수성과 직관력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적이며 실존적인 문제인 죽음과 사랑, 그리고 고독과 신을 깊이 파헤친 많은 작품을 썼다. 러시아 여행과 세기 전환기 대도시 파리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신과 죽음과 가난을 풍부한 감성으로 노래한 연작시 『기도시집』, 시 「가을날」이 들어 있는 『형상시집』, 자신의 대도시 파리의 체험을 투영한 소설 『말테의 수기』, 로댕과의 만남에서 얻은 조형미에 대한 깨달음에서 쓴 소위 사물시들을 담은 『신시집』, 에집트, 스위스, 이탈리아와 스페인 체류의 흔적이 새겨진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소네트』를 썼다. 20세기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작품들이다. 이외에 단편소설, 희곡, 프랑스어로 쓴 시와 『로댕 론』, 『보르프스베데』 등 예술론, 그의 “소유 대신 관계”를 증언하는 만여 통의 편지를 남겼다.
최근작 :<자본종교> ,<독일인들> ,<카프카와 현대> … 총 58종 (모두보기) 소개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년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고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에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활동을 펼쳐나간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던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젠베르크』(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
수상 :1929년 노벨문학상 최근작 :<토마스 만 단편 전집 2> ,<노벨라33 세트 - 전33권 (활판인쇄 양장 1천 세트 한정판)> ,<기만> … 총 388종 (모두보기) 소개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평론가. 독일 북부의 뤼베크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기말의 암울한 데카당스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일찍부터 문학,?예술, 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189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보험회사에서 잠시 근무했고, 뮌헨으로 이사 가 1933년까지 살았다. 이때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했고,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 등에 심취했다. 1898년 단편집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발표하고, 1901년 《부덴브로크가》를 출간하여 작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어 1903년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등을 집필한다. 1905년에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그해에 장녀 에리카 만을 얻는다. 1911년에는 휴양지에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0월에 600쪽이 넘는 방대한 논문집 《비정치적인 사람의 관찰》을 완성하는데, 여기서 그는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경향에서 멀어져 나중에는 민주주의와 시민계급을 옹호했고, 이러한 세계관이 반영된 대작 《마의 산》을 1924년 발표, 소설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1933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이라는 제목으로 국외 강연 여행 도중 히틀러의 집권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을 포기한다. 이후 스위스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을 집필하여 1943년에 4부작을 완성한다. 1936년에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1938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는데, 여러 강연과 연설로 바쁜 와중에도 1947년 음악과 독일에 관한 소설이라 할 만한 《파우스트 박사》를 내놓는다. 1952년 미국에서 스위스로 거처를 옮기고 3년 후인 1955년 취리히에서 영면한다.
최근작 :<떠나간 자의 노래> ,<푸른 순간, 검은 예감> ,<몽상과 착란> … 총 102종 (모두보기) 소개 :(Georg Trakl, 1887-1914)
표현주의 시단(詩壇)에서 가장 뛰어나고 높이 평가되는 트라클은 27세의 나이에 자살하였다.그는 오스트리아 소도시인 잘츠부르크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하고 시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가정교사의 덕택으로 불어를 습득하여 랭보, 보들레르의 시를 탐독하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 시는 보들레르, 랭보적인 시풍이 나타난다.
1912년 이후 잡지 <브렌너>의 편집자인 핏커를 만남으로 도움을 받고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한다. 트라틀은 스스로 퇴패한 집안의 후예라고 여기고 집안에 대해 반항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는 인생을 보낸다. 그는 술과 마약, 죽음의 예감과 삶과 절망 속에서, 그리고 누이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원죄 속에서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의무병으로 참전한 전쟁터에서 실재 전쟁의 비참한 참사와 정신이상 그로 인한 마약의 과다복용으로 자살하였다. 그의 시는 「시집」(Gedicht, 1913)과 「꿈속의 세바스찬」(Sebastian im Traum, 1914) 속에 수록되어 있으면, 1948년 이후 3권으로 된 그의 전집이 발간되어 시 전부가 수록되어 있다.
최근작 :<임멘 호수 / 바다 저편에서> ,<[큰글자책] 임멘 호수 / 바다 저편에서> ,<테오도르 슈토름의 임멘 호수와 대학에서> … 총 62종 (모두보기) 소개 :19세기의 서정시 시인이며 단편소설 작가인 테오도어 슈토름은 1817년 9월 14일 독일 북부의 해안도시 후숨에서 법률고문관의 부유한 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동안에는 네 살 때 벌써 사설 초등학교에 다니는 등 안락한 나날을 보낸다. 1826년부터 1835년까지 후숨의 인문계 9년제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는데, 마지막 3학기 동안에는 뤼벡의 신(新)인문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한다. 여기서 시를 쓰고, 고대시를 모방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으로 산문을 써 보기도 한다. 후숨에서는 그저 프리드리히 실러만 알고 그에 머물러 있었는데, 여기 뤼벡에서는 괴테뿐만 아니라 아이헨도르프나 하이네 등 저명한 작가들의 “보다 고귀한”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다고 한다. 1833년, 이 시기 후숨에서 발표된 《에마에게(An Emma)》가 그의 첫 시집이다. 1837년부터는 키일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베를린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1대학 생활 동안의 여러 가지 경험들은 훗날의 작품 〈임멘 호수〉와 〈대학에서〉 등 여러 단편소설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테오도어 몸젠, 티코 몸젠 형제와 사귀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의 전설과 동화와 노래 등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당시의 운문에도 친숙해지며 문학지 《유럽(Europa)》(1840)에 자작시를 발표하며, 시인 뫼리케 등과도 어울려 1843년에 《세 친구의 가요집(Liederbuch dreier Freunde)》을 출판한다. 1842년 법학고시에 합격하나, 시험이 끝난 후 노름으로 많은 빚을 안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1843년 4월 중순에 후숨에서 “볼트센-슈토름(Woldsen-Storm)”이라는 이름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1846년 사촌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나 결혼 1년이 지난 다음 도로테아 옌센과 사랑에 빠진다. 가족들의 압력으로 애인 도로테아가 후숨을 떠나게 되는데, 이 무렵의 슈토름의 연작시 《빨간 장미의 책(Ein Buch der roten Rose)》에 열정적인 시구들이 나타나고, 1855년에 창작된 단편 〈안젤리카〉의 여주인공도 이때의 애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슈토름은 작가라기보다는 법률가였으며, 무엇보다도 변호사와 판사로 일했다. 1848년 덴마크의 지배에 반항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민중 봉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친구 테오도어 몸젠의 요청에 따라 이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한다. 또 “애국자선협회”의 창립 동조자가 되고, 이에 대해 그 지방 신문에 기고하기도 한다. 1849년에는 덴마크 왕 프리드리히 7세에 대한 공작 신분을 박탈하고 인적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종식하라는 진정서에 서명한다. 그 후로 덴마크 관청이 슈토름의 분파적 성향을 비난하며 하급재판소의 변호사직 인가를 거부했을 때 베를린에서 그를 포츠담의 지방법원에 무보수로 임용하자 그는 이에 동의해, 1853년 포츠담으로 옮겨 그곳에서 근무한다. 이후 1856년 하일리겐슈타트 지방법원 합의부 판사에 임명된다. 과도한 판사 업무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동아리(Singkranzchen)”라는 새로운 합창단을 구성하기도 하고, 단편소설 〈임멘 호수〉의 삽화를 그린 루드비치 피치 등의 친구들도 사귀며, 〈저편 시장(市場)에서(Druben am Markt)〉, 〈대학에서〉, 〈불레만의 집(Bulemanns Haus〉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과 창작 동화를 집필하기도 한다. 1864년 독일?덴마크전쟁에서 덴마크가 패하면서 슈토름은 후숨 신분제의회에서 주지사로 선출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음 해 5월에는 부인 콘스탄체가 세상을 떠나고, 상(喪)을 마친 다음 1866년 6월 13일 옛 애인 도로테아 옌센과 조촐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다음 해에 프러시아 행정 개혁의 합병 절차에 따라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지방법원 재판관에 임명된다. 이 무렵 〈주정부위원의 아들들(Die Sohne des Senators)〉, 〈이중인간〉 등의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작가 활동도 계속하면서, 1877년부터는 스위스작가연맹의 동료 켈러와 서신교환도 한다. 1880년 5월에 63세의 나이로 조기에 판사직을 정년퇴직하고 하데마르셴으로 이주하여 양로원에 입주한 다음 건강에 해가 될 정도로 긴 여행을 한다.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면서도 마지막 작품 《백마의 기수》를 완성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1888년 7월 4일 하데마르셴에서 질병으로 사망해, 고향 후숨의 성(聖) 유르겐 성당 묘지에 안장된다.
최근작 :<신 없는 청년> ,<빈 숲속의 이야기> ,<피가로 이혼하다> … 총 295종 (모두보기) 소개 :1901년 12월 9일 피우메에서 태어나 합스부르크의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굴곡 많은 청춘기를 보낸다. 크로아티아 왕국 항구도시 피우메에서 헝가리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외된 요제프 폰 호르바트와 어머니 마리아 룰루 헤르미네 프레날 사이에서 태어난 호르바트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거주지를 많이 옮긴다.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군의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02년에 베오그라드로, 190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이사한다. 여기서 호르바트는 가정교사에게 헝가리어로 교육을 받는다. 1909년 그의 아버지는 뮌헨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나 호르바트는 부다페스트에 남아 대주교가 관할하는 기숙학교에 다닌다. 1913년에 뮌헨에 있는 부모에게로 가서 처음 독일어를 배운다. 그 후 프레스부르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빈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1919년 고등학교를 마친다. 김나지움을 마치고 같은 해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심리학, 문학, 연극학, 예술학 강의를 듣는다. 1920년 ≪춤의 책(Das Buch der T?nze)≫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뮌헨에서 ≪짐플리치시무스≫를 간행하는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문학 활동을 펼쳤는데, 극작품 열여덟 편 이상, 장편소설 두 편을 창작하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호르바트는 헝가리, 프라하,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에 도달 한 그는 1938년 6월 1일 어처구니없게 때 이른 죽음을 맞는데, 샹젤리제 거리에서 벼락에 맞아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사망한다. 이후 호르바트는 수십 년 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에 와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 목록에 들어가고, 크뢰츠, 슈페어, 투리니 같은 이 시대 신민중극 극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그가 상황을 묘사하고 정확히 분석하는 방법은, 개인의 운명을 일반적인 사회적 위기의 징조로 묘사하는 것이고, 이는 현실성 있으며 시대에 부응한다. 그는 자기 작품을 “민중극”이라 부르면서 사회 비판적 시대극을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킨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행복한 지붕수리공> … 총 4종 (모두보기) 소개 :1883년 독일 작센주 부르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스 뵈티혀(Hans Bo"ticher). 1919년부터 요아힘 링엘나츠(뱃사람들이 쓰는 말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어린 해마'를 뜻함)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친 뒤 바다에 나가 마도로스로 일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소해정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25살 때부터 뮌헨의 '짐플리치시무스' 예술가 카페에서 자작시를 낭송했다. 1920년 발터 메링의 눈에 띄어 베를린의 소극단 '음향과 연기'에 출연했고, 작가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체조시>와 <쿠텔 다델두>를 출간했다. 이후 독일 전역을 떠도는 방랑예술가로 곳곳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독일식 유머의 대가로 칭송받았다. 1933년 나치 치하에서 이른바 나치식 표현의 '퇴폐예술'로 몰려 모든 저작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1934년 지병인 결핵으로 삶을 마쳤다.
지은 책으로 <수습선원의 수기>, <코담배통>, <누구나 그렇게 살지>, <요정 네르보지포펠>, <하지만>, <마도로스 회상록>, <비행기에 대한 생각>, <그림 동화>, <행복한 지붕수리공> 등이 있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12종 (모두보기) 소개 :오스트리아의 동화작가이자 번역가, 소설가이다. 노동자들의 연대의식과 사회적 투쟁을 알리는 단편소설들을 주로 썼다. 주요 작품으로 <보안경찰 칼 뮐러>, <하얀 흑사병>, <우리의 딸들, 나치 동참자들>, <저주의 섬> 등이 있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91종 (모두보기) 소개 :1880년 독일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정관적이고 익살스런 이야기들과 장편소설 그리고 시를 썼다. 스탕달과 발자크를 번역했으며, 프랑스에 망명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주요 작품으로 <잃어버린 놀이 동무들>, <행복의 잡화상>, <향수의 자극> 등이 있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3종 (모두보기) 소개 :1883년에 태어났다. 독일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행한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문학작품에도 그대로 반영한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선동극 '노동자, 농민 그리고 스파르타쿠스'가 있다.
최근작 :<[큰글자책] 베르나데트의 노래> ,<베르나데트의 노래>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 총 287종 (모두보기) 소개 :1890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베르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운송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르펠은 얼마 뒤 라이프치히의 한 출판사에 들어간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틈틈이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 사이에 『세상 친구』, 『우리는』, 『서로』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내는데, 탁월한 표현주의 시인의 출현이라는 평을 얻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베르펠을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시인으로 일컫기도 했다. 베르펠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은 『베르디. 오페라 소설』(1924)이다. 음악가 베르디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오델로」가 작곡된 과정을 담고 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주하고 있던 베르펠은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고, 1940년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전까지 장편소설 『고등학교 동창회』(1928), 『바바라 혹은 깊은 신앙』(1929), 『나폴리의 형제자매』(1931), 『무사 닥에서의 사십 일간』(1933), 『예레미아.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라』(1937), 『횡령된 천국』(1939) 등을 펴냈다. 희곡 작가로도 명성이 높아 1944년에 발표한 『야코봅스키와 대령』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1941)는 남프랑스에서 쓰기 시작해 망명지인 미국에서 완성, 발표한 작품이다. 또 다른 대표작 『베르나데트의 노래』(1941)는 배우 제니퍼 존스의 출연으로 영화화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5년 세상을 떠났다.
최근작 :<그립스홀름 성> ,<얌전한 레슬러> … 총 277종 (모두보기) 소개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가문 출신의 투홀스키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의 활동 영역은 순수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설가이자 서정시인일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풍자시인, 카바레(춤, 노래 등으로 정치적이거나 시사적인 풍자 등을 하는 무대 예술)작가, 작사가, 문학·영화·음악 평론가로서, 본명 외에도 카스파르 하우저, 페터 판더, 테오발트 티거, 이그나츠 브로벨이라는 여러 필명으로 활동했다. 스스로를 좌파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및 반군국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활동 영역 ... 베를린의 중산층 유대인 가문 출신의 투홀스키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의 활동 영역은 순수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설가이자 서정시인일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풍자시인, 카바레(춤, 노래 등으로 정치적이거나 시사적인 풍자 등을 하는 무대 예술)작가, 작사가, 문학·영화·음악 평론가로서, 본명 외에도 카스파르 하우저, 페터 판더, 테오발트 티거, 이그나츠 브로벨이라는 여러 필명으로 활동했다. 스스로를 좌파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및 반군국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활동 영역 전반에서 이러한 성향이 두드러지는 글을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가 살았던 독일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45세라는 짧은 그의 삶은 독일 근대 역사 상 가장 중요한 시기와 맞물린다. 1871년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한 뒤에 태어난 그는 빌헬름 시대의 군국주의, 독일의 1차 대전 참전과 패망, 그로 인한 왕정의 몰락, 엄청난 인플레이션,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그 뒤를 이은 나치의 집권까지 모두 다 경험했다. 그가 겪은 시대에 대한 비판과 다가올 나치즘에 의한 위협까지 날카로운 시각으로 경고했던 그는 1920년대에 파리로 이주한 뒤에는 주로 외국에 머물렀다. 이 덕에 그의 객관적 시각은 더욱 날카로워져서 독일의 상황을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인지할 수 있었다.
스웨덴으로 이주한 투홀스키는 1935년 12월 21일 밤, 예테보리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1936년 여름, 그의 재는 스웨덴 마리에프레드에 있는 그립스홀름 성 근처 떡갈나무 아래 묻혔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62종 (모두보기) 소개 :1887년에 태어났다. 권력 도취와 반유태주의에 대항했으며 작품을 통해 자각을 부르짖었다. 주요 작품으로 <신의 시종 안드레아 뉠란트>, <소박한 인생>, <죽음의 숲> 등이 있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소묘가이자 화가로 1867년에 태어났다. 정곡을 찌르는 풍자화로 1933년까지 풍자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얼굴을 장식했다. 주요 작품으로 <동화집>, <나는 기적을 기다린다> 등이 있다.
최근작 :<얌전한 레슬러> … 총 120종 (모두보기) 소개 :1879년에 태어났다. 기술적 유토피아의 소재와 미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시사적으로 결합시킨 소설 <터널>을 발표,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었다. 군국주의와 파렴치한 권력의 남용 그리고 파시즘의 비인간성에 반기를 든 작품들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 <예스터와 리>, <바다>, <11월 9일>, <죽음의 무도> 등이 있다.
최근작 :<개를 읽는 시간> ,<아버지와 아들> ,<얌전한 레슬러> … 총 339종 (모두보기) 소개 :오스트리아의 작가로 처음에는 서정시와 희곡을 썼으나 소설 『시계 파는 처녀 로티』로 명성을 떨친 후, 19세기 독일 최고의 여성작가가 되었다. 윤택하고 부유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소농민이나 사회적으로 학대받는 소시민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였으며 선의와 의무감을 중시하는 교육적인 면도 농후했다.
최근작 :<[큰글씨책] 니벨룽겐 > ,<베개 4호> ,<유디트 : 5막 비극> … 총 83종 (모두보기) 소개 :1813년 3월 18일 독일 북부 홀슈타인 지방의 베셀부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난다. 15살 때 교구 사무장 모어 밑에 들어가 22살 때까지 서기로 일한다. 이때 모어의 장서를 이용해 독학으로 교양을 쌓는다. 1831년, 아말리에 쇼페는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에 헤벨의 시를 싣는 것을 계기로 헤벨의 후원자가 된다. 1835년, 쇼페의 도움으로 함부르크로 이주해 뒤늦게 대학 공부를 준비하는 행운을 잡는다. 이 시기에 알게 된 8살 연상의 재단사 엘리제 렌징이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1836년, 헤벨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입학해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지만 곧 법학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한 학기 뒤에는 거처를 뮌헨으로 옮겨 독학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으면서 그리스 비극, 실러 등 위대한 비극 작품들의 공부에 열중한다. 엘리제가 돈을 더 대주지 못하게 되자 그는 1839년 함부르크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이 이루어진다. 1840년 6월, 최초의 비극 <유디트>가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에는 <게노베바>를 완성하고 1842년에는 최초의 시집을 발간한다. 1842년 말, 헤벨은 분위기를 전환하고 적당한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간다. 일자리는 얻지 못하나 당시 헤벨이 살던 지역의 군주인 덴마크 왕으로부터 2년간 여행 장학금을 받는다. 함부르크로 돌아와 희곡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희곡에 관한 나의 견해>를 쓰고 <게노베바>를 출간한 후 견문을 넓히고 예술에 관한 지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파리로 여행한다. 거기서 하이네를 만나 교류한다. 아들의 사망으로 인한 엘리제의 고통을 고려하여 정식으로 혼인할 생각도 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마리아 마그달레나>를 탈고한다. 1844년, <희곡에 관한 나의 견해>를 보완한 것을 에를랑겐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여행하다가 1845년 돈이 떨어져서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빈에 들른다. 저명한 극작가 그릴파르처 등을 만나고 정착 가능성을 타진하나 쉽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그를 작가로서 존경하고 환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자신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고 사생아를 나아 기르고 있는 국립극장의 전속 배우 크리스티네 엥하우스를 알게 되어 생각을 바꾼다. 그들은 이듬해 혼인한다. 이 행복한 결혼은 헤벨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헤벨은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잇달아 작품들을 발표한다. 이제 헤벨은 <마리아 마그달레나>의 분위기, 청년기에서 벗어나 대작으로 눈을 돌린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여파로 일어난 3월혁명의 와중에서, 군대가 빈을 포격하는 혼란 속에서 헤벨이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헤로데스와 마리암네>(1848)가 태어난다. 헤벨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대작 <니벨룽겐>은 <각질 피부를 가진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의 죽음>, <크림힐트의 복수> 등으로 구성된 3부작으로 1855년 10월에 집필을 시작하나 다른 일 때문에 중단하다가 1859년에 다시 시작해 1860년 초에 탈고한다. 만년에 헤벨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그의 작품들이 여러 주요 극장에서 상연되는 영예를 누린다. 헤벨은 러시아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 집필을 시작한 비극 <데메트리우스>를 탈고하지 못하고 1863 12월 13일 빈에서 눈을 감는다.
최근작 :<시인, 죽음을 노래하다> ,<시인, 사랑을 노래하다> ,<모두의 인문학> … 총 112종 (모두보기) 소개 :충북 괴산출생.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동(同) 대학원에서 릴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음. 청주 사범대학 독어과 교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번역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책 읽어주는 남자≫ ≪두이노의 비가 ≫ ≪소송≫ ≪변신≫ ≪데미안≫ 등 다수의 작품을 번역했다.